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계홍의 역사소설 깃발

충무공 정충신 장군<51>-제4장 이치전투

이때 쥐새끼처럼 재빨리 왜의 비서, 첩자, 집사, 서기로 변신한 조선인 숫자도 늘어났다. 어느 세상이나 눈치 빠른 자가 먹고 사는 데는 힘을 받았다. 친일과 아첨은 살아가는 힘이었다. 왜의 잔인하고 가혹한 무단통치와 백성을 유린하고 착취하는 것은 철두철미 남의 일이었다. 그래서 왜 병사에게 대드는 자나, 왜군 동태를 살피는 자를 밀고해 포상을 받는 일은 그들에게는 당연한 일상사였다. 그들은 어느새 왜의 군사에 알랑대며 머리를 수그리면서 세상의 주류로 나선 세력이 되었다.

왜의 치하에 들어간 동래포, 부산포, 초량엔 왜관이 들어서고, 왜 상가가 들어서고, 인근 여자를 처첩으로 삼아 왜의 종자들까지 널리 퍼뜨려지고 있었다. 조선에 상륙한 왜의 병력은 20여 만이었지만 투항한 조선 백성은 그들보다 두 배, 세 배가 많았다. 그 세력은 점차 뿌리를 내렸으니 그들은 언제나 강자의 품안에서 연년세세 호의호식하는 간사한 무리가 되었다.

충청도관찰사 윤선각은 추후 자신의 저서 ‘문수만록’에 용인전투를 이렇게 회상했다.

“우리들은 백면서생으로 병가(兵家)의 일을 잘 알지 못하여 규모와 계획이 용렬해서 연전연패를 거듭했으니 지금도 생각하면 원통하도다. 그러나 어찌하랴.”

그러나 어찌하랴? 이런 변명이 어디 있나? 그따위 말로 역사 앞에서 떳떳할 수 있나.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생각하면, 그는 종군이라도 해서 지도층의 사회적 책무를 다했다. 그래서 이런 자기변명도 일정 부분 용납될 수 있는 것이다.

백성들이 양곡을 빼앗기건, 눈알이 빠지고 팔이 부러지고 온 몸이 난자당하건, 어린 소녀가 왜의 병사들에게 끌려가 집단 강간을 당하건, 아랑곳없이 깊숙이 박혀서 자기 가족의 안위만 걱정하며 몸을 벌벌 떨고 사는 지도층에 비하면 그는 괜찮은 사람인 것이다.

류성룡은 이런 자들을 보고 ‘나쁜 새끼들’이라고 험하게 꾸짖는 대신 품격있는 정치인답게 ‘용인전투는 흡사 봄놀이 같았더라’라고 징비록에 기록했다. 하긴 그도 일말의 책임이 없는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한편 이광은 패전 책임을 지고 선조에게 끌려가 죽을 만큼 매를 맞고 장독에 시달린 가운데 유배를 떠났으나 얼마후 복권되었다.

용인전투는 고니시 유키나가가 이끈 1군단에 궤멸된 탄금대전투, 1637년 1월 2일 벌어진 청군과의 전투에서 병졸, 장수 모두 전멸해버린 경기도 광주의 쌍령전투에 이은 3대 대패의 기록이었다. 쌍령전투는 전사자 숫자는 많지 않았지만 병졸과 장수 전원이 전사했다는 치욕적인 기록을 갖고 있다.

권율은 귀로에 정충신의 진언이 생각났다.

“보아하니 우리는 평지전에 능한 왜군을 당해낼 방법이 없승개요, 다른 방도를 취해야 합니다이. 바위 하나, 나무 하나, 강물의 물줄기 하나가 모두 우리의 부족한 군력을 보태준다는 병법이 생각나누마요.”

그것은 약한 군세를 만회할 만고의 지략이라는 것이었다. 그것을 활용하지 못해 두 전투에서 당한 것이다, 하고 그는 독백했다. 정충신의 지략을 생각하면 꼭 곁에 두고 부리리라 마음 먹었다. 그러면서 다시 독백했다.

“뭘 모르고 날뛰면 한참 못난 것이고, 알고도 행하지 않으면 더 크게 못난 것이요, 장수를 잘못 만나 허둥대는 것이 그중 못난 것이다.”

권율은 인솔한 광주 부대를 수습하여 임지로 귀환한 뒤 보름만에 다시 이치령에 이르렀다. 왜의 6군단은 한양-용인-죽령-상주-금산 방향으로 내려와 금산성에 진을 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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