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운동에서 촛불 항쟁까지

학생들 항일·애국정신 민주주의를 꽃피우다

<상>폭압을 이겨낸 민주 열망

대구 2·28 이승만 정부의 부패에 대한 응징

마산 시위 과정 김주열 죽음 정권 무너뜨려
 

1980년 5월 18일 광주에서 일어난 민주화운동이 38주년을 맞이했다. 시민들은 국가에 의해 폭도란 이름으로 매도됐다. 진실은 은폐됐고, 만행을 저지른 주범들은 폭도를 제압했다며 여전히 당당하다. 하지만 진실을 향한 국민들의 마음까지 가릴 수 없다. 민주주의에서 저항은 헌법적 가치 수호를 위한 수단이고 권한이기 때문이다. 비 민주적이고 폭압적인 국가권력 행사가 민주적 가치와 기본질서를 중대하게 침해할 때 발생한 시민들의 저항은 온당한 평가를 받아야 하는 이유다. 한국 민주주의는 투쟁의 역사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리고 그 중심엔 다름 아닌 나이어린 학생들이 있었다. ‘민주주의는 피를 먹고 자란다’는 말이 있다. 학생들이 바친 피의 역사가 오늘날의 민주주의의 근간이 됐다. 이에 한국 민주주의의 밑거름이 됐던 학생 애국 민주화 운동을 세 차례에 걸쳐 살펴본다.

◇학생독립운동 민주화 역사적 첫 페이지

한국 민주화 운동의 탯자리가 무엇이냐는 질문에 많은 역사 학자들이 이구동성으로 꼽는 것이 있다. 다름 아닌‘광주학생항일운동’이다. 지난 1929년 10월 30일 광주에서 나주로 가는 통학열차 안에서 광주고등보통학교(현재 광주제일고) 학생들과 일본인 학교인 광주중학 학생들의 충돌이 계기가 돼 발생한 광주학생항일운동은 일본 경찰이 일방적으로 일본인 학생을 편들고 조선인 학생들을 구타한데서 비롯됐다. 이는 광주 학생들의 반발을 샀고, 1929년 11월 3일 광주에서 가두시위가 벌어졌다. 국가 권력에 맞선 학생 저항 운동의 시작점이 된 셈이다.

학생들은 1929년 11월 11일 저녁에 광주 시내 전역에 격문을 살포했다. 다음날 광주 시내에선 광주고보, 광주농업학교, 광주여고보, 광주사범학교 학생들이 참여한 대규모 시위가 벌어졌다. 학생들은 격문에서 언론ㆍ출판ㆍ집회ㆍ결사ㆍ시위의 자유 보장, 조선인 본위의 교육제도 확립, 식민지 노예교육의 철폐, 민족 문화와 사회과학 연구의 자유 보장 등 9개 항목을 내세웠다. 학생들이 주장한 9가지 항목은 현재의 민주주의가 추구하는 이념과도 상당부분 일치한다. 이처럼 광주학생항일운동은 최초의 민주화 개념을 정립시켰으며, 순수하게 학생들이 조직해 전개된 항쟁이란 점에서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대구 2·28 학생 운동 그리고 4·19 도화선

“백만 학도여, 피가 있거든 우리의 신성한 권리를 위하여 서슴지 말고 일어서라. 학도들의 붉은 피가 지금 이 순간에도 뛰놀고 있으며, 정의에 배반되는 불의를 쳐부수기 위해 이 목숨 다할 때까지 투쟁하는 것이 우리의 기백이며, 정의감에 입각한 이성의 호소인 것이다”

이 글은 대구 2·28 학생운동이 일어난 1960년 2월 28일 오후 12시 55분께 경북고 학생부 위원장 이대우 등이 조회단에 올라 외쳤던 결의문 중 일부다. 2·28 대구 학생의거는 이승만 정권 시절인 1960년 3월 15일 대선을 앞두고 이승만 정부와 자유당의 독재에 항거, 대구시에서 일어난 항쟁이다. 당시 2월 28일은 민주당 정·부통령 후보인 장면 박사의 유세일인 동시에 일요일이었다. 이승만 정권은 학생들이 민주당 유세장에 나가지 못하게 하기 위해 이날 억지로 등교시켰다. 비민주적 국가 탄압이었다. 1960년 2월 27일 늦은 밤 경북고, 대구고 경북대사배부고의 학도호국단 간부 10여명은 회합을 갖고 일요 등교에 항의하는데 결의한다. 2월 28일 오후 12시 50분께 경북고생 800여 명이 대구 반월당을 거쳐 경상북도청으로 쏟아져 나왔다. 이 과정에서 대구고, 경북여고, 경북대 사대부고 등 다른 학교 학생들도 합세했다. 정부의 탄압에 비록 사태는 진정됐지만 2·28 의거는 정부의 정치적 폭거를 가로막은 최초의 민주항쟁인 동시에 학생들이 자발적으로 벌인 시위란 점에서 향후 국내 학생민주화 운동의 출발점으로서 의미가 크다는 분석이다.

◇1·2차 마산시위 그리고 4·19 혁명

지난 1960년 3월 15일 치러진 정·부통령 선거는 부정선거가 극에 달했다. 선거 당일 마산에선 시민들과 학생들이 합세해 부정선거를 규탄하는 시위가 계속됐다. 시청에서 개표가 진행된 오후 7시 30분께 시민과 학생 1만여 명이 ‘부정선거 다시 하라’는 구호를 외치며 시위가 시작됐다. 마산 1차 시위가 전개된 것이다. 경찰은 시위대에 실탄과 최루탄을 무차별 발사했다. 많은 사람들이 죽거나 다쳤다. 그리고 4월 11일 오전 11시 30분께. 마산시 신포동 중앙부두에서 낚시꾼에 의해 1구의 시체가 인양됐다. 최루탄이 눈에서 뒤통수까지 관통당한 사체였다. 주인공은 김주열 학생. 이는 마산 2차 시위의 도화선이 됐다. 시민들은 김주열의 참혹한 주검을 확인하고 시위 대열을 형성했다. 시위대는 1960년 4월 11일 오후 6시께 3만여 명으로 불어났다. 부산에서 모여든 시위대도 일부 합류하는 등 걷잡을 수 없을 만큼 커졌다. 마산공고를 시위대를 필두로, 창신농고, 마산여고, 마산고 등 학생들도 합세했다. 정부는 시위대를 향해 총을 발포하고 계엄령을 선포하는 등 강경책으로 맞섰다. 제1·2차 마산시위 과정에서(2차 시위 3명) 중학생 1명, 중졸 3명, 고등학생 4명이 숨졌다. 하지만 국민적 항거는 계속됐다. 4월 19일 이승만 대통령은 하야를 발표했고 자유당은 붕괴됐다. 민중이 강압적인 정권을 타도한 최초의 혁명이었다. 2·28 대구 의거를 거쳐 3·15부정선거에 항거한 시민들의 열망이 4·19혁명으로 이어진 것이다.

/심진석 기자 mourn2@namdo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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