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계홍의 역사소설 깃발

충무공 정충신 장군<88>-제6장 불타는 전투

“고경명 장군이 이끄는 의병군 7천여 명이 지금 고바야카와 주력부대 후방을 치고 있습니다. 대격전을 벌이고 있습니다.”

정탐병이 달려와 권승경에게 보고했다. 이 말을 듣고 권승경이 정충신에게 명령했다.

“재 뒤쪽에 살수부대와 습사수부대를 포진시켜라. 지원 작전이다. 의병장들에게 각기 알리라.”

정충신이 능선에 포진한 황진, 정담, 김보원 의병장에게 달려가 알리고, 권율 도절제사에게 달려갔다.

“장군, 고경명 부대가 금산성에서 고바야카와 후방부대를 치고 있습니다.”

“때가 왔구나.”

권율은 비로소 자기 전략이 맞아 떨어져가고 있는 것에 속으로 흡족해했다. 정충신을 시켜 고경명에게 보낸 밀서의 전략대로 전투가 전개되고 있는 것이다. 적의 침투로 양측방을 공격하면 왜군의 전세는 분산되고, 위축된다. 왜군은 호남 병력이 지리멸렬할 것으로 업신여긴 나머지 속도전을 감행했는데, 이격이 커서 허점을 노출하고 있다. 이 사이를 뚫고 권율 부대와 고경명 부대가 양측방에서 공격해 들어가면 전과를 올릴 수 있는 것이다.

대둔산 오대산 바랑산 화암사로 이어진 연봉에서 뜻밖에 운주와 고산 주민들이 북과 꽹과리를 치고 나팔을 불며 나타났다. 숨어있던 의병군들이 죽창과 검을 하늘로 치켜들며 함성을 질렀다. 관병들은 눈에 보이지 않았다.

“씨바, 의병군보다 관군이 강하다고 어떤 새끼가 허튼 소리 한 거여? 우덜 하는 것 보라고!”

관병들은 패주하고, 도망가기에 바빴다. 직업군인인 관병들보다 의병들이 더 끈질기고 집요했다. 권율도 그 점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의 군대는 주로 의병들로 편성되었다. 급조된 병력이었지만 머리가 희끗희끗한 노년층까지 합세하니 사기가 오르고 사기가 솟았다.

진산 인근에 이른 고경명 의병군은 허약한 관군의 위세를 메우고 금산성을 에워쌌다. 금산성 안에는 고바야카와 6군단 주력 이외 1만여 병사들이 대기하고 있었다. 고경명 의병부대는 백 필의 군마도 갖추었는데, 제주도와 망운의 목동리에서 조련하던 말들을 끌고 온 것이었다.

왜군의 포병대가 갑자기 화포를 쏘아대며 고경명 기병부대를 묶어두고, 한편으로 보병부대가 성문을 박차고 뛰쳐나왔다. 전라도 방어사 곽영의 관군은 진용을 갖추지 못한 채 쉽게 무너졌다. 평지전은 전투력이 강한 왜병을 당해낼 수가 없었다. 곽영이 도망치자 관군은 지리멸렬해지고, 진지는 곧 함락되었다.

“돌격하라.”

왜의 6군 별부대(別部隊)가 창검을 앞세워 단번에 기병부대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마상에서 진두지휘하던 고경명이 편곤(鞭棍)을 휘둘러 왜 병사들을 쓰러뜨리고 적진을 종횡무진 누볐다. 용기는 하늘을 찌르되, 그러나 그는 환갑 나이의 노전사였다.

“저 군마의 발목을 부러뜨려라!”

왜군 지휘관이 명령하자 일시에 고경명의 흑갈색 군마에 집중적으로 창검이 날아왔다. 말의 옆구리와 눈에 창이 꽂혔다. 말의 울음소리가 천지를 진동하더니 그대로 고꾸라졌다. 마상의 고경명이 동시에 땅바닥에 굴러떨어졌다. 왜 병사들이 달려들어 그의 가슴을 창으로 찔렀다.

“아버지!”

왜병과 육박전을 벌이던 그의 장남 고인후가 이 광경을 보고 뛰어들었으나 그 역시 창검을 맞고 쓰러졌다.

“형님!”

이번에는 그의 동생 고종후가 뛰어들었으나 적의 화살이 그의 어깨를 관통했다. 유팽로·안영이 뛰어들어 그를 끌어냈다. 고종후의 나이 열아홉이었다.

“저 원수들을 죽여야 합니다.”

고종후가 절규했다.

“너는 부상했다. 쉬어라. 대신 우리가 나가마.”

“아니지라우. 내가 나서야지라우.”

고경명의 가솔 중 머슴 김돌쇠가 죽창을 들고 나섰다. 주인 삼부자가 의병을 일으켜 금산성에 이를 때 함께 따라나선 가솔들이었다. 마름, 머슴, 찬모, 부엌데기까지 구분이 없었다. 그들 역시 왜병의 창과 칼에 무참히 쓰러졌다. 고종후가 앞으로 뛰쳐나갔으나 유팽로가 한사코 그를 막더니, 포승줄로 묶어 후방으로 빼돌렸다.

“너마저 죽으면 아버지 제사를 누가 지낼 것이냐.”

그러나 유팽로·안영 역시 적의 칼에 목이 달아났다. 응원군으로 나선 의병장 조헌·조완기 부자가 이끈 700여 의병들과 승려 영규가 이끈 600여 승군들도 전멸했다. 부상에서 회복한 고종후는 다음해 10월 김천일과 함께 2차 진주성 싸움에 의병을 모아 출진했으나 장렬하게 전사했다.

"광주전남 지역민의 소중한 제보를 기다립니다"  기사제보
저작권자 © 남도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