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무공 정충신 장군<56>-제4장 이치전투
권율은 이런 명문가정 출신에 초연했고, 평범을 좌우명으로 살아온 사람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출세에도 연연하지 않았다. 그는 왜란이 발발하기 10년 전, 45세의 늦은 나이로 문과에 급제했다. 성적은 중하위권인 병과(丙科)였다. 당시 평균 수명과 30세 전후 문과에 급제했다는 통계에 비추어보면 늦은 출세였다. 그러나 그는 그런 것에 연연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급제한 나이로 보나 관력으로 보나 출세에 조급해할 수 있는데 사대부 집안의 여유자적이 몸에 배있었다. 그리고 백성과 함께 하는 삶을 즐겼다.
그런 것이 백성들의 존경을 받았다. 직업의 귀천과 빈부의 나뉨이 없고, 사는 방식이 백성들과 다르지 않다는 인간적 품성이 친근감을 안겨주었다. 그런 그가 국가의 운명을 건 이치전에 투입되었으니 전라도 백성들이 한결같이 나서지 않은 자가 없었다. 백성들이 더 용기를 가지고 일어선 것이다(이상 ‘인물한국사’ 등 일부 인용).
인물이 인물을 알아보는지라 고바야카와 다카카게는 그런 권율이 존경스러우면서도 두려웠다. 그러나 그가 살아온 경험칙상 그런 두려움의 대상은 빨리 제거하는 것이 옳았다. 미적거리면 상대방의 기에 빨려들어가버린다. 그는 내친김에 남하해 금산성을 쳤는데, 선제공격이 적을 무력화시키는 첩경이었다고 보는 것이다. 한양-용인-죽령-상주-금산 방향으로 내려와 금산성을 치니 임진년 6월 23일이었다. 6월 29일에는 용담과 진안을 손에 넣었다.
금산성을 거점으로 하여 용담-진안-장수를 거쳐 전주성을 공격하면 호남 곡창지대는 곧 손아귀에 들어온다. 벌써 그의 시야에 금만(김제·만경)평야와 영산강의 나주 들판이 시리게 잡혀왔다. 조선반도를 휩쓰는 십수 만의 아군 병사 먹일 일은 이제 걱정이 없게 됐다.
고바야카와는 부자가 된 기분으로 금산성 산마루에 올랐다. 진지를 구축하는 부대원들을 보고 흡족한 나머지 오늘은 모처럼 술 한잔 해야겠다고 마음 먹었다. 근동의 장터에서 끌고온 주막의 어여쁜 주모와 기녀들이 있다고 하니 기분을 내고 싶었다. 그런 뒤 웅치와 이치를 넘으리라 마음 먹었다.
그는 진지 구축에 땀을 빼고 있는 병졸들을 격려차 순시했다. 모두들 사기가 충천해 있었다. 그중 일부 병졸들은 나무 그늘에 앉아 키득거리며 농담들을 주고받고 있었다. 쌍검을 찬 한 이시가루가 다른 조총병에게 물었다.
“조선 여자들이 맛있다고?”
“그래, 조선 여자들은 문어 빨판처럼 빨아들이는 힘이 좋아. 힘없이 늘어진 일본 여자들과는 비교가 안돼. 한번 물면 뺄 수 없는 긴짜코들이야, 하하하.”
“그래서 나까무라 이 새끼는 탈영해버렸군. 다른 부대에서도 탈영자가 속출해서 막영지마다 조사에 나섰다고 하는데, 벌써 도망간 자가 천 명을 넘는다는 거야. 사랑이 나라보다 우선한가?”
“그렇다면 유일의 조선 애국자는 조선 여자들이네? 막강 일본군을 투항시키니 말이야.”
그러나 전쟁에 염증을 느끼는 자도 있었다. 철들 때부터 칼을 들고 전선으로만 돌았으니 그들은 지친 나머지 또다른 세계에 도달하고 싶은 꿈을 꾸고 있었다.
“귀국해봐야 또 싸우러 나갈 테니 조선 여자 만나서 어디 깊숙이 박혀서 편안하게 살고 싶다는 거지. 나도 그런 사랑에 빠지고 싶다.”
“이 새끼, 사무라이 정신을 뭘로 보는 거야? 사무라이의 기상을 그따위 시시한 욕정 하나로 엿바꿔 먹겠다니, 정신이 썩었군. 우리의 신앙은 오로지 이 장검, 장검일 뿐이야.”
장창병대의 장창병이 창을 하늘높이 쳐들며 소리쳤다. 왜병은 조총병, 궁기병, 장창병, 마상병, 도검병, 방패병 등 갖출 것은 다 갖추고 있었다.
고바야카와는 팔팔한 청춘의 혈기를 느끼며 이들에게 조선 여자도 위안이 될 거라고 여기며 다른 막영지로 이동했다.
김경태 기자
kkt@namdonews.com
"광주전남 지역민의 소중한 제보를 기다립니다" 기사제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