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계홍의 역사소설 깃발

충무공 정충신 장군<69>-제6장 불타는 전투

정충신이 아낙으로부터 물러나 툇마루를 계속 서성거리는 주인 어른에게 다가가 물었다.

“우리는 광주에서 올라온 관병들입니다. 장병 모집 때문에 마을을 돌고 있습니다. 따님이 언제쯤 잡혀갔습니까.”

“틀린 일이여.” 그가 꺼지듯 한숨을 내쉰 뒤 말했다. “그 잡놈들이 어짠 놈들인디 내버려둘 것잉가.”

“그래도 손을 써야 항개 말씀해주십시오. 곰방이면 뒤쫓아가서 요절을 낼 것잉개요.”

“그럼사 좋제. 한 두어식경쯤 될 것잉마. 어허, 이것을 어쩌야 할 것잉가.”

“어느 방향으로 갔습니까.”

“그들 숙영지로 끌고 갔겄지. 금지옥엽 외동딸이여. 손가락 하나 다칠까비 곱게 키운 외동딸이여. 누군가에게는 흔한 딸인디, 나한티는 금지옥엽이랑개. 인생 살아봐야 힘없으면 헛것인 가비여.”

“나라 잘못만난 탓이지 뭣이겠습니까요.”

박대출이 짚신발로 땅을 구르며 말했다. 그는 증오에 찬 시선을 허공에 날려보내고 있었다. 정충신이 나섰다.

“사위는 어떻게 됐습니까?”

“멧골로 끌고 가더니 죽였다고 안하는가. 그 사람도 힘 좀 쓰는디 대항하들 못했어. 총검을 찬 자들한티는 힘이 무용지물이여.”

정충신이 박대출을 향해 말했다.

“성님, 뒤쫓읍시다.”

그러자 주인 어른이 나섰다.

“내자도 함께 묶여갔는디, 젊은이들 꼭 부탁하요. 내 후사하겠소. 재산을 다 걸겠소.”

“어르신은 대신 마을 사람들을 수습해서 이치재로 올라오십시오. 안그러면 다 죽습니다. 우리가 따님을 구해서 산으로 가면 그놈들이 필시 보복하러 오닝개요. 그때는 마을이 왼통 쑥대밭이 될 것잉마요. 사람이 안다쳐아 항개 마을 사람들 수습해서 산으로 올라가십시오. 옆 마을에도 이 사실을 알리고 모두 산으로 피신하라고 하셔야 합니다. 전부 소개시켜야 합니다.”

어느새 모여든 동네 사람들 중 하나가 말했다.“아랫 말도 왜군놈들이 사람이건 양곡이건 홀테에 나락 훑으댁기 싹 훑어가부렀소. 남은 것이라고는 쥐새끼들밖에 없어라우.”

“그래도 알리고, 남아있는 사람들한티 알려야 해요. 별도로 지침을 줄 것잉개 준칙을 잘 따라야 합니다.”

마당에 모여든 사람들이 뿔뿔이 흩어지기 시작했다. 난리가 나서 당한 줄만 알았는데, 전쟁을 치러야 한다는 것을 그들은 비로소 깨달은 듯했다.

정충신이 마을의 장정 넷을 인솔하고 동구 밖으로 나오자 길 한쪽에서 흰 천을 덮은 거적 앞에서 한 노파가 소리죽여 울고 있었다. 그의 자식이거나 남편의 시체를 덮은 모양인데, 노파는 두려워서 소리내 울지도 못하고 있었다. 정충신은 노파 곁에 서있는 젊은이에게 말했다.

“더이상 당하지 않으려면 근동 사람들 모두 숨으라고 하시요. 식량은 종자까지도 숨겨야 한다고요. 지금은 전쟁 중이오. 우리도 싸울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젊은이들은 일모까지 이치재로 올라오시오.”

박대출이 그의 뒤를 따르고, 마을 청년 서넛이 그 뒤를 따랐다. 산의 숲이 우거졌지만 잎사귀들이 축 늘어져 있었다. 따가운 햇볕을 이기지 못하고 시들어져 있는데, 사위의 모든 것이 정지되어있는 느낌이었다. 절망이 가득 들판에 고여있는 것 같았다.

"광주전남 지역민의 소중한 제보를 기다립니다"  기사제보
저작권자 © 남도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