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계홍의 역사소설 깃발

충무공 정충신 장군<57>-제5장 정충신의 지략

전라도 금산군 진산면(1963년 행정구역 변경에 따라 금산군 전체가 충청남도로 편입)에서 완주군 운주면으로 향하는 길. 청주, 옥천, 영동, 금산의 동북부 사람들이 호남으로 들어가는 유일의 길이자, 조선왕조의 혼백이 담겨있는 전주성에 도달하는 길이다. 그러나 높고 험한 영(嶺)이 목을 누르듯 앞을 가로막고 있으니, 바로 배티재(梨峙)다. 이치령이라 불리는 이 재는 금산과 완주 사이의 경계를 이루는 대둔산 남쪽 사면에 위치해있다.

산골짜기가 길고 깊고 험하지만, 해마다 봄철이면 접동새 우는 소리와 골짜기에 산배나무꽃이 흐드러져서 산골이 온통 배나무꽃향이 가득하다. 산배나무가 많아서 배티재라 이름 붙여진 이 재는 험한 지형인지라 넘기가 어려운데, 그러나 이 고개를 넘어야 조선왕조의 모태이자 나라의 혼백이 담긴 전주에 이르고, 드넓은 호남평야를 만나게 되니 누구나 희망을 품고 넘게 된다. 이곳을 차지해야 조선반도를 장악한다는 상징적 의미도 있다.

험한 이치령의 사면, 조그만 분지에 막영지가 차려졌다. 막영은 분지의 골짜기에 숨어있는 듯 차려진 데다 녹음이 짙은 숲에 가려져 있어 쉽게 찾아낼 수 없었다. 전라도 절제사로 긴급 발령된 광주목사 권율이 며칠 전 당도해 진을 치고, 오늘 마침내 관병장·의병장 합동회의를 소집했다. 동복현감(화순군수) 황진(黃進)이 벌써 도착했고, 장교(將校) 공시억(孔時億)도 막 막영지로 들어섰다. 권율의 조카이자 조전장(助戰將)인 권승경, 척후(斥候)사령이자 상황병인 정충신이 부지런히 움직이는 가운데 영광인 김율(金?) 김여건(金汝健), 순천인 김복흥(金福興)도 찾아들었다. 그들은 권율을 중심으로 둘러앉았다.

권율이 황진을 불러 물었다.

“일년 여전, 황윤길 대감이 왜국에 다녀왔는데 왜군 동태를 그렇게 몰랐다던가?”

동태 파악차 도일(度日)했으면 적정 파악을 제대로 했어야 하는데, 어느날 갑자기 왜군이 파죽지세로 조선반도를 침탈하니 권율은 통신사들이 도대체 무슨 일을 했길래 이 모양이냐고 분개하고 있었다. 황진은 조선통신사로 일본에 파견되어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접견하고 귀국한 황윤길의 조카였다. 문과에 급제한 뒤 몇군데를 돌다 동복현감으로 왔는데, 왜란이 나자 재빨리 화순, 동복, 곡성, 보성의 젊은이들을 끌어모아 의병을 일으켜 이치령으로 달려온 것이었다.

“통신사 부사(副使) 김성일 대감의 보고와 달리 왜국의 내침(來侵)이 있을 것이라고 숙부께서 엄중히 보고했는데도 조정에서 김 대감의 말을 따르다 보니 이 지경이 되었습니다.”

권율이 혀를 끌끌 찼다. 저런 저런, 하고 둘러앉은 장수들이 동요하듯 소란해졌다.

“자, 냉정해집시다. 왜적의 무리가 침략했으니 제대로 방비하지 못한 전국의 진지는 순식간에 풍비박산되고 황망한 조정은 의주로 피난 갔소. 말 그대로 나라가 폭풍 앞의 촛불이요. 이런 일이 왜 일어났겠소.”

모두들 숙연해졌다. 권율이 말을 이었다.

“바로 당쟁 때문이오. 겉으로는 동인 세력 때문이라고 보겠지요. 동인이 강성하니 동인 출신 김성일의 의견을 좇다 보니 그리 된 것이라고 말이오. 일견 맞소. 사태 판단을 파벌의 위세로 결정하니 이 지경이 되었소이다. 의견 하나가 얼마나 위중한 것인가를 모르고, 그런 판단을 하니 참으로 안타깝소이다. 그러나 본질은 동인 서인 구분할 것 없소. 바로 당쟁 때문이란 거요. 피터지게 싸우니 이 모양이오. 서인이 강했대도 그들 유리한대로 상황을 이끌어갔을 거요. 판단을 잘못해서가 아니라 싸우니까 나라 꼴이 이 모양이 됐다는 거요. 그러니 우리가 어떠해야 한다는 것을 잘 알겠지요? 사사로운 대립은 금물이오. 위기에선 더 단단히 결속하고 연대해야 하오.”

그가 좌중을 둘러보았다. 모두들 긴장된 모습일 뿐, 이의를 단 장수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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