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계홍의 역사소설 깃발

충무공 정충신 장군<48>-제4장 이치전투

“저들은 병참선이 길어졌으니 힘이 빠져있소. 그러니 지금이 치는 적기요.”

“정반대요. 적들은 지금 도성 함락에 사기가 하늘을 찌르고 있소이다. 그런 그들에게 소소한 싸움으로 힘을 소진시키는 것은 군력의 낭비요. 한 군데로 모아서 써야 하오이다.”

“그건 싸우지 말자는 것과 같소.”

“제승방략 등 여러 병략에서 말하기를, 나에게 유리한 지형지세를 활용하라고 했소. 우리의 지형상 평지전보다 산과 강을 이용한 군사전략이 필요하오이다. 저들은 우리 지형에 어둡소. 그러나 평지는 누구에게나 쉽소이다. 탄금대전투 대패도 늪지대와 논바닥에서 싸웠기 때문이오.”

이광이 발끈해서 되물었다.

“한시가 바쁜 이 마당에 평지전, 진지전, 유격전, 구분할 필요가 있소?”

“유격전이오이다. 산골짜기로 유인해야 합니다. 간사한 도적을 무찌르려면 그보다 더한 신묘한 병략을 내야 하오이다. 적도에게 허를 찌르는 날카로운 병법이 필요하오이다.”

권율은 척후부사령 정충신이 내놓은 기지를 생각하고 있었다. 나이는 어리지만 그의 병법에는 통찰력이 있었다.

전라도관찰사 이광, 경상도관찰사 김수, 충청도관찰사 윤선각(윤국형)이 군사 8만을 이끌고 용인전투를 벌인 과정을 여러 자료를 통해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임진전쟁이 발발한 날로부터 보름 후인 4월 28일 신립의 관군이 충주 탄금대전투에서 대패한 후 전라관찰사(감사) 이광의 4만과 방어사 곽영의 2만, 충청도순찰사 윤선각의 1만5천, 경상도관찰사 김수의 1천 등 약 8만의 병마(兵馬)가 6월초 용인에 집결했다. 이광은 이를 일러 10만 남도근왕군이라 칭했다. 이일 장군이 쓴 ‘장양공 전서’엔 승병까지 합쳐 10만이라 기록했으니 과장이긴 하되 어림수로 수치를 잡는 당시 풍조였으니 지나친 과장이라고 볼 수 없었다. 이때 이광은 군왕군 총사령관이 되었다.

전라관찰사 이광과 방어사 곽영은 장정 8만을 거느리고 공주까지 올라갔다. 이 병력은 단기간에 각 고을 수령들로 하여금 모으게 한 병력이었다. 훈련도 뭣도 갖출 시간이 없었고, 단지 숫자만 불린 잡병들이었다.

이에 군사들이 훈련도 없이 전투에 투입된다고 불만을 가지니 전라도절도사 최원으로 하여금 나머지 4만으로 전라도를 지키도록 하고, 이광은 4만 군사를 거느리고 곽영은 따로 2만의 군사를 갖추고 북상했다.

여산에 이르러 충청도관찰사 윤선각이 거느리고 온 1만5천, 경상도관찰사 김수가 이끌고 온 패잔병 1천과 합류했다. 이들 역시 지방 수령들을 닦달해 모은 잡병들이었다. 훈련이라곤 받아본 적이 없으며 칼 한번 휘둘러본 자는 1할도 못되었다. 굳이 말한다면 밥만 죽이는 무지랭이들이었다. 관군은 도망가버려서 그나마 숫자를 채운다는 것으로 위안을 삼았고, 창 휘두르는 법, 육박전법 따위 실전법은 행군 중 연마했다.

평택 진위에 도착한 이광 윤선각 김수는 작전회의를 여는데. 이때 경기도 피난민과 충청도 피난민이 모여들어서 13만의 군세를 이루었다. 수가 불어난 것에 의기양양해진 이광은 그들을 양떼 몰듯이 몰고 가다가 배고프면 군량들을 풀어 먹였다. 군량 운반은 오십 여리에 뻗치고 펄럭이는 깃발은 하늘을 가릴 정도였다. 꼴은 천지를 진동시킬 위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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