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계홍의 역사소설 깃발

충무공 정충신 장군<72>-제6장 불타는 전투

진산에 머물러 기생을 끼고 술 한잔에 전독(戰毒)을 풀고 있던 고바야카와가 귀를 바짝 세우는 듯했다. 명포수 부관이 갓 잡아온 사슴피에 독주를 섞어 마신 뒤끝인지라 몸이 모처럼 노곤해지는데 전선을 누빈 노장(老將)답게 이상한 소리에 본능적으로 방어자세를 취한 것이다. 월향이라는 기생이 그의 갑작스런 긴장된 모습에 뻘쭘하더니 아뢰었다.

“어서 드시와요. 이것은 정기에 아주 좋은 보약잉개요.”

술상에 차려진 안주는 사슴 뒷다리와 안창살을 삶은 것이었고, 가슴 부위는 생고기였다. 그리고 태반이 삶아진 새끼 사슴이 통째로 상에 올라있었다. 포수가 하필이면 해산을 앞둔 암사슴을 잡은 모양이었다. 월향이 그것을 권하는 것인데, 고바야카와는 기분이 찜찜하였다. 그 찜찜한 기분이 현실이 된 듯 이 산골 저 산골에서 농악소리가 귀청을 때리고 있었다. 봉화도 수십 기 오르고 있었다.

그때 고토 참모장이 헐레벌떡 장수 막사로 뛰어왔다.

“장군, 지금 우리는 완전 포위되었습니다.”

순간 고바야카와가 술상을 걷어차고 밖으로 뛰쳐나갔다. 진을 치고 있는 진산의 골짜기마다 온통 봉화가 오르고 있었다. 완전 포위되고 있는 형국이었다.

“저 농악소리는 무엇이냐.”

“마을마다 농민군이 쳐들어오겠다는 위협 신호입니다.”

“마을은 소탕되었다고 하지 않았느냐.”

“모두들 산으로 은신했던 자들입니다.”

그는 아차 했다. 숲이 우거진 이때 골짜기로 들어오는 것이 아니라는 뒤늦은 후회가 가슴을 쳤다. 숲은 철두철미 적들의 은폐물이 되고 매복의 근거가 된다. 더군다나 일본군은 이곳 지리에 익숙하지 못하다.

“적병의 규모는?”

“열명이 되기도 하고 수천, 수만명이 되기도 합니다.”

“그게 무슨 뜻이냐?”

“적들의 규모를 확인할 수 없습니다.”

-전라도는 다른 지역과는 완연히 다르군.

술이 확 깨는 기분으로 고바야카와는 속으로 읊조렸다. 지금까지 그가 조선반도를 진격하는동안 한번도 장애물을 만난 적은 없었다. 그의 군대가 지나가면 바람보다 먼저 쓰러지는 것이 조선 관아 사람들이고 백성들인데 이건 뭐냐. 경상도건 경기도건, 항해도건, 평안도건, 한양이건 일본군이 쳐들어가면 어이없을 정도로 무릎꿇고 엎드려서 무너져버린 것이 조선놈들 아니던가. 그런데 천부당만부당한 사단이 지금 눈앞에 펼쳐지고 있다.

주민의 시선도 심상치 않은데, 어떤 커다란 음모를 꾸미듯이 불쾌하게 무언가가 꾸며지고 있다는 느낌이 들어서 그는 술이 확 깨는 기분이었다. 딱 잡아 무엇이라고 할 수 없지만 무언가에 짓눌리고 포박당하는 느낌이었다. 이상하게 저항의 불길 같은 것이 그의 가슴을 짓눌렀다.

대일본의 무패 수군이 전라도로 진격하려 했지만 막혔고, 그것은 이순신의 영명한 지휘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자원입대한 수병들의 임전무퇴 정신 때문이란 것을 그는 알고 있었다. 수병의 주력은 자원한 전라도 어민과 주민들이었다. 그들은 물러서지 않는다는 자세가 분명했고, 실제로 용맹했다. 그 벽을 넘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퇴로를 찾아 육로를 택해 전주성을 공략하려는데 여기서도 덫에 걸린 기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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