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계홍의 역사소설 깃발

충무공 정충신 장군<89>-제6장 불타는 전투

먹구름이 하늘을 덮더니 장대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금방 물이 불어 이치의 계곡은 격한 급류가 되어 흘렀다. 왜군들의 조총 따위 무기들이 급류에 휩쓸려 떠내려가고 있었다. 산을 오르던 적들도 줄곧 밑으로 미끄러져 내렸다.

왜군은 보병의 후방에서 조총병과 화승병들이 총을 쏘며 지원했으나 빗물에 젖어 피식피식 불꽃이 일다 말고 총알이 발사되지 않았다. 화포도 무용지물이었다. 아군 편대에서는 굳이 방패병이 전면에 나서지 않아도 되었다.

권율은 방패병들을 후방으로 물리고 습사수와 살수, 조총수, 포수를 전면에 배치했다.

“습사수와 살수, 창병, 조총수, 포수들 모두 힘껏 당겨라!”

그와 함께 화살과 창이 일제히 적병을 향해 날아갔다. 경사면으로 기어오르는 왜병들이 화살을 맞고 수백 길 낭떠러지로 굴러 떨어졌다. 적군의 수의 위력으로 보아 전세가 불리해질 것이 염려되었으나 몰아치는 비바람과 아군의 역공에 전선은 드디어 역전의 기운이 감돌았다. 적정을 살피고 돌아온 정충신 척후사령이 권율에게 달려가 보고했다.

“장군, 적의 보병 주력이 무너지고 있습니다. 골짜기 아래 왜 병력이 비가 그치기를 기다리고 있지만 야전장, 야포장을 잃은 뒤 겁을 먹고 있습니다.”

“됐다. 이 틈을 노려서 가열차게 공격을 퍼부어야 한다. 목책과 철질려와 거마창을 던질 때가 되었다. 준비되었느냐?”

“네. 박대출 대장장이 일행이 밤을 새워 만든 철환과 마름쇠가 수천 개 됩니다. 목책들도 갖추었습니다.”

“박대출은 어디에 있느냐?”

그러나 정충신은 얼른 대답하지 못했다. 바위에 깔려죽었다는 소식을 차마 전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대신 이렇게 말했다.

“하늘이 이 땅을 지켜주고 있습니다. 조금만 더 밀어붙이면 군악병의 나팔소리가 울릴 것 같습니다. 복음의 소리입니다.”

“그렇다. 모두들 목숨을 내놓고 분투하니 하늘도 돕는 것이다. 전심전력을 다하면 운도 따르는 법이다. 목책과 철질려, 철환을 몽땅 쏟도록 해라.” 정충신이 목책이 세워진 쪽으로 가니 잡병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목책을 내리고, 철질려를 던져라!”

그는 나이답지 않게 포효하듯 명령했다. 잡병들은 정충신에게 며칠 훈련받은 농사꾼들이었다. 겹겹이 묶인 목책들이 차례로 골짜기로 굴러 떨어지자 경사면에 붙어있는 왜병들이 목책에 부딪쳐 천길 낭떠러지로 나가떨어졌다. 으아악! 으아악! 하는 비명소리가 빗소리에 먹혔지만, 일부는 건너편 산에 부딪쳐 메아리가 되어 돌아왔다.

“저 새끼들 한방 쌔래붕개 면도로 머리 밀어버리댁기 뭉개져버리고마이. 이런 것 보는 것도 모처럼만에 재미지고 오지다야. 에라이 개새끼덜 다 디져부러라.”

잡병이 거마창을 밑으로 냅다 집어던지니 또다시 십여 명의 왜병이 거마창에 부딪쳐 굴러떨어졌다. 건너편 골짜기에서는 집채만한 바위들이 연신 굴러내리는데 왜병들이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깔려죽거나 머리가 박살이 났다. 계곡의 급류에는 벌써 왜병들의 시체가 수도 없이 둥둥 떠가고 있었다. 어느 순간 왜병들이 후퇴하기 시작했다.

“모든 병력은 골짜기 밖으로 물러나라.”

날씨까지 장애가 되니 고바야카와 다카카게 6군단은 철수를 단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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