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라봐 주어야”

“바라봐 주어야”

<나선희 스피치커뮤니케이션즈 대표>
 

대중 앞에 서는 것이 일상인 나에게 패션은 메시지다. 아나운서 시절, 시의성(時宜性)을 고려하여 옷차림을 하는 것은 공인으로서 기본 매너였다. 홍수나 가뭄과 같은 기상이변, 대형 사고나 재난 방송을 할 때 지나치게 화려한 의상으로 비난을 받은 진행자도 없지 않았다. 80년대에 방송사에 입사한 나는 내내 화사한 옷을 입지 못했다. 특히 5월만 되면 매캐한 최루탄 냄새를 맡으며 무채색 재킷으로 일관했던 우울한 기억이 있다.

그런 환경의 영향인지 4·16 세월호 주간인 요즘 내 의상은 주로 검정색이다. 티가 났는지 “요즘 블랙에 꽂혔나 봐요.”라는 피드백을 받았다. 세월호 4주기인 4월 16일에는 검정색 셔츠에 검정색 바지, 그리고 흑백색의 재킷을 입었다. 그리고 노란 리본이 달린 매듭 팔찌 액세서리로 포인트를 주었다. “어? 오늘 패션은 ‘잊지 않겠습니다’네요?” 청중에게 이런 말을 들었으니 미닝아웃(Meaning Out)한 셈이다.

서울대 소비트렌드 분석센터의 2018년 대한민국 소비트렌드로 선정된 미닝아웃(Meaning Out)은 소비자 운동의 일종이다. 의미, 신념을 뜻하는 ‘미닝(Meaning)’과 ‘벽장 속에서 나오다’라는 뜻의 ‘커밍아웃(Coming out)’이 결합된 단어이다. 정치적·사회적 신념과 같은 자기만의 의미를 소비행위를 통해 적극적으로 표현하는 것을 말한다. 새롭게 등장한 시사용어 미닝아웃(Meaning Out)은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SNS)에서도 활용된다. 해시태그 기능을 사용하거나 자신의 관심사를 공유해 사회적 관심을 이끌어 내는 방식이다.

옷이나 가방과 같은 물품에 메시지를 담은 문구나 문양을 넣어 표현하는 ‘슬로건 패션’, 세월호 참사를 추모하는 신념을 몸에 표현하는 연예인들도 있다. 평소 세종대왕, 어머니 등을 몸에 타투로 남겼던 블락비 지코는 “세월이 지나도 그 세월만은 지워지질 않길”이라는 말과 세월호를 상징하는 리본을 팔뚝에 새겼다. 위너 송민호, 언터쳐블 슬리피도 팔뚝과 손목에 작은 리본을 새겨 세월호의 아픔을 함께하는 메시지를 드러냈다.

환경운동 단체에서 활동 중인 지인은 늘 텀블러를 들고 다닌다. ‘텀블러’라는 별명을 얻을 정도로 일회용품은 사절이다. 그렇게 십년 넘게 생활하니 그가 들고 다니는 텀블러는 “지구를 살립시다.”라는 메시지가 되었다. 그 뿐 아니다. 값 좀 나가는 자동차를 사고도 남을 만한 경제력을 가진 나의 친척은 자전거를 타고 다니며 미닝아웃(Meaning Out)을 실행하고 있다. 역시 환경 운동인데 매연을 방지하자는 환경 지킴이로서의 표현이다. 이들의 작은 움직임이 꾸준히 지속되자 주변 사람들도 서서히 변화하기 시작했다.

세상은 체념하지 않고 기어이 항의하는 소수의 정의파들에 의해 진화한다. 이제 그만 좀 하라는 사람들과 맞서 결코 그만두지 않는 사람들. 1980년 5월 이후 38년을 변함없이 목소리를 내 온 이들이 민주화를 이끌었고, 4년 전 4월 16일 세월호 참사부터 지금까지 지치지도 않고 분노한 이들 덕분에 세월호를 바다에서 꺼낼 수 있었다. 그 뿐 아니다. 추운 겨울 칼바람 마다않고 촛불을 켜고 거리로 나앉은 열성분자들이 아니었다면 정국은 어디까지 갔을지 의문이다.

촛불집회 현장에서 연세 지긋한 어르신을 만난 적이 있다. 평생을 공무원으로 지냈다는 그는 마음만 있을 뿐 광장으로 나가지 못한 것이 한이 되었다고 했다. 손자들에게 부끄럽지 않은 할아버지가 되려고 촛불을 들게 되었단다. 미안함을 속량하고자 수십 개의 촛불을 사서 나눠주고 다녔던 그 어르신은 일찌감치 미닝아웃(Meaning Out)한 셈이다.

함께 행동하지 못해서 미안하다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하지만 앞서서 행동하는 사람이 있다면 이들을 지원하는 역할도 필요하다. 갤러리가 있어야 활력이 생기는 경기처럼 관심을 갖고 바라봐주는 것은 소리 없는 응원이다. 아이 때 울며 떼를 쓰는 것도 엄마가 달랠 때 탄력을 받는다. 보다 못한 엄마가 너 알아서 하라며 시야에서 사라져버리면 우는 것도 시들해지고 마는 법이다. 강의를 하는 나도 마찬가지다. 청중이 많으면 더욱 말발이 받는다. 게다가 강의하는 내내 좋아 죽겠다는 듯 경청해주면 내 혀는 술술 풀려 춤을 추게 된다. 누군가를 춤추게 하려면 시선을 멈추지 말고 바라봐주어야 한다. 그들의 춤이 멈추면 인류의 발전도 멈추고 말 테니까.

역경을 딛고 성공한 인물들에게는 공통점이 있다고 한다. 어떤 상황에서도 끝까지 나를 믿고 지지해 준 사람이 한 명은 있다는 것이다. 나에게 그런 사람은 누구일까? 나는 누구에게 그런 사람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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