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이 아프고 슬픈 이유

4월이 아프고 슬픈 이유

<김갑제 광복회광주전남지부장·국가보훈위원>
 

1908년 4월 25일 오후 3시경. 조용하던 광주시 광산구 박산마을 일대에서는 요란한 총성이 울리며 난데없는 교전이 시작됐다. 기마대를 포함하여 일본 군경 4개 수색대로 구성된 제2특별순사대와 김태원 의진(義陣)간의 전투였다. 의병들과 일군간의 전투는 무려 3시간 동안이나 계속됐다.

지금으로 치자면 M1소총처럼 6번을 장전하여 사격할 수 있고, 사거리도 250m에서 300m나 되는 소총으로 무장한 일본군경. 한 사람이 화약을 장전하여 총을 들고 사격할 자세를 취하면 또 한 사람은 부싯돌로 심지에 불을 붙여야 했고, 사거리도 20m에서 30m에 불과한 화승총으로 무장한 의병간의 전투였다. 당시 상황을 일제는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위의 명령을 받고서 월평·평림·사창에 분둔(나누어 주둔함)3개 분대는 곧바로 마지방면으로 향하였는데, 장성 석전(石田)기병중위도 수기(數騎)를 이끌고 월평분둔 제1수색대와 함께 길을 따라 마을을 수색하며 행진하는 도중 25일 오전 7시 함평군 평능면에서 적괴 김태원의 전령사(傳令使) 이문경, 비서 김규철을 체포하였다.(중략) 체포한 폭도의 말에 의하면 김태원은 두동으로부터 약 1리정도 떨어진 광주군 어등산 박산동에 잠복했다고 해서 박산동을 포위 오후 1시 각부대의 부서를 정하여 행동에 들어갔다”.(중략)

일제는 이어 “박산동은 광주군 어등산록에 있는 한 마을로서 앞에는 황룡강이 흘러서 적의 근거지로서는 자못 중요한 지점이었다. 수색대는, 석전중위가 이끄는 기병대와 같이 산을 넘고 강을 건너 오후 4시 30분경 목적지에 다 달아 제1수색대는 좌익으로부터 제2수색대는 우익, 석전기병대는 우측 배면(背面), 제3수색대는 좌측 배면 등 사면을 포위하는 형세를 갖추고서 곧바로 맹렬한 사격을 교환하였는데, 오후 7시까지 적은 전부 궤산하였다. 이때 사창분둔 제3수색대의 전방 약 300m 지점의 바위굴로부터 비교적 미복(美服)을 입은 폭도 1명이 도주하자, 이를 수괴로 인정한 수색대 일본인 순사 와좌병위(窪佐兵衛)는 삼택기병(三澤 騎兵) 일등 졸과 같이 비 오듯 쏟아지는 탄환을 무릅쓰고 급히 추격하여 생포하려 하였다. 그러나 그는 교묘하게 도주하여 추격이 어려워지자 사격이 가능한 지점에서 곧바로 사격을 가하여 이를 죽였다. 적이 궤산한 후에 시신을 검토했는데, 은색 두루마기와 흰색 비단의 저고리를 착용하였고, 쌍안경 1개, 조선도 1개, 자석(磁石) 1개, 화약통 1개, 서류 약간을 소지하였다. 피체된 의병의 증언에 의하면 이 사람이 바로 적장 김태원으로 판명되었고, 그가 휴대한 쌍안경은 본년 2월 2일 무등산 전투에서 전사한 요시다 수비대의 군조(軍曺, 지금의 상사에 해당하는 계급) 천만포건(川滿布建)이 휴대하다 빼앗긴 것으로 이후 그는 항상 이 이기(利器)에 의하여 멀리서부터 일본군의 행동을 볼 수 있어서 진퇴를 교묘히 할 수 있어서 토벌대는 적지 않은 고충을 일찍부터 겪어오다가 이번에 그가 죽으면서 함께 이를 탈환할 수 있었다.(제2순사대에 관한 편책, 내부 경무국, 국사편찬위원회 소장, 1908)

이와 관련 당대의 유학자 오준선은 그의 저서 ‘후석유고’에 이날 상황을 이렇게 기록했다. 연초부터 ‘김태원잡기 15일 작전’을 3번이나 실시한 일본군 기병대와 제2순사대가 이날 박산마을을 사방에서 포위하자 이를 알아차린 의병장 김태원은 부하들에게, “나의 죽음은 의병을 일으킨 날에 이미 결정하였다. 다만 적을 멸하지 못하고, 장차 왜놈의 칼날에 죽게 되었으니 그것이 한이다. 함께 죽는 것은 유익함이 없으니 뒷일을 힘써 도모함이 옳다”며 부하들에게 피신을 명령하였다. 그러나 “위기에 처한 대장을 홀로 남겨둘 수 없다”며 기어이 남겠다는 부하 김해도 등 23명은 끝까지 항전을 계속하다 모두 함께 순국하였다.

1905년 의병에 투신한 후 1907년 설날 무등산 무동촌에서 광주수비대를 격파하는 등 일군과의 약 40여회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던 한말 호남의 대표적 의병장 김태원. 매천 황현이 “기발한 전략을 많이 이용하여 1년여 동안 수 백 명의 일군을 죽였으며, 부하를 엄히 다스려 백성에게 민폐를 끼치지 않았다”고 기록한 명장. 순국 한 달 전 “國家安危在頃刻 국가의 안위가 경각에 달려 있거늘 /意氣男兒何待亡 의기남아가 어찌 앉아서 죽기를기다리겠는가 /盡忠竭力義當事 온힘을 쏟아 충성을 다하는 것이 의에 마땅한 일이니 /志濟蒼生不爲名 백성을 건지려는 뜻일 뿐 명예를 위함이 아니라네 /兵死也 含笑入地可也 전쟁은 죽으려는 것, 기꺼이 웃음을 머금고 지하에 가는 것이 옳으리라.”라는 서신을 친동생에게 보냈던 올곧은 선비. 그는 1908년 4월 25일 어등산에서 이렇게 산화했다. 그의 나이 서른여덟이었다.

앞서 한 달 전 일군에 체포되어 광주감옥에 갇혀 있던 김태원의 동생 김율 의병장은 관찰사가 신문하려 하자, “너는 왜놈의 앞잡이로서 감히 백성 앞에 나설 면목이 있느냐”라며 큰소리로 호통을 치는 등 죽음을 앞두고서도 독립정신을 전혀 굽히지 않았다. 결국 김율 역시 형의 시신을 확인시킨 일본군경에 의해 형의 순국 다음날인 4월 26일 어등산에서 총살당했다. 그의 나이 채 서른이 안 된 스물일곱이었다.

태원의 처 낙안 오씨도 어린 남매를 키운 후 1919년 3월 1일 “나라가 망했으니 살아있을 이유가 없다”며 남편의 뒤를 이어 자결했다. 훗날 호남의병사의 권위자인 사학자 홍영기는 “만고의 충절이다”며 “죽봉 김태원, 청봉 김율 일가는 마땅히 ‘호남제일의가(湖南第一義家)’로 기려야한다”고 평가했다.

나는 오늘 흐르는 눈물을 닦아내며 이 글을 쓴다. 불멸의 독립운동사의 일부지만 피어린 나의 가족사이기 때문이다. 해마다 4월이면 아프고 슬픈 이유를 역사서의 기록을 통해서만 적는다. 할아버지(김태원)와 할머니(낙안오씨) 작은할아버지(김율)의 숭고한 독립정신을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기억해주기를 간절히 염원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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