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도 농업 선구자 -31. 광양 홍쌍리씨>

31.‘청매실농원’ 광양 홍쌍리 대표

대한민국 대표 농원 일군 ‘매화 엄니’

백운산 자락 5천여 그루 나무 심어 기틀 마련

매년 3월 ‘매화축제’지역 문화아이콘 자리매김
 

전남 광양시 청매실농원 홍쌍리 대표는 매실을 유기농법으로 생산, 항아리를 이용한 전통숙성방식으로 30여종의 매실 식품을 개발해 ‘홍쌍리’라는 이름으로 브랜드화하는 데 성공했다. /전남도 제공

이른 봄날, 남도(南道)는 앞다퉈 피며 자태를 뽐내는 꽃들의 경연장이 된다.

그중에서도 선두가 매화다. 매화는 이른 봄의 추위를 무릅쓰고 제일 먼저 꽃을 피워 봄이 곧 도래함을 알린다.

매년 이맘때 전남 광양시에 가면 백운산 자락 약 33만㎡ 규모 군락지에서 수천, 수만 송이 매화꽃이 섬진강 물길을 따라 연출한 뭉게구름을 감상할 수 있다. 지난 1997년 시작해 매년 3월 중순이면 100만 명 이상의 발길을 끄는 ‘광양 매화축제’ 현장이다. 올해는 20회째로 지난 17일부터 25일까지 다압면 매화마을 일원에서 열렸다.

그 마을에서 봄을 여는 매화 이야기는 늘 ‘매화 엄니’ 홍쌍리(75) 명인으로부터 시작된다.
 

청매실농원은 광양 백운산 자락이 섬진강을 만나 허물어지는 능선에 자리잡고 있다. 사진은 청매실농원 전경. /전남도 제공

■명실상부한 ‘매화 엄니’

매화마을 대표 관광지는 청매실농원이다. 청매실농원은 백운산 자락이 섬진강을 만나 허물어지는 능선에 자리잡고 있다. 수십년 묵은 매화나무와 청보리 밭이 섬진강을 넘어 하동마을과 그림처럼 마주하고 있다. 16만5천㎡(5만평)에 5천여 그루의 매화나무가 2천여개의 장독과 80년 역사의 대나무 숲과 어우러진다. 장관이다.

청매실농원 대표이자 매실 장인인 홍쌍리 명인은 “5천여 그루가 넘는 매화가 하나같이 내 눈물을 받아먹고 자랐다”고 말했다.

그래서 그는 매화나무에 핀 꽃은 딸, 열매는 아들이라고 부른다. 그는 “난 세상에서 아들 딸이 가장 많은 사람이다”며 환한 미소를 지었다. ‘매화 엄니’의 말이 결코 무색하지 않았다.

홍 명인은 지난 1943년 경남 밀양에서 태어났다. 집안은 비교적 여유가 있었다. 그러나 아버지는 당차고 영특한 딸을 중학교에 보내지 않았다. 나이 열여섯부터 부산 국제시장에서 장사로 잔뼈가 굵었다. 훗날 시아버지가 될 김오천을 만난 곳이 국제시장이다. 홍 명인은 지난 1966년 낯설고 물 선 전남 광양으로 시집왔다. 당시 그의 나이는 24살이었다. 험난한 시집살이와 고단한 육체노동으로 가출 보따리를 수없이 쌌다가 풀었다고 한다. 매화꽃 향기를 맡으면서 눈물을 흘리기 이쑤였던 어느 날 그의 눈에 매화꽃이 들어왔다. “엄마, 울지 말고 나랑 살자”는 꽃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했다고 그는 전했다. 그렇게 그의 매화 사랑은 시작됐다.
 

청매실농원 장독대

■시아버지 도움으로 큰 힘 얻어

홍 명인은 “시아버지가 나를 믿고 지지해 줬으니까 지금의 청매실농원이 있다”고 말했다.

홍 명인의 청매실농원이 지역을 넘어,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매화명소로 자리 잡기까지는 시아버지 김오천 선생이 이곳에 밤나무와 매화나무를 심어 온 오랜 노력의 시간이 받쳐주고 있다. 일본에 징용으로 끌려가 13년간 광부로 일해 모은 돈을 투자한 것이다. 김 선생은 그 넓은 야산에 밭작물을 심지 않고 나무를 심어 주위 사람들로부터 ‘오천’이 아니라 ‘벌천’이라는 비난을 받으면서도 거름을 주고, 나무를 가꿔 오늘의 기틀을 마련했다. 지난 1995년 청매실농원에서 시작한 3월의 매화축제는 이제 ‘광양 매화축제’라는 지역 문화 아이콘으로 거듭났다. 이 축제의 시작 행사가 ‘김오천 추모제’인 이유가 여기 있다.

홍 명인은 “시아버지과의 유일한 갈등은 ‘밤나무를 베어내고 매실을 심자’는 내 욕심 때문에 생긴 실랑이였다”며 “결국 11년 만에 내 뜻을 받아줬다”고 회상했다. 돈 되는 밤나무를 베고 매실을 심으려다 마을 사람들로부터 실성했다는 손가락질을 받기도 했다. 청매실농원의 성공에는 홍 명인에 대한 시아버지의 믿음이 바탕에 있었던 것이다.
 

매화

■“흙이 살아야 사람이 살 수 있다”

홍 명인은 독학으로 얻은 지식을 바탕으로 매화나무를 늘리고 종자를 개량했다. 남편이 한때 경기도 남양의 광산에 투자했다가 망해버려 꽁보리밥으로 하루 한 끼를 때운 적도 있었으나 매실에 대한 집념은 포기하기 않았다. 20대에 두 번이나 암 수술을 받고, 30대에는 류머티즘으로 2년 7개월이나 목발에 의지해야 했으며, 교통사고로 7년 동안 등이 굽은 채 생활하는 시련도 이겨냈다. 시집와서 22년 만에 치마를 입었을 만큼 매실농장에 정성을 다했다. 사람들은 자연스레 그를 ‘매화박사’로 부르기 시작했다.

“옛 사람들의 식단으로 돌아가야 약상(藥床)이 된다”는 생각으로 홍 명인은 처음부터 농약을 뿌리지 않는 유기농법을 고집했다. 자연의학에 관심이 많아 생산되는 모든 제품을 자연 그래도 처리하고 있다. 그런 연구 중의 하나가 매화나무 밑에 보리를 심는 것이었다. 보리의 잎은 매화나 무의 해충을 제거하고, 뿌리는 공기를 원활하게 공급하는 역할을 해 매화나무를 보호한다.

“흑이 살아야 사람이 살 수 있다”는 그의 생명사랑은 오늘날 한국을 대표하는 매화마을이자 ‘깨끗한 먹을거리’를 상징하는 청매실농원의 바탕이 됐다.

매실전문가가 된 그는 지난 1994년 식품제조업 허가를 받아 매실 제품을 본격적으로 생산했다. 외국 여러 나라를 돌며 기후에 알맞은 유기농법을 연구해 30가지가 넘는 먹을거리를 개발했고, ‘홍쌍리’라는 이름 석 자를 브랜화 하는데 성공했다. 그의 노력은 지난 1997년 한국 전통식품 명인 제14호 지정으로 응답을 받았다. 이듬해에는 석탑산업훈장과 대통령상을, 2001년에는 농업계에서 최고 권위를 인정받는 ‘대산농촌문화상’을 수상했다.

지금도 홍 명인은 새벽 5시면 어김없이 일어나 매화 밭으로 나선다고 한다.

그는 “인생을 바쳐도 좋을 자기 분야를 만들고, 거기에 미쳐야 한다”며 “나는 아흔 살까지는 지상 천국을 만드는데 미치고, 아흔 한 살 되는 해 하루라도 아니 한 시간이라도 ‘여자’로 살거다”라며 웃으며 말했다. 그 때 이 ‘매화 엄니’는 어떤 향기를 터뜨릴까 벌써 궁금하다.

/안세훈 기자 ash@namdo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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