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상옥, 창포만에서 새 세상을 꿈꾸다

최혁 주필의 전라도역사이야기
36. 동학농민혁명의 영웅, 무안의 배상옥
배상옥, 창포만에서 새 세상을 꿈꾸다
전라도 서부지역 농민군 이끌고 나주전투 주도
고막교전투 패한 뒤 일군에 잡혀 즉결처형 당해
전봉준·김개남 등과 함께 동학농민군 주요지도자
일제 반일뿌리 말살조치로 역사무대에서 사라져
무안지역 동학농민투쟁사 큰 줄기로 재조명 돼야
백창석씨 노력으로 잊혀진 역사 상당부분 규명돼

■잊혀진 영웅 배상옥

동학농민혁명의 한 복판에는 전봉준(全琫準)장군이 있다. 사람들은 갑오년 그 뜨거웠던 항쟁을 이야기할 때면 으레 전봉준을 입에 담는다. 그리고 전봉준과 함께 동학농민군을 이끌었던 김개남(金開南, 箕範)에 대해서도 말한다. 그렇지만 그들 못지않은 동학의 영웅, 무안의 배상옥(裵相玉)을 말하는 이들은 드물다.

배상옥은 잊혀진 영웅이다. 아니, 기억에 없는 인물이다. 그 처절했던 갑오항쟁이 끝난 뒤 일제는 배상옥과 관련된 흔적을 철저히 지웠다. 친일파가 득세한 조선조정은 동학에 가담한 인물들을 배역자로 처단했다. 그 가족들 역시 무자비하게 죽였다. 동학에 가담했던 사람들은 성(姓)을 바꾸고 집을 떠났다. 그래야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다. 그러다 보니 동학의 괴수 ‘배상옥’이라는 이름은 입에 담으면 절대 안 되는 이름이 돼버렸다.

일제의 조선침략이 본격화되면서 동학과 관련된 기록은 그 무엇이든 불살라졌다. 동학신도들이 몸에 지니면서 외웠던 천주경 조각이라도 몸에 있으면 당장 목숨이 위태로웠다. 일제에 빌붙어 살던 이들은 갑오항쟁을 동학란(東學亂)이라 불렀다. 탐관오리들의 학정을 없애고 일제를 물리치자는 민족운동은 불온한 난으로 전락했다.

100년이 넘는 세월이 흘러갔지만 동학은 여전히 ‘난’(亂)으로 남아있다. 지난 80년대 이후 동학란은 갑오항쟁이라는 이름을 거쳐 ‘동학농민혁명’으로 명명되기 시작했지만 그렇게 말하면 아직도 ‘뜨악한 표정’을 짓는 이들이 많다.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갑오항쟁의 역사는 극히 일부에 불과하다. 등장인물 역시 소수에 그치고 있다.

우리가 해야 할 과제 중의 하나는 이 나라를 지키다 숨져간 선인들의 장한 뜻과 의로운 죽음을 잘 기억하는 것이다. 그렇지만 현실은 부끄럽다. 호국과 애국을 이야기하면 진부한 이야기라며 손사래를 치는 이들이 많다. 나라가 없는데 어찌 개인이 있을 수 있겠는가? 우리가 잊혀 진 영웅들을 다시 살려야 하는 이유다. 그 주인공 중의 한 명이 바로 배상옥이다.

■무안의 걸출했던 동학지도자 배상옥

난세는 영웅을 낳는다고 했다. 구한말 조정의 무능함과 부패는 나라를 망하게 만들었다. 조정대신들은 한줌도 되지 않는 권력을 지키기 위해 외세를 끌어들였다. 대신들은 동학농민군들을 없애달라고 청군을 불러들였다. 호시탐탐 조선침략을 노리고 있었던 일본은 이를 절호의 기회로 여기고 조선 땅에 군대를 상륙시켰다.

조선을 놓고 일본과 청나라가 싸웠다. 청일전쟁이다. 일본은 청과의 전쟁에서 이기고 조선강점에 방해가 되는 동학농민군들을 진압하기 시작했다. 농민군들은 다시 봉기했다. 전국 8도에서 농민군과 조선관군?일본군 간의 전투가 벌어졌다. 농민군은 우금치에서의 패배를 계기로 세가 꺾였다. 장흥 석대들에서 최후의 일전을 벌였으나 역부족이었다.

고부봉기 등 갑오항쟁의 시작부터 전남지역 농민군은 전봉준·김개남 장군의 주력세력이었다.

동학농민군은 1894년 음력 5월 7일 체결된 전주화약 이후 전주에 동학 대도소를, 우도와 좌도에 지역별 대도소를 설치했다. 원평(金溝 院坪)에는 전봉준장군이 총괄하는 호남우도 대도소가, 남원에는 김개남대접주가 총괄하는 호남좌도 대도소가 들어섰다. 좌도 대도소의 영역은 담양(譚陽), 곡성(谷城), 구례(求禮), 창평(昌平), 옥과(玉果), 순천(順天), 광양(光陽), 낙안(樂安), 보성(寶城), 흥양(興陽, 高興)과 지금의 전북지역인 금산(錦山), 진산(珍山), 용담(龍潭), 진안(鎭安), 무주(茂朱)를 포함하여 태인(泰仁), 장수(長水), 임실(任實), 순창(淳昌) 등 19개 지역이었다.전남 동부지역을 제외한 무안과 장흥·영광·해남·진도·완도·장성·무안·강진·나주지역은 전봉준 장군이 총괄해 관할했다. 지역별 지도자는 무안 배상옥(裵奎仁이라고도 했다)·배규찬, 장흥 이방언·이인환, 장성 김주환·기우선, 광주 손화중·김우현·박성동, 나주 오권선·전유창, 영암 신성, 강진 윤세현·김병태, 해남 김병태·김도일·김춘두 등이었다. 순천 박낙양도 전봉준의 지시를 따랐다.

특히 무안의 동학농민군은 전봉준 장군을 지지하는 핵심세력이었다. 무안지역의 동학농민군을 이끌었던 배상옥은 ‘호남하도거괴(湖南下道巨魁)’ 라 불릴 정도로 동학농민군의 주요지도자였다. 배상옥은 무안대접주였으나 영광과 함평, 무안, 장흥, 해남, 강진, 영암지역의 동학교도들에게 커다란 영향을 끼쳤고 전남지역의 전투를 주도적으로 이끌었다.

무안의 배상옥은 전봉준·김개남 장군과 함께 동학농민혁명의 중요한 인물이다. 백산봉기부터 참여했으며 갑오년 12월까지 호남농민군들을 지휘했던 지도자였다. 그렇지만 일반인들에게 배상옥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장흥의 이방언 대접주도 마찬가지다. 일제 강점기에 그들에 대한 기록이 철저히 파손됐으며 일제식민지 사관에 길들여진 학자들이 그들에 대한 평가 작업을 외면했기 때문이다.

■농민군을 조련했던 배상옥
 

청천사(淸川祀)
무안군 청계면에 있는 청천사. 율헌 배균, 증암 배회의 충절을 기리기 위해 후손들이 건립했다. 2007년 배상옥을 추배했다.
청전사유허비
답통문(答通文)
무안향교에서 배상옥 장군의 위패를 청천사에 모시는 것을 허락한다는 내용의 답통문. 지난 2007년에 작성됐다.

무안의 대접주 배상옥은 보명(譜名)이 규옥(奎玉)이고 공공문서에는 규인(奎仁)으로 기록돼 있다. 동학농민혁명 전후에는 상옥(相玉)으로 통칭됐다. 배상옥은 청계면 청천리 배씨들의 사당인 청천사에 집강소를 설치해 무안지역을 비롯한 전남서부지역 농민항쟁에 대한 기본 전략을 짰다.

배상옥은 삼향면 대월리 출신이다. 배상옥의 선대가 무안군 청계면 청천리에서 살다가 대월리로 이사했다. 당시 대월리에는 동학군을 훈련시키던 넓은 공터가 있었다고 한다. 배상옥은 대월리 뿐만 아니라 해제면 석용리에도 훈련장을 설치하고 농민군들을 훈련시켰다.
 

창포만 간척지.
배상옥 대접주가 청천리 집강소에서 무안해제를 배를 타고 오가던 곳. 바다가 매립돼 지금은 농경지로 변했다.
창포만을 가리키고 있는 백창석 전 무안문화원장.
백창석 전 원장은 무안향토사연구소를 운영하면서 뜻있는 지역인사들과 함께 무안지역 동학농민혁명사를 체계적으로 정리했다.

당시 대월리에서 실시된 훈련과 관련해 ‘마을을 중심으로 한 지적산 일대에 동학군 초병이 깔리고 대포를 설치하여 관군의 습격에 대비하면서 훈련했다’는 내용이 전해진다. 동학농민군은 1894년 4월 18일 무안에 들어와 고을을 점령했다. 주한일본공사관기록에는 전라감사가 보낸 무안에 입성할 당시의 동학농민군의 모습이 다음과 같이 적혀있다.

“본현(무안현)의 삼내면에 있는 동학도 7~80명은 절반은 말을 타고, 절반은 보행을 하면서 몸에는 갑옷을 입고 투구를 썼습니다. 그리고 제 각기 긴 창과 큰 칼을 가지고 다닙니다. 그들은 18일 하룻밤을 머무른 뒤에 나주로 갔습니다.”

무안문화원 백창석원장은 위의 표현과 관련 배상옥대접주가 대월리에서 훈련을 받던 농민군 7~80명을 데리고 무안으로 들어와 하루를 머물고 나주로 향한 것이 그렇게 표현됐을 것이라 추정하고 있다. 이 기록에 나오는 삼내면(三內面)은 ‘삼향면’(三鄕面)의 오기(誤記)로 보고 있다. 무안군에는 삼내면이라는 행정 구역명이 없다. 역사학자 이이화 선생 역시 삼내면은 삼향면이 잘못 써진 것으로 간주하고 있다.

무안동학농민군들은 제1차 기포 때부터 적극적으로 봉기에 참가한 것으로 보인다. 4월18일 함평에 주둔하던 농민군 주력부대가 무안으로 넘어와 하루를 머물렀을 때 주력부대에 가담해 장성 황룡강전투에도 참가했을 것으로 보인다.

■배상옥과 무안농민군의 활약상

무안지역 동학농민군의 수가 다른 지역에 비해 월등히 많았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유추해볼 수 있는 기록은 황현의 오하기문에 나와 있는 관군의 지원 및 배치상황이다. 오하기문에는 전라병사 이문영이 전라도 각 군현에 포군을 징발해 배치한 내용이 나온다.

전라병사는 구례에서 50명, 광양과 낙안, 곡성, 흥양(지금의 고흥)에서 각 100명씩, 순천에서 150명, 창평과 동복에서 각 50명씩 포군을 징발하는데 이중 200명을 무안으로 보낸다. 그만큼 무안동학군의 위세가 컸다는 증거다.

전주화약 이후 무안에 돌아온 배상옥은 집강소 설치에 앞서 목포 진을 공격해 상당량의 무기를 확보해 농민군들을 무장시켰다. 또 해제면 임치진에 무안 동학농민군의 지휘본부를 설치하는 한편 지도읍 등 인근 섬 지역에 동학도들을 보내 농민군에 합류할 것을 청했다.

전주화약 이후 일부 지역에서 관군들이 농민군들을 잡아 처형하는 일이 자주 벌어지고 일본의 침략이 노골화되자 농민군은 다시 일어섰다. 동학농민군은 9월에 삼례모임을 갖고 한양으로 진격할 것을 결의했다.

동학농민군 제2차 기포 당시 전남에서는 무안을 비롯하여 장성 장흥 영광 함평 등 12개 고을의 농민군이 참여했다. 무안 배상옥은 2천명을 거느리고 참여했다고 한다. 그러나 배상옥 휘하의 농민군은 전봉준과 함께 북상하지 않았다.

전봉준은 전남지역 농민군이 북상하는 것을 만류했다. 일본군이 서남해안에 상륙해 배후를 위협하는 것을 우려한 것이다. 이에 따라 무안 등 전남지역 동학농민군들은 장흥과 나주 일대 관군들을 견제하는 세력으로, 또 유사시 일본군이 바다를 통해 상륙해 서남해안 지역에 진입할 경우 이에 맞서는 세력이 되기 위해 현지에 잔류했다.

광주의 손화중도 전봉준의 주력부대에 합류하지 않았다. 무안의 배상옥과 광주의 손화중, 나주의 오권선이 이끄는 농민군은 합세해 나주성을 공격했다. 그러나 이들 농민군은 10월 15일께 나주 쪽으로 진군한 뒤 10월 21부터 침산과 선암 일대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패해 광주로 후퇴했다.

손화중과 최경선은 11월 초 나주를 공격했다. 이때 무안의 배상옥 농민군도 서남쪽에서 나주성을 공격하고자 했다. 그러나 나주목사 민종렬은 적극적인 공세로 나서 농민군을 물리쳤다.

민종렬이 보낸 나주 수성군은 11월 11일 용진산에 진을 치고 있던 농민군을 공격해 큰 피해를 입혔다. 결국 다음날 농민군은 후퇴하고 말았다. 11월 17일 무안 대접주 배상옥이 이끄는 동학농민군은 나주성 공략을 위해 나주 남서쪽으로 30여리 정도 떨어져 있는 고막포와 고막원 주변으로 모여 들었다.

이 때 모인 농민군의 수에 대해 <금성정의록>은 5~6만 명으로 적고 있다. 이 숫자는 관군들의 전과를 부풀리기 위해 다소 과장됐을 수도 있다. 그러나 고막원에 모인 농민군은 무안과 함평은 물론이고 진도등지에서 온 농민군들도 많아 상당한 수에 달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수만 명의 농민군들이 고막원 일대에 집결해 나주를 공격해올 기세라는 소식에 민종렬은 나주성 북쪽의 수성군을 급히 불러들이는 한편 일본군과 좌선봉장 이규태에게 지원을 요청했다. 동시에 나주수성군을 출동시켜 18일 아침 고막원 동쪽 청림산과 호장산, 진등참 일대에 모여 있던 농민군을 공격했다.
 

함평 고막교(당시 무안현 금동면 현재 함평군 학교면 고막리)
나주 수성군의 대포에 밀려 전투에 패배해 도망치던 농민군들이 고막교로 한꺼번에 몰리면서 많은 농민들이 이곳에 빠져 목숨을 잃었다. 영산강 하구언 공사이후 물길이 막히면서 지금은 수심이 얕지만 동학농민혁명 당시만 하더라도 이곳은 큰 배가 들어올 정도로 물이 깊었다.

농민군들은 용감하게 싸웠으나 수성군이 쏘아대는 대포의 위력을 견딜 수 없었다. 어쩔 수 없이 후퇴하던 농민군들은 좁은 고막교를 한꺼번에 건너다가 많은 이들이 물에 빠졌다. 때마침 밀물 때여서 많은 농민군들이 빠져나오지 못하고 죽었다고 전해진다.

농민군을 크게 무찌른 나주 수성군은 배후의 공격을 염려해 일단 나주로 돌아갔다. 그 뒤 11월21일 다시 포군 300명을 앞세우고 고막리 일대의 농민군을 다시 공격해왔다. 농민군들은 대포와 신식무기에 밀려 다시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붉은고개 농민군 처형지
고막원 전투에서 패한 농민군들이 목포방향으로 도망가다가 매복중이던 관군들의 공격을 받아 몰살당한 곳이다. 구 국도 1호선에 위치해 있다.

패를 당한 농민군은 11월 27일 광주로 물러갔다. 그러나 전봉준이 11월 27일 태인 싸움을 끝으로 장성 노령에서 농민군을 해산하고 은신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이에 광주에 모인 동학지도자들은 12월 1일 농민군을 해산하고 모두 흩어졌다.

배상옥은 농민군과 함께 광주에서 무안으로 돌아오다 수성군과 충돌해 또 피해를 입었다. 그는 수천 명의 무안농민군을 12월 8일 삼향면 대월리에 집결시켰다. 동학군들이 장흥으로 모여 관군 및 일본 연합군과의 전투를 준비하고 있다는 소식이 들려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대규모 일본군과 경군(京軍)이 전남 서부 쪽으로 내려오고 있다는 정보에 배상옥 등 동학지도부는 동학군을 해산시키기로 결정하고 은신에 들어갔다. 배상옥 등 지도부는 해남과 진도, 신안등지의 섬으로 몸을 피했다.

■배상옥의 최후

고막교 전투 패배 후 무안지역 동학 접주 및 농민군 지도자급 70여명이 체포돼 이중 30명은 처형당했다. 관군 측의 기록에 따르면 12월 8일 배정규(裵正圭)·박순서(朴順西) 등이 체포당해 즉시 총살당했다.

또한 서여칠(徐汝七) 등 6명은 경중에 따라 처리됐다. 12월 9일에는 김응문(金應文)과 정여삼(鄭汝三), 김여정(金汝正), 장용진(張用辰), 조덕근(趙德根) 등이 고문을 받고 죽었다. 그 외 12명이 경중에 따라 처리된 것으로 나온다.

또 무안 망운 목장의 동학 우두머리인 이익선(李益先) 등 4명을 체포돼 우진영으로 압송한 후 정보를 얻기 위해 심문했다는 기록도 있다. 12월 12일에는 토포사 이규태가 무안현에 보내는 감결을 보면 배규찬(裵奎瓚)을 비롯해 오덕민(吳德敏), 조광오(趙光五), 김문일(金文日), 박경지(朴京之), 박기운(朴沂雲), 김효문(金孝文), 양대숙(梁大叔), 서여칠(徐汝七), 박기년(朴淇年)등 10명을 잡았다는 내용도 있다.

관군은 무안의 백성들을 모아놓고 배상옥의 동생인 배규찬을 효수했다. 나머지 9명은 총살했다. 하였다. 무안 해제의 최장현, 선현, 기현 등 3형제도 숨어 있다가 밀고를 당해 12월 25일 체포돼 나주로 끌려가 이틀 뒤인 12월 27일 사형 당했다.

배상옥은 해남의 바닷가인 은소면(현재 송지면)의 한 마을에 몸을 숨기고 있다가 12월 24일 윤규룡 등에게 붙잡혀 관군에게 넘겨졌다. 이 때 해남에는 일본 보병대위(松本正保)가 도착했다. 일본군은 내부적으로 일본에 반대하는 동학농민군을 뿌리 뽑는다는 방침을 정한 상태였다. 이에 따라 일본군은 그 자리에서 배상옥을 처형했다.

후손들은 이후 배상옥의 시신을 찾기 위해 수소문했으나 찾을 길이 없었다고 한다. 배상옥이 처형됐다는 소식을 들은 무안 주민들은 “상옥아 상옥아 배상옥아 백만 군대 어디 두고 쑥국대 밑에서 잠드느뇨”라는 노래를 부르면서 그의 죽음을 애통해 했다고 전해진다.

■배상옥 외증손 이영귀씨

배상옥 장군은 해남에서 체포된 뒤 처형 당하고

아내는 마을에서 학대 받다가 인근 마을로 개가

10살쯤 아버지 잃은 외동딸 위금 쪽 후손만 남아
 

배상옥 장군의 외증손 이영귀씨와 최혁 주필.
배상옥은 딸 위금씨만을 두었기에 후손은 외가쪽으로만 있다. 영귀씨는 위금씨의 손자이다. 일본에서 태어나 광복직후 귀국해 무안에서 지냈으나 지난해 지병으로 사망했다.

배상옥은 딸 하나만을 두었기에 후손은 외가 쪽으로만 있다. 배상옥의 딸은 위금(爲今)으로 이현석씨와 결혼해 5남1녀를 두었다. 셋째가 이동연(李東淵)씨인데 아들이 영귀씨(1939년생)다. 따라서 영귀씨는 배상옥의 외증손이다. 영귀씨는 지난해 지병으로 숨졌다.

영귀씨는 일본에서 태어나 해방직후 귀국했다. 배상옥의 직계손이 없기에 동학농민혁명 유족회에 가입해 동학농민혁명의 뜻을 알리고 역사적 사실을 밝히는데 힘을 보탰다. 영귀씨는 살아생전 필자와의 인터뷰를 통해 일본에서 귀국직후 할머니 위금씨를 보았다고 말했다.

영귀씨는 동학전쟁에서 농민군들이 패한 뒤 일본군들이 대월리 배상옥의 생가를 찾아와 불질러버렸다고 말했다. 배상옥의 생가는 기와집이었으며 처마 4귀에 평경이 달려 있었다고 한다. 살림살이에 그만큼 여유가 있었다는 의미다.

배상옥의 부인은 김씨였는데 동학농민전쟁이 끝난 뒤 동학교도가 아닌 마을사람들로부터 심한 멸시와 학대를 받았다고 한다. 영귀씨는 마을 사람들이 배상옥의 아내 김씨를 마을 머슴들이 모여 잠을 자는 봉노 방에 강제로 넣기도 했다는 말을 들었다고 전했다.

마을사람들의 천시와 학대가 계속되자 김씨는 인근 마을의 서씨 집안으로 개가를 했으며 딸 위금씨는 무안 삼향면 대박산 근처에 사는 배응태(裵應台)씨 집으로 가 컸다고 한다. 영귀씨의 할머니인 위금씨가 아버지 배상옥을 잃은 나이는 9살 혹은 10살 때였다. 배응태는 배상옥의 아버지 배응채(裵應彩)와 같은 항렬인 가까운 친척이다.

배상옥의 아내 김씨는 개가를 한 후 서씨와의 사이에 딸을 또 낳았는데 이 딸은 무안 태봉리에 사는 배남수씨한테 시집을 갔다고 한다. 영귀씨는 배남수씨의 후손들을 찾으면 배상옥의 아내였던 김씨의 묘를 찾을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에 수소문했으나 연락이 닿지 않았다고 말했다.

■무안의 배상옥 관련 동학농민혁명 유적지

○ 배상옥 생가
 

무안동학농민군 지도자 배상옥의 생가 터.
사진 정면의 텃밭이 배상옥의 생기터이다. 배상옥은 전남 서부지역 동학농민군을 지휘했다. 전주화약 이후 청천재에 집강소를 설치하고 백성들을 보살폈다. 고막교 전투에서 패배한 뒤 1894년 음력 12월 해남에서 체포돼 처형당했다.

배상옥의 생가는 현재의 행정구역상 목포시 대양동 지적로 56 맞은편 텃밭이다. 배상옥 생가는 일본군이 불을 질러 태워버려서 지금은 흔적조차 찾을 길 없다. 동네 주민들은 예전에 배상옥 생가 터라고 알려진 땅에서 기왓장 등이 나왔다고 말한다. 생가주변 대나무 밭이 있던 곳은 주택이 들어서 있고 농민군들이 훈련을 받았다고 전해지는 연병장 터 일부에는 마을회관이 들어서있다.

생가 터 뒤쪽으로는 목포중앙고등학교가 위치해 있다. 인근 지족산에는 그의 부친 묘소가 있다. 동학농민혁명사에서 중요한 인물인 배상옥에 대한 기념 및 추모 사업은 무안군 동학농민혁명 유족회를 중심으로 추진되고 있다.

그러나 사료와 사업비 부족 등으로 인해 무안이 배출한 동학지도자에 대한 조명과 평가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배상옥 지도자와 무안군 동학농민군의 기개와 정신을 널리 알리는 기념사업과 유적지 정비가 요청되고 있다.

○ 동학골 농민군 훈련지

동학골 자리의 초당대학교
현재 초당대학교가 들어서 있는 곳은 동학농민혁명 당시 농민군들이 훈련을 받던 자리였다. 그래서 이후 동학골로 불리웠다고 한다.

동학농민혁명 당시 무안지역 농민군이 군사훈련을 받던 곳이다. 동학 골은 동학농민군이 제1차 기포한 1894년 4월과 그리고 집강소 시기에 무안지역 농민군이 군사훈련을 하던 장소로 추정된다.

배상옥은 공수산(현 남산)계곡인 동학골에서 수 천명에 달하는 농민들에게 기본적인 전투요령을 가르쳤다. 이 자리에는 과거 백제여상이 들어서 있었고 지금은 초당대학교가 위치해 있다.

따라서 동학골이라는 지명을 놓고 이견이 있다. 하나는 아이들이 공부를 하는 곳이라는 의미의 ‘동학(童學)골’이다. 이 경우 학교가 들어설 것을 예견한 차원에서 동학골이라는 이름을 이해할 수 있다. 다른 주장은 동학농민군들이 훈련을 받던 ‘동학(東學)골’이라는 것이다. 초당대학교 관계자들은 동학(童學)골이라는 해석에 더 중점을 두고 있다고 한다. 그러나 童學이든 東學이든 선인들의 나라정신과 개혁정신을 이어받아 이 나라를 이끌어갈 인재를 키워간다는 의미로 ‘동학골’을 받아들이면 될 듯싶다.

○ 불무제 다리 터(농민군 처형지)
 

무안 불무제 다리 터. 무안읍 성남리 75번지 일대는 과거 물이 많은 스랑골이었다. 도주하던 많은 농민군들이 물에 빠져 목숨을 잃었다. 관군과 일본군은 죽은 농민군 시체를 떡시루처럼 쌓아놓고 이곳에서 불태웠다고 한다.

무안지역에서 체포된 농민군이 처형된 곳이다. 무안군 무안읍 성남리 75번지 일대 사거리다. 과거에는 물이 많은 곳이었다. 스랑골로 불렸다. 지금은 복개돼 예전에 물가였다는 흔적은 찾아볼 길이 없다.

관군들에게 쫓겨 현경에서 무안읍으로 들어오던 농민군들이 이 스랑에 빠져 쉬 달아나지 못한 것으로 알려졌다. 일본군과 관군은 이곳에서 동학농민군들을 죽인 뒤 떡시루처럼 포개놓고 불태웠다고 한다. 3일 동안 그 불이 계속됐으며 시체 타는 냄새가 너무 지독해 그 후로도 지나다니기가 힘들었다는 증언들이 전해지고 있다.

/최혁 기자 kjhyuckchoi@hanmail.net

/정유진 기자 jin1@namdo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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