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계홍의 역사소설 깃발

충무공 정충신 장군<47>-제4장 이치전투

권율이 이치령에 이르렀을 때는 임진년 6월 말(음력)이었다. 여름의 복판으로 달려와서인지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고, 숲과 골짜기에는 깔따구와 모기, 파리 등 물컷들이 들끓어 왜병 못지 않은 귀찮은 존재가 되었다. 모기가 얼마나 독이 올랐는지 한번 물리면 물린 곳이 혹처럼 부풀어올라 미친 듯이 가렵고, 따가왔다. 몇방 맞은 몸 약한 병졸은 장질부사에 걸려 시름시름 앓다가 어렵게 낫는 자도 있었으나 자고 나니 시체로 변한 자도 있었다.

권율은 왜의 육군이 호남을 함락하기 위해 이치와 웅치에 병력을 집결한다는 첩보를 받았다. 조정은 권율을 전라도 임시절제사로 현지 임관시켜 출동 명령을 내렸다. 용인전투에서 왜에 처절하게 패배한 전라도관찰사(감사) 이광과 삼도방어사 곽영도 잔병들을 이끌고 이치로 내려왔다. 그러나 그들의 동력은 현저히 떨어져 있었다.

숙련된 관군이 태부족한데다 남은 자들은 여차하면 도망을 가려고 눈치를 보았다. 혼내고 겁을 주어도 줄행랑을 놓았다. 기강과 질서는 개판이었다. 하긴 장수들과 지방 관리들이 먼저 도망을 가버렸으니 꼭 그들만을 탓할 수 없었다. 권율은 이래저래 지쳐가고 있었다. 돌이켜보니 지난 몇 달 사이 숨가쁘게 달려왔다. 북으로 올라갔다가 남으로 내려왔다가, 그리고 비상대기했다가, 그 사이 몸은 녹초가 되어버렸다.

권율은 왜의 군단이 다대포, 동래포, 부산포에 상륙하자마자 북상하며 주요 고을을 함락시킬 때, 관병과 농민군을 모아 이들의 뒤를 추격했다. 곽영의 중위장 자격으로 북상을 하는데, 천안 안성을 거쳐 오산 쯤에 이르러 소규모 왜군과 맞닥뜨렸다. 이광과 곽영이 이들을 공격할 것을 명령하자 권율은 생각한 나머지 반대했다.

“적의 대군이 용인에 진을 치고 있는 상황에서 굳이 소수 잡병들과 싸워서 병력의 기운을 소진할 것 없습니다. 병력을 좀더 보강해 북으로 가서 방어선을 쳐야지요.”

“눈 앞에 적병이 보이는데 그냥 두고 가자는 것이오?”

“보인다고 다 칠 수는 없지요. 쳐야 할 것과 치지 말아야 할 것을 구분해야 합니다. 적의 주력을 맞아 타격해야 합니다. 우회해서 화성의 광교산이나 과천의 관악산, 청계산에 이르러 적병들의 북상을 저지해야 합니다. 후방을 치는 것보다 전방에서 저지하는 것이 더 효율적인 방비책입니다.”

방어사 곽영도 이광을 따르는데 권율이 항명하는 듯하자 이광은 성질이 뻗쳤다. 이 자가 누구 빽을 믿고 대드는 거야? 권율이 한양 사직동 사대부의 뼈대있는 집안 출신이라고 했지만, 이광 역시 덕수이씨 성골이었다. 서울 태생으로 청년기까지 문안 밖에 나가본 적이 없는 사대부 자제였다. 좌의정 이행(李荇)의 손자이며, 도사(都事) 이원상의 아들이다.

그도 일찍이 문과에 급제하여 함경도 암행어사로 나가 관북지방민들의 구호실태를 살피고 돌아와 영흥부사에 임명되었다. 뒤이어 함경도관찰사가 되었으며,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전라도관찰사로 발탁되었다. 그는 경상도관찰사 김수(金수), 충청도관찰사 윤선각(尹先覺)과 함께 최고의 지방 수령이었다.

그런데 벼슬이 한참 아래인 광주목사 권율이 대놓고 대들고 있는 것이다. 나이가 몇 살 많다고 하지만 지위상 머리를 들 수 없는 자가 전쟁 났다고 고개를 발딱 들고 대드는 것이 영 싸가지 없어보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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