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계홍의 역사소설 깃발

충무공 정충신 장군<55>-제4장 이치전투

북상 중 만난 백성들은 대부분 풀뿌리를 캐먹고 연명하고 있었다. 산이 깊으니 평야다운 평야가 없고, 천수답이나 화전을 갈아서 간신히 연명하는 형편인지라 그들이 먼저 굶어죽는 형편이었다. 전쟁으로 농사를 짓지 못할 뿐더러 흉년까지 들어 백성들은 만성적 식량부족에 시달리고 있는데 관아의 세수 할당량은 에누리가 없었다. 관아의 양곡창고는 왜군이 털어갔으니 책임을 면하기 위해 백성들을 쥐어짜는데, 할당량을 채워넣지 못하면 지아비는 곤장을 맞고 아이들은 노비로 끌려갔다.

왜 병사들에게 빼앗기고, 지방 관리에게 빼앗기니 민심은 사나워졌고, 왜놈이든 되놈이든 무슨 상관이냐며 될대로 되라는 식으로 인생 포기하며 사는 자가 많았다.

왜군은 그들대로 식량 징발을 거부하는 자를 잡아 목을 치는데, 목을 쳐도 나오는 것은 없고, 반응도 없으니 쳐봐야 재미도 없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출병을 앞둔 군사들에게 호언장담했다.

“모든 군사들이 조선반도에 들어가면 흰 쌀밥에 고깃국을 먹으며 대명(大明)의 대로로 진입하게 될 것이다. 대명에는 비단옷과 기와집들이 즐비해 있을 것이다. 그것들을 병사들에게 나눠줄 것이다. 그러니 조선 정벌은 군사들의 꿈이자 이상이다”

연병장에 모인 병졸들이 각기 든 무기를 하늘 높이 쳐들어 요란하게 함성을 질렀다. 지독한 내전의 시선을 돌리고자 조선 정벌에 나선 히데요시지만, 군사들이 잘 먹는다는 현실적 명분이 주어지자 저렇게 좋아라 날뛰는 것이다. 그러나 한달음에 한양에 진입했으나 백성들은 굶주리고 죽은 시체를 거둬다 삶아먹는 광경도 목격했다.

이런 소식을 접한 히데요시는 땅을 쳤다.

“내가 잠시 오판했다. 나이 탓인가. 곡창 호남을 쳐야 하는데, 순서가 잘못되었다. 그것이 실책 중에 상실책이다. 지금이라도 전라도를 확보하지 못하면 지는 전쟁이다. 병사들 먹일 곡창지대가 절대로 필요하니, 지금이라도 늦지 않으니 출병하라!”

그래서 6군단 사령관 고바야카와 다카카게가 나섰다.

“6군단이 전주성을 공략해 김만(김제 만경)평야를 접수한 뒤 남하하여 황룡강의 광산 들판, 더들강의 남평 들판, 영산강의 나주, 함평 들을 확보하면 군량 걱정은 없게 될 것이다. 내륙의 산골 마을에서 거둬들인 쪽박 정도의 군량 확보가 아닌 수만, 또는 수십만 석의 군량을 확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다시 명령을 내렸다.

“진주에서 북상중인 별군 안코쿠지 엔케이 부대와 일정 지역에서 합류해 곧바로 전주성을 함락하라.”

히데요시는 지도에 선을 그으며 진격선을 눈으로 헤아렸다. 신뢰하는 친구이자 막료인 고바야카와가 호남 공략에 나서면 확실한 승전의 전과를 올릴 것이다. 고바야카와는 고다이묘(전국시대 5대 다이묘 중 하나)에, 다이료(大老) 칭호를 받고 있는 명장이었다. 히데요시가 그에게 특명을 내린 것은 그 나름의 깊은 뜻이 있었다. 육십 나이인지라 노쇠해서 전방에 투입되기보다 후방을 지키며 병참선을 확보하는 것이 유용한 임무로 보였다. 센고쿠 시대부터 활동한 뼈대있는 가문의 무장이자, 문장의 수준도 높은 장수여서 문예를 즐긴다는 전라도 출병은 그의 취향에도 맞을 것이었다.

고바야카와는 전라도 점령은 정종 한 도꾸리 먹는 시간이면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전라도 감사 이광이 동원한 대규모 근왕병이 용인전투에서 패배해 군사력과 사기가 땅에 떨어진데다 병사(兵使) 최원이 청년들을 끌어모아 북상하니 호남에는 싸울만한 병력이 남아있지 않았다. 병력이 태부족해 스쳐 지나가도 전라도는 넘어질 것으로 판단했다.

그런데 권율이란 자가 있었다. 그가 대단한 것이 아니라 호남 백성들과 의병들이 그를 절대적으로 신임하고 따른다고 하는 것이 문제였다.

6군단 정탐병의 문건 보고에 따르면, 권율의 조부는 강화부사(정3품) 권적(權勣)이고, 아버지는 영의정 권철(權轍), 어머니는 적순부위(迪順副尉) 조승현(曺承晛)의 딸이다. 한마디로 명문 가정의 출신이었다. 그의 사위가 영의정인 백사(白沙) 이항복(李恒福)이라는 점도 신경을 거슬리게 했다. ‘오성과 한음’으로 널리 알려졌듯이 이항복은 인문학적 소양이 풍부한 조선의 대표적인 명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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