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계홍의 역사소설 깃발

충무공 정충신 장군<52>-제4장 이치전투

왜군은 애초 한양 함락을 목표로 했기 때문에 전라도는 왜군의 공격 대상에서 일단 제외되었다. 다대포, 부산포에 상륙한 왜 병력은 1,2,3진으로 나누어 서로 경쟁하듯 경부 축선을 타고 북진했는데 고바야카와 다카카게 6군단도 그중 하나였다. 그런데 전주성 공략 명령을 받고 남하한 것이다.

“와, 싸움 한번 못해보고 한양까지 올라갔으니 내 칼이 울었다. 이래 봬도 바윗돌도 두 쪽내는 보도(寶刀)인데 제대로 써먹지를 못했으니 명도(名刀)에 미안하다는 거야.”

제6군단 고바야카와 다카카게 휘하의 막료장 다카하시 나오지가 허튼 소리를 했다. 그는 부하들을 산그늘에 앉혀놓고 노닥거리고 있었다.

그는 800명의 부하를 거느리고 한양을 진격했는데 도성이 허망하게 무너진 것이 아쉬웠다. 전공 세울 기회조차 주지 않은 것이 떨떠름했다. 대신 왕을 생포하려고 했는데 그는 벌써 도성을 빠져나가 기약없이 북쪽으로 도망을 가버렸다.

왜군은 1~16군단으로 편성됐는데 실질적으로 조선반도에 투입된 병력은 1~8군단이었다. 9군단은 대마도에 예비 병력으로 대기중이었고, 10군단은 이키섬에 추가 병력으로 남아있었다.

실질적으로 전쟁에 나선 병력은 1~8군단 군인 13만7천900명(이 수치는 정유재란 때 투입된 일본군 병력이 포함되지 않은 숫자이며, 정유재란 시 파견된 군인까지 포함하면 약 23만명으로 추산)이었다. 조선 군사력이 초라해 굳이 따지자면 4만~5만 가지고도 능히 조선땅을 점령할 수 있었다. 많은 병력이 상륙하니 오히려 이들을 먹여살릴 군량이 부족해 더 힘들게 되었다.

나오지 막료장은 무너진 조선반도를 보며 이렇게 쉽게 점령할 수 있는 것을, 파리 잡기 위해 대포를 쏜 격으로 병력을 대폭 강화한 것이 오판이라고 생각했다. 내전으로 전쟁경험이 많은데다 조총까지 가지고 있으니 국궁, 삼지창, 농기구가 주무기인 조선군은 정말 초라했다. 대신 병력 숫자가 많으니 그의 부대가 먹을 것이 부족한 것이다. 그것이 아쉬웠다.

“조국의 방어를 책임진 장수란 자들은 하나같이 겁쟁이고, 내빼는 기술은 일품이더구먼, 하하하. 그놈들 뭣 빠지게 도망가는 것 볼 때 웃음밖에 나오지 않더라니까.”

나오지 막료장은 군졸들을 나무 그늘에 모아놓고 계속 뻐기는 자세로 말하며 껄껄껄 웃었다.

“관리들은 우리를 보면 사시나무 떨듯하면서 마누라, 자식들 데리고 산으로 도망을 가는데 그 인생들이 쪼잔하고 불쌍해서 못봐주겠더구만. 살겠다고 미친 듯이 달아나는 모습 보면 불쌍해보이고 또 한심해 보이고… 우린 항복하면 그 자리에서 할복하잖아. 헌데 그 새끼들은 그런 용기도 없어. 하여간에 양아치도 그런 양아치들이 없다니까, 하하하.”

곁의 군졸들이 와크르 그릇 깨지는 소리로 웃었다. 남을 모욕하는 것으로 즐거움을 찾는 것은 언제나 유쾌한 일이다. 사실 그랬다. 모욕을 당할 일을 했고, 그런 비겁한 행동들을 보면 한껏 비웃음을 날려주고 싶은 것이다.

왜병이 침략하자 경상좌도 병마절도사 이각, 경상좌수사 박홍, 밀양부사 박진, 김해부사 서예원, 경상관찰사 김수(그는 용인전투에 나타났지만 또 도망갔다)는 적이 들이닥친다는 소문을 듣고는 어디론가 숨어버렸다. 그중 일부는 애첩을 데리고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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