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 간담 서늘케 한 광양 백운산 의병들

최혁 주필의 전라도역사이야기

42. 백운산 의병부대의 주역 황순모와 황병학 의병장

일제 간담 서늘케 한 광양 백운산 의병들
진상 비촌마을 황순모·황병학
200여명 의병 모아 일인 공격
황순모 선봉장 가족 만나러 하산
일군 매복 걸려 체포돼 처형당해
황병학 의병장 일군에 쫓겨 상해로
조선잠입 중 발각 고문후유증 사망
의병마을 비촌마을은 수어댐에 수몰
황순모선봉장 재평가, 기념사업 절실
 

진상면 비촌마을 창원황씨 제각 지원재(知源齋)앞에는 ‘의사황병학기념비’(좌측)와 ‘회산황씨유허비’ ‘의사운정황공순모기적비’(중앙) 등 비석군(群)이 있다. 의병에 투신, 목숨으로 이 나라를 지키려한 종숙과 조카의 숭고한 뜻을 기리고 있는 비다. 나란히 고향마을을 향해있는 비의 모습이 당당하다.

■황병학·황순모 의병부대

후기의병 활동당시 백운산을 배경으로 해 전남 광양에서 활약했던 의병장은 황병학(黃炳學, 1876~1931)이다. 선봉장은 황순모(黃珣模, 1873~1908)이다. 황순모와 황병학은 나이차이가 많지 않았으나 작은 아버지와 조카 사이였다. 이들은 일제가 고종을 겁박해 1905년 강제로 을사조약을 체결하고 조선백성을 억압하는 것에 통분했다. 그리고 이 땅에서 어떻게든 일본인들을 몰아내야 한다고 결심했다.

황순모와 황병학은 의병을 일으키기로 했다. 이들은 1908년 목숨을 걸고 일제와 싸울 것을 다짐했다. 1908년 음력 7월 26일, 백운산(白雲山) 묵백에 200명 정도의 의병들이 모였다. 전남 동부 및 경남서부 지역에서 모여든 이들 대부분은 농민들이었다. 이 자리에서 의병모집을 주도했던 황순모는 선봉장에, 지략과 담력이 남달랐던 황병학은 의병장에 추대됐다.
 

야철로가 있던 장소

황순모는 군자금을 확보하기 위해 광양읍은 물론 인근의 구례와 하동, 순천, 여수 등을 다니며 유지들을 만나 도움을 요청했다. 이에 원당의 최진사, 골약면 중골의 정행원, 지접의 김서임, 장잣골의 유문행 등이 쌀과 현금, 무기 등을 모아 황순모에게 건넸다고 전해진다.

군자금을 확보한 황병학 의병장과 황순모 선봉장은 총을 확보하는데 심혈을 기울였다. 일제와 싸우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총이 있어야 하고 총을 다룰 줄 알아야 했다. 그래서 백운산과 지리산에서 활동하는 산포수들을 불러 모아 의병으로 참여시키기도 하고 그들의 도움을 받아 무기를 만들어냈다.
 

야철로 이정표

백운산은 산세가 험하고 골짜기가 깊어 의병들의 근거지로 알맞았다. 황병학 의병부대는 백운산 묵백 계곡의 임방골에서 훈련을 하면서 야철로(쇠를 녹이는 작은 용광로)를 만들어 직접 무기를 제작했다. 1999년 순천대박물관의 학술조사를 통해 백운산 억불봉 아래 진상면 황죽리 생쇠골과 매봉 아래 진상면 어치리 2곳에 야철로가 남아 있음이 확인됐다.
 

생쇠골 야철로 안내판

이들은 어느 정도 무장이 되자 가장 먼저 망덕포구의 일본인 어부들을 공격했다. 당시 일본인 어부들은 망덕포구와 일대 바다를 장악하고 조선 어민들에게 큰 피해를 입히고 있었다.

광양을 비롯한 여수·순천·고흥 등 전남 동부지역의 의병활동은 일본어부들을 공격대상으로 삼았다는 공통점이 있다.
 

망덕포구와 정병욱가옥. 섬진강하구 망덕포구에서 바라본 정병욱 생가. 이 집 마루 밑에 윤동주의 유고 시집이 묻혀 있었다. 1962년에 촬영 된 사진이다. /광양시 제공

일제의 적극적인 조선이주정책에 따라 옮겨온 일본어부들은 근대적인 어선과 어구를 사용해 어장을 싹쓸이하기 시작했다. 일본배가 훑고 가면 조선어부들은 건질게 없었다. 일본경찰과 헌병들의 비호를 받는 일본어부들은 안하무인이었다. 조선어부들을 무시하고 윽박질렀다. 일본어민들은 일본 헌병과 경찰의 비호아래 어장 어업권을 빼앗아가기 시작했다.

황병학의병부대가 첫 번째 공격목표로 망덕항 일본어선과 어민들을 대상으로 삼은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이었다. 광양어민들의 불만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의병들은 일본어민들의 횡포를 응징, 광양어민들의 한을 풀어주기 위해 일본어부들을 공격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망덕포구

황병학 의병부대의 기습 공격으로 망덕항 일본어민과 일본인들이 큰 피해를 입자 일본군은 곧바로 광양에 헌병분견소를 설치하고 황병학 의병부대 토벌에 나섰다. 황병학 의병부대는 상당한 타격을 입었다. 그러나 이 와중에도 광양 옥곡원의 일본군경을 공격하는 등 적극적인 항일투쟁을 전개했다.

하지만 황병학 의병장의 부상은 의병부대가 약화되는 계기가 되고 만다. 황의병장은 광양 옥곡면 뒷산 원등재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왼쪽 다리를 관통당하는 부상을 입었다. 그러자 황병학은 의병부대를 몇 개의 부대로 나눠 독자적으로 활동케 한 다음 백운산 용신암에 은신하며 다친 다리를 치료받았다.

일제는 황병학 의병부대를 토벌하는 과정에서 의병가족들에게도 온갖 폭력과 협박, 고문을 자행했다. 일제는 황병학 의병장과 황순모 선봉장의 고향마을인 진상면 비촌 마을을 찾아와 마을 전체를 불태워버렸다. 그리고 황병학ㆍ황순모의 가족들은 물론이고 마을사람들을 때리고 짓밟았다.

일제는 백운산을 무대로 해 활동하는 황병학 의병부대를 토벌하는 것이 쉽지 않자 황병학 의병장과 황순모 선봉장의 가족들을 수시로 찾아와 위협하면서 귀순을 간접적으로 종용했다. 황순모 선봉장에 대해서는 귀순하지 않을 경우 비촌마을에 살고 있는 황순모 선봉장의 늙은 부모를 잔인하게 죽이겠다고 말을 퍼뜨렸다.
 

비촌마을 황순모선생의 묘에서 선생의 생애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 손자 황부현.

그래서 황순모 선봉장은 귀순을 결심하게 됐다. 전 재산을 팔아 의병부대 군자금으로 사용하면서 일제에 맞섰지만 가족들이 참혹하게 죽어는 것을 지켜볼 수만은 없었던 것이다. 황순모 선봉장은 가족들을 살펴보기 위해 산에서 비촌마을로 내려왔다. 일본 헌병들은 황순모 선봉장이 내려오는 산길에 매복하고 있다가 황순모 선봉장을 사로잡았다. 그런 뒤 광양헌병대로 끌고 가 고문했다. 일본에 협조하고 다른 의병들의 소재를 밝히라며 때리면서 강요했다.

그러나 선생은 이에 굴하지 않았다. 비록 가족 때문에 귀순은 했지만 목숨을 걸고 함께 싸워왔던 다른 의병들을 위험에 빠뜨릴 수는 없었던 것이다. 이에 일제는 선생을 총살하기로 결정했다. 이 소식을 들은 황순모 선봉장의 친구이자 의병활동을 같이 하며 생사를 함께 할 것을 약속했던 한규순이 총살현장에 찾아왔다.

한규순은 “나는 황사중(황순모)의 부하 한규순이다. 의사(義士)라면 그만이지 장졸(將卒)의 구분이 어디 있으랴. 나도 같이 죽여라”하면서 황순모 선봉장의 몸을 끌어안았다. 일본 헌병은 황순모 선봉장을 끌어안은 한규순을 향해 사격을 했다. 두 사람은 한꺼번에 목숨을 잃었다. 1908년 10월11일의 일이었다. 황순모 선생은 36세의 나이로 그렇게 장렬하게 친구 한규순과 함께 세상을 떠났다.
 

황순모의병장묘앞에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김종년씨(우측)와 최혁주필(중앙), 후손 황부현씨.

황병학 의병장은 해산을 거부하는 의병들을 이끌고 여수의 묘도로 잠적하여 재기를 도모할 계획이었으나, 일본 군경에 발각되어 치열한 전투 끝에 많은 의병들이 희생당하였다. 일제는 1개 연대를 투입해 ‘남한대토벌 작전’을 펼치며 의병들을 무자비하게 살육했다. 살아남은 의병들은 어쩔 수 없이 1909년 후반, 대부분 해산할 수밖에 없었다. 황병학 역시 신분을 숨기고 이곳저곳을 떠돌며 재기를 노렸다.

황병학은 삼일운동을 계기로 다시 독립운동에 나섰다. 그러다 고흥에 은거 중이던 독립운동가 기산도(奇山度)와 함께 ‘임시정부 국민대회 특파위원’의 자격으로 전라도의 뜻있는 인사들을 만나 독립운동자금을 모으러 다녔다. 그 뒤 함께 평안도까지 올라갔으나 기산도는 일경에 체포되고 만다. 황병학은 압록강을 건너는데 성공, 임시정부에서 독립운동을 펼쳤다.
 

국립대전현충원에 안장돼 있는 황순모선생

황병학은 1923년 봄,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특명을 띠고 조선 땅에 잠입하려다 신의주에서 일경에 체포되고 만다. 그는 평양형무소에서 4년 동안 감옥생활을 한 뒤 고향인 비촌으로 돌아왔다. 체포된 뒤 당한 모진 취조와 고문으로 그의 몸은 망가질 대로 망가져 있었다. 결국 1931년 56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정부는 지난 1968년 건국훈장 국민장을 추서하했다. 1977년에는 진상면 비촌리에 있던 선생의 묘소를 동작동 국립묘지로 이장했다.

■부각돼야할 황순모 선봉장
 

황순모 선봉장 초상화

광양지역 의병 선양 및 추모 사업에 있어 그 중심인물은 황병학 의병장이다. 황병학 의병장과 함께 백운산과 광양 일대를 무대로 활동했던 황순모 선봉장은 상대적으로 존재감이 약화돼 있는 상태다. 이는 의병모집 및 활동초기 황순모 선봉장이 군자금을 대고, 의병들과 함께 생사를 넘나들며 일본군과 싸웠지만 가족들을 구하기 위해 산을 내려오다가 체포된 것이 귀그의 명성을 가리고 있어서이다.

일제가 가족들이 살고 있는 집과 마을을 몽땅 태워버리고 귀순하지 않으면 가족들을 모두 죽여 버리겠다고 협박하는 상황에서 황순모 선봉장이 산에서 내려가기로 한 결정은 참으로 안타까운 것이었다. 일제에 맞서 싸워야하지만 가족들이 비참하게 죽어가는 모습을 지켜볼 수는 없었던 것이다. 황순모 선봉장의 귀순결정은 가족을 위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그렇지만 앞서 지적한 대로 황순모 선봉장은 조카 황병학 의병장과 함께 망덕항 거주 일본인을 공격하고 일경과 전투를 벌이는 등 목숨을 걸고 싸웠으나 귀순했다는 점이 흠결로 작용해 광양지역 의병선양사업에 있어서 전면에 등장하지 못했던 것이 사실이다. 실제 광양읍 유림회관 앞에는 ‘의사황병학기념비’가 자리하고 있으나 황순모선봉장을 기리는 비는 없다.
 

광양유림 앞에 세워져 있는 황병학의병장 기념비

또 각종 안내문에도 광양지역 의병을 이끌었던 인물로 황병학 의병장이 적시돼 있으나 황순모 선봉장을 거론하고 있는 안내문은 거의 없다. 국가보훈처가 지난 2013년 5월 현충시설로 지정한 광양망덕 사적지도 ‘황병학의병전투지-망덕포’로 명명됐다. 황병학 의병부대가 운용될 수 있도록 각종 지원을 아끼지 않은 황순모 선봉장을 함께 기리는 배려가 필요하다.

■ 황순모 선봉장 후손 황부현씨와 비촌마을
 

황순모 선봉장의 손자 황부현씨가 수어댐 건설로 수장돼버린 예전의 비촌마을 장소를 가리키고 있다.

황순모의 호는 운정(雲亭), 자는 사중(士重)이다. 정부는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황순모 선봉장의 묘는 비촌마을에서 500여m 떨어진 곳에 있다. 도로에서 10여m 위쪽에 있는 야산에 황순모 선봉장의 묘가 자리하고 있다. 후손들은 황순모 선봉장이 순국하자 시신을 수습해 진상면 신황리에 묘소를 썼다.

이후 비촌마을 근처로 묘소를 옮겼다가 2006년 대전묘역으로 이장됐다. 지금 비촌마을 근처의 황순모 선봉장 묘는 조상의 나라사랑 큰 뜻과 기개를 기리려는 후손들이 마음이 담긴 가묘(假墓)다. 비촌마을 황순모 선봉장의 묘를 관리하고 있는 이는 손자 황부현씨다. 황부현씨는 조부의 생애가 보다 널리 알려지기를 희망하고 있다.
 

황부현씨 부부가 수어댐을 뒤로 하고 서있다.

일제가 의병 마을이라 해서 불태워버린 예전의 비촌마을은 물속에 잠겨 있다. 1974년 건설된 수어댐 때문에 수몰돼 버린 것이다. 수어댐 건설로 비촌마을 110세대와 평촌마을 80세대의 주민들이 태어나고 자란 터를 잃어버렸다.

물속에 잠긴 수어댐에는 비촌마을 주민들의 몸부림이 담겨져 있다. 가족들 앞에서 무참하게 숨져간 황순모 선봉장의 원혼과 절규가 자리하고 있다. 정들었던 집을 떠나 옆 동네로, 혹은 다른 곳으로 이사를 가야했던 비촌마을 수몰민들의 애환도 함께 스며있다.

도움말= 나종년, 김종현, 최상종, 황망기

/최혁 기자 kjchoi@hanmail.net

/정유진 기자 jin1@namdo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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