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정상회담과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

남북정상회담과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

<최혁 남도일보 주필>
 

4월은 잔인하다고 했다. 움트는 모든 것들이 감당해야할 시련이 너무 많아서이다. 4월은 이제 막 시작된 봄이, 세찬 바람과 모진 추위에 쫓겨 가는 달이다. 살아있는 것, 하다못해 풀한 포기까지 계절의 변덕에 몸서리를 치는 일들이 4월에 벌어진다. 동토(凍土)의 차가움과 완고함을 이겨내고 잠시 고개를 내밀었던 씨앗들은 4월 추위에 소스라치게 놀란다. 땅을 밀고 올려 세우던 움을 거둬들인다. 하늘아래 있던 움은 다시 땅 밑으로 들어간다. 몸과 마음을 얼어붙게 하는 4월은, 그래서 잔인하다.

그러나 4월이 항상 잔인한 것만은 아니다. 대한민국에 찾아온 2018년 4월은 잔인하면서도 한편으로는 희망을 안긴다. 건물이 난방이 잘돼 있고, 사람들은 차를 타고 다니는데 4월 추위가 추우면 얼마나 춥겠는가? 대한민국의 4월이 추운 것은 날씨 때문이 아니다. ‘그날의 일’이 4월에 벌어졌기 때문이다. ‘그날 그 바다’에서 벌어졌던 일은 이 땅 사람들의 마음을 갈가리 찢었고, 대한민국을 두 동강냈다. 그래서 사람들은 4월이면 침묵한다. 먼 바다로 시선만 보낼 뿐이다. 리본 색을 닮은 유채꽃은 그래서 더욱 처연하다.

그런데 이 4월의 끝자락 날이 희망과 기대의 날이 되고 있다. 이제 이틀 뒤면 벌어질 남북정상회담 때문이다. “남북한을 뒤덮고 있던 그 질긴 겨울이 이제야 끝나려나~?” 사람들의 기대는 높다. 갑작스레 태도를 돌변한 북한지도자의 행보에 불안한 시선을 던지면서도 사람들은 긍정적으로 이 상황을 받아들이고 있다. 한반도의 정치겨울이 워낙 매섭고 추웠기 때문이다. 사상 때문에 동족을 죽인 전쟁이 벌어져 수백만이 생명을 잃었다. 그 뒤로도 수많은 사람들이 분단의 희생양이 됐다. 그 겨울이 가고 이제 봄이 오려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 봄이 감내해야할 ‘4월’은 참으로 잔인할 수 있다. 현재로서는 남북한의 평화를 위해서 우리가 무엇을 지켜야할 지, 무엇을 포기해야할 지가 분명치 않기 때문이다. 북은 핵무기를 포기하는 댓가로 평화협정체결과 주한미군철수를 요구하고 있다. 과거 무력적화통일을 추구했던 북한정권이 단 한 번도 포기하지 않았던 대남전략이다. 보수 쪽 사람들은 과거 주체사상을 신봉했던 젊은이들이 정권의 핵심영역에 진입해 있는 이 상황을 매우 우려하고 있다. 그래서 정치의 봄바람이 불어오지만 외투를 벗지 못하고 있다.

우려스러운 것은 남북정상회담과 금방이라도 이뤄질 것 같은 ‘통일모드’ 때문에 상당수 우리 국민들이 심리적으로 무장해제가 돼 있다는 점이다. 핵무기로 세계를 위협하던 ‘철부지 김정은’이 북측의 평창올림픽 참가와 남북정상회담 결정으로 ‘통 큰 지도자’가 됐다. 북측의 핵실험·ICBM발사실험 중지선언을 우리는 ‘북한이 경제발전에 치중하겠다는 의지표명’이라고 선의로만 해석하고 있다. 몇 달 전 보도행태를 참고해보면 대부분 언론은 널뛰기를 하고 있다. 이상경고음을 내는 곳이 없다. 모두들 ‘삼천리 강산에 봄이 왔어요’이다.

이런 우려에도 불구하고 현재로서는 모든 상황이 낙관적인 것은 운전대를 잡은 사람이 문재인 대통령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속도를 줄이고 싶으면 브레이크를 밟아도 되고 속도를 높이고 싶으면 가속페달을 밟으면 된다. 우리 선도차(先導車)가 미국과 중국, 일본, 북한을 이끌어 가고 있다. 대한민국의 운명이 트럼프의 좌충우돌 식 성격과 예측불허 김정은 북한노동당위원장 손에 달려있던 몇 개월 전의 상황에 비하면 얼마나 다행스러운지 모른다. 삭풍(朔風) 불어 닥치는 허허벌판에서 벚꽃 만발한 초원으로 나온 기분이다.

문제는 방향이다. 운전자인 문재인 대통령과 측근들이 몰고 있는 ‘대한민국 호’가 좌측으로 갈지, 우측으로 갈지, 아니면 가운데 길로 직진할지가 문제다. 민주주의의 가치를 훼손하지 하지 않는 상생이 어떤 형태로 이뤄질 것인지가 관건이다. 유감스럽게도 이 부분은 불안하다. 내란선동혐의로 유죄를 선고받아 구속 수감돼 있는 이석기를 ‘양심수’ 혹은 ‘통일인사’라며 석방을 촉구하는 이들이 많다. 만약 이석기를 양심수라 받아들인다면 우리 사회는 좌회전을 너무도 급하게 하는 것이다. 그만큼의 쏠림만큼 사회갈등도 그만큼 일어날 것이다.

봄은 왔으나 봄이 아닌 것이다. 말 그대로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이다. 이 고사는 절세미인 왕소군이 화공에게 뇌물을 주지 않아 밉게 그려진 탓에 원제의 눈에 들지 않고 흉노에게 강제로 보내지게 된 일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시인 동방규는 〈소군의 원망〉이라는 시에서 ‘오랑캐 땅에는 화초 없으니/봄이 와도 봄은 아니리/저절로 허리띠 느슨해지는 것은/허리 날씬하게 하려던 것 아니라네’라고 읊었다. 필요이상으로 미화하거나 혹은 폄훼하는 것은 화(禍)를 부른다. 고민에 허리가 야위어질 주인공이, 우리가 될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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