이계홍의 역사소설 깃발

충무공 정충신 장군<44>-제4장 이치전투

가파른 산마루에 올라 멀리 바라보니 산의 연봉들이 끝없이 이어지고 있었다. 연봉들은 시야가 시리도록 평화롭게 서로 이마를 맞대며 북으로부터 남으로 길게 뻗어 내려가고 있었다.

권율은 시선을 거두어 눈 아래 펼쳐진 진지들을 건너다보았다. 피아 구분없이 진지들은 산개돼 있었고, 병사들의 움직임이 부산했다.

부장(副將) 중 한 명을 대동하고 잡목림을 헤치며 정상에 오르는 사이 매복한 척후병들이 메뚜기처럼 여기저기서 튀어나와 예를 차렸지만, 그는 눈으로만 인사를 받고 숨이 헉헉 차오를 때까지 정상을 치올랐다. 막상 산에서 내려다보는 모든 진지와 군졸들이 움직이는 모습들이 꼭 소꿉장난하는 것처럼 보였다.

이치령은 전주성에서 보자면 연봉들의 시작점이었다. 잔잔한 산줄기들이 어어져 가다가 이치령에 이르러 발딱 발기한 것처럼 우뚝 서있는데, 그곳에서부터 동편으로 진산과 금산, 부항령과 지례, 직지사로 이어지고, 남쪽으로는 무주, 진안, 장수, 거창, 함양, 안의, 산청, 운봉, 남원으로 산줄기가 뻗어내려 이윽고 광활하게 펼쳐진 지리산에 도달했다. 다른 한쪽 연봉들은 추풍령, 직지사를 거쳐 강곡, 창천, 가야산, 합천, 마쌍, 봉강을 거쳐 진주 방향으로 뻗어내리고 있었다.

손에 손을 잡고 서로 이끌 듯이 어어져 뻗은 연봉들이 다정해보이지만, 운무 속에 아스라한 그것들이 아름답기보다 슬픈 풍경으로만 다가왔다. 이 아름다운 산하를 뚫고 고바야카와 다카가게 왜 6군단 주력과 그 휘하 안코쿠지 에케이 병력이 북상과 남하를 거듭하고 있었다. 그들이 대지를 누비는 사이 무수한 백성들이 끌려가고 도륙당하고 강간당하고, 먹을 것과 입을 것을 빼앗겼다. 마을을 소각하고, 절간도 불을 질렀다. 하지만 어느 누구도 당한 그들을 위해 나서거나 구해주는 자가 없었다. 하늘같이 모시는 왕은 기별없는 낭군처럼 너무나 멀리 가있었고, 지방 관리들은 솜이불에 이 박히듯 깊숙이 숨거나 도망가버렸다. 그런 것들이 마냥 슬펐다.

권율은 끝없이 펼쳐진 산의 연봉들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참혹스럽다는 것밖에 나오는 것이 없었다. 더 이상 어찌할 수 없다는 것이 가슴을 쳤다. 그는 어금니를 꽉 물었다. 어떤 결의가 묻어나면 저도 모르게 나오는 행동이었다.

그는 천상의 지붕처럼 아스라하게 펼쳐진 웅장한 지리산 자락을 다시 바라보며 읊조렸다.

“남아감의기(南兒感意氣)요, 공명수복론(功名誰復論)이라…”(사나이는 의기만을 생각할 뿐이지, 어찌 부귀와 명예를 따지겠는가).

그렇다. 남아로서 세운 뜻 펴야 하고, 그것은 나라를 다시 세우는 일이다. 잃어버린 땅을 되찾아야 한다. 거기엔 사나이 의기만 있을 뿐, 부귀와 명예 따윈 거추장스런 장식품이다. 기호품 축에도 끼지 못하는 하찮은 부적일 뿐이다. 굶주리고 초라한 백성을 생각하면 잠시도 그런 명예와 부귀를 생각할 수가 없다.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아름다운 산하를 지키고, 백성을 보호하는 것이 사나이로서 지녀야 할 사명이고 책임이다. 사회적 소명을 다하는 것이 의당 해야 할 바다.

-그런데 이렇게 푸르고 아름다운 산하 하나를 지키지 못하다니…

건너편에 서있는 웅치재에 시선이 머무르자 그는 다시 엄숙한 현실로 돌아왔다. 웅치재 아래로 진안과 완주가 자리잡고 있고, 그 너머 육십령이 솟아 있는데, 그 어드메 쯤에 제봉 고경명 부대가 집결해 있을 것이었다.

-그래, 그분이 와계시지.

나이로는 아버지뻘이었다. 노구를 이끌고 전선에 뛰어든 제봉의 모습이 권율의 눈에 선연히 밟혔다. 그냥 그 자리에 서있는 것만으로도 그는 병사들의 사기를 북돋고, 애국심을 불러일으키는데, 나라가 침탈당하자 침소에 머무르지 않고 육십 노구를 이끌고 직접 전투 현장으로 뛰어든 사람이었다.

식자층은 난리가 났어도 방에 숨어 난세의 아픔을 탄식만 할 뿐 행동으로 옮기는 사람은 없었다. 그런데 그는 다르다. 그것도 두 아들까지 직접 전선에 투입했다. 권율은 제봉을 우러르고, 그의 우국충정을 마음의 사표로 삼았다. 저절로 가슴으로부터 뜨거운 무엇인가가 차오르고 있었다.

권율은 지인 정충신을 척후부사령으로 임명해 제봉 장군에게 위로편지와 함께 밀서를 보냈다. 하루걸이로 다녀오도록 보냈는데 정충신은 아직 돌아오지 않고 있었다.

그러나 정충신은 생각이 있었다. 기왕에 나선 일, 적의 동향도 살피고 돌아올 작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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