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계홍의 역사소설 깃발

충무공 정충신 장군<83>-제6장 불타는 전투

쏴아- 하니 바람이 한바탕 지나가자 골짜기의 숲들이 한껏 한 쪽으로 쓸리며 잎들이 싱그럽게 하늘거렸다. 잎의 밑바닥이 드러나며 하얀 물결을 이루었다.

골짜기 건너편 숲에는 안심골에서 들어온 사람들이 돌덩어리를 모으고 있는 중이었다. 아마도돌멩이를 쌓아놓는 역할을 맡은 모양이었다. 그것을 젊은 병사들이 골짜기 아래로 집어던지면 왜병사들은 박살나는 것이었다.

“정 총각 아닌겨?”

정충신을 발견한 한 아낙이 물었다.

“고생들 많으시지요?”

“이런 고상은 고상도 아녀. 정 총각 생각하면 참말로 고맙당개. 어떻게 그런 용기가 나왔을까이. 우덜은 무서워서 떨기만 했는디. 왜놈 병사들을 한 순간에 손톱으로 이 까죽이듯이 해버링개 나가 놀라뿌렀당개. 우덜은 다 디지는 줄 알고 도살장 끌려가는 소맹키로 눈물만 흘림서 끌려갔디말로 요렇게 구세주가 나타나서 살아부렀당개. 고마운 일이여. 복받을 것이시. 정 총각 말 듣고 요 며칠새 안심골, 범실 사람들이 다 욜로 들어왔고마. 우리도 뭔가 해야 된개 호미랑 쇠시랑이랑 농구(農具)를 챙겨왔당개. 저 육시럴 놈들을 보는 족족 호미로 면상을 찍어버릴라고 왔당개. 가만 놔두어선 절대로 안된개. 도끼로 가슴을 찍어부러야제.”

“그라제 그라제. 저것들이 우리 식량 모두 퍼갔당개. 소도 잡아가부렀어. 못된 간나구 새끼들이여.” “성님, 고만네 어무이 잡혀간 것 보쇼. 얼굴이 반반한 것이 죄라고, 고 잡놈에 새끼들이 잡아가부렀당개요. 사람들이 쫓아가봉개 고만네 어무이를 왜놈 상급부대로 보냈다고 안허요. 맛이 좋겠다고 왜장한티 상납한다고요.”

“고런 개새끼들이 하는 짓이 고래라우. 고만네 아버지가 뒤쫓아갔는디 어찌 되었는가 몰겄소.”

그렇게 대화들을 나누고 있는데 다른 막사에서 여인네들이 나왔다.

“왔다, 우리덜 살려준 정 총각 왔네 그랴. 세세히 봉개 인물도 훤하고마이. 한 인물이여.”

그리고 아낙이 막사 안에다 대고 누군가에게 소리쳤다.

“정 총각 오셨다. 나와보그라.”

“아니당개. 고운네는 나갔당개.”

“고운네라니요?”

정충신이 물었다.

“아따 요며칠 전에 혼사 치르던 처녀 말이여. 김소연이라고, 우덜은 기양 어렸을 적 이름을 고대로 부르는겨. 고운네라고. 아매 지금 치성 드리러 산배나무골로 들어갔을 것이로구만.”

그는 아낙들과 헤어져 산배나무가 군집한 건너편 골짜기로 이동했다. 창포물을 들인 잠자리 날개 같은 화사한 모시옷을 입은 김소연이 산배나무 아래 바위섶에 앉아있었다. 기도하는 것 같기도 하고, 명상에 잠겨있는 듯도 했다. 입술이 도톰하고 이마가 넓고, 코가 오똑해서 흡사 인형같았다. 그러나 정맥이 내비친 창백한 목선이 가련해보였다. 소연이 정충신을 발견하고 쑥스러운 듯 일어서서 귓밥을 만졌다가 코를 만졌다가 하며 머리를 숙였다. 한참만에 소연이 말했다.

“고마워요.”

목소리는 가늘었으나 생기가 돌았다.

“식사 잘 하고 있지요? 찬도 없을 틴디…”

“네. 잘 먹어요.”

“무엇이든지 잘 먹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가 산을 타는 중 비상식으로 간직한 더덕뿌리와 도라지 뿌리를 괴나리 봇짐에서 꺼내 그녀에게 내밀었다. 그는 조그만 괴나리봇짐을 지고 산을 한달음에 백리를 달렸다. 그 힘은 산삼이든 무엇이든 눈에 띄는대로 캐서 씹고, 괴나리 봇짐에 넣어두었다가 다시 꺼내먹는 데서 찾아진다고 생각했다. 굴이나 숲에 나뭇잎을 깔면 며칠씩 지낼 수 있는 숙소가 되었다. 초분골, 서낭당, 대장간, 물레방앗간 어디에서 자도 끄떡없었다. 그는 야전에 강한 사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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