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계홍의 역사소설 깃발

충무공 정충신 장군<50>-제4장 이치전투

짙은 안개 속에서 적들이 군마와 함께 날뛰니 수만 군사가 기습해오는 것과도 같았다. 근왕병은 방향을 잃고 이리 밀리고 저리 쫓기면서 깨졌다. 제대로 훈련을 받지 못한 병사들인지라 안개 속에서 허깨비 춤을 추는 것만 같았다. 이 과정에서 이지시, 백광언과 뒤따른 고부군수 이윤인, 함열현감 정연 등이 전사했다. 지휘관부터 쓰러지니 대군의 기세가 속절없이 무너지고 말았다.(조경남의 ‘난중잡록 임진년 상’ 일부 인용).

이광은 군사에게 철수 명령을 내렸다. 근왕병을 수습해 인근 기슭에 이르러 진을 치고 아침밥을 먹고 있을 때였다. 와키자카 야스하루 기마부대가 기습했다. 갑옷에 철갑 탈을 쓴 왜 군사가 백마를 타고 칼을 휘두르며 돌진하는데 부장 신익이 선봉에 서서 맞섰으나 먼저 목이 달아났다. 연이어 일본군 응원부대가 산골짜기 이곳저곳에서 깃발들을 펼쳐들고 군사의 숫자가 많은 것처럼 위장을 하며 콩볶듯 조총을 쐈다.

병사들이 혼비백산, 한꺼번에 흩어지는 소리가 마치 산 무너지는 소리 같았다. 이광은 장군복을 벗고 평민인 것처럼 흰 옷으로 갈아입고 달아나고, 김수 역시 경상도에서 도망친 것과 마찬가지로 또 줄행랑을 쳤으며, 지휘자를 잃은 8만 군사는 졸지에 천지사방으로 흩어졌다. 일본 기병 두어 명이 10리나 이들을 쫓다가 고립됐는데도 저격하는 자가 없었다.

근왕병 부대가 다급한 나머지 버린 교서ㆍ인부(印符)ㆍ기(旗)ㆍ군기ㆍ군량 등이 여기저기 널부러져서 길이 막힐 정도였는데 적이 수습하다가 귀찮아 불태우고 돌아갔다. 근왕병이 버리고 간 궁시(弓矢)ㆍ도창(刀槍)ㆍ양자(糧資)ㆍ기계(器械)ㆍ의복(衣服)ㆍ장식(裝飾)도 낭자하게 버려져서 개울을 메우고 골짜기에 가득하여 산골짜기에 숨었던 파난민과 촌민들이 기어나와 그것을 주워 모아 한동안 생계를 꾸렸다.

용인전투의 패배가 안겨준 상처는 컸다. 조선군의 군세가 현저히 위축되었다는 점 뿐 아니라 백성들 뼛속까지 절망감과 상실감을 안겨주었다. 더 치욕스러운 것은 8만의 병력이 단 1천600의 왜 군사에게 무참하게 무너졌다는 사실이다. 기록에는 용인전투에서 조선군은 5만 명 중 3만2천명이 전사했고, 부상자, 도망병까지 포함하면 전멸이나 다름없다고 되어있다. 반면 왜군은 1천600명의 군사 중 전사자는 단 5명 뿐이었다. 신화와 같은 전승 기록이었다.

이런 참혹한 패배는 왜의 군대가 삼천리강토를 마음놓고 유린하는 단초가 되었다.

왜군은 더욱 위세를 떨치면서 무인지경을 달리듯 사방팔로(四方八路)를 활보했다. 왜의 두목들은 각 도에 분산 배치되고, 우키다 히데이에 왜장은 점령한 한양을 수비했는데, 그는 히데요시의 총애를 받은 핵심 막료였다.

왜군 제8군단 1만의 병력으로 침입하여 고니시(小西行長)와 가토(加藤淸正) 군의 뒤를 이어 고바야가와(小早川) 6군단과 함께 한양에 입경했는데 왜군이 북진한 후 그는 히데요시의 후광으로 한양을 접수한 것이다. 말하자면 조선 총독인 셈이었다. 그는 전국시대 기슈 정벌, 시코쿠 정벌, 규슈 정벌 등 히데요시가 벌인 대부분의 전투에 참여해 뒷수습을 한 경력이 있었으니 한양 관리도 적임자인 셈이었다. 히데이에는 점령한 조선을 원대하게 설계할 총독으로 변신할 생각이었다. 늙은 조선백성들까지 끌어모아 부산에서 평양에 이르기까지 각 사(舍)마다 보루를 쌓도록 지시하고, 해자를 만들고, 한양을 교또에 못지 않게 건설하는 꿈을 꾸었다. 이제 조선반도는 대간바쿠(大關白)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나라인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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