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무공 정충신 장군<90>-제6장 불타는 전투
왜군들이 물러나자 햇빛이 나기 시작했다. 이상한 자연의 조화였다. 햇살은 숲의 잎들에서 반짝거렸다. 빗물 머금은 숲을 헤치고 병사들이 권율의 군영지로 “와 ~” 함성을 지르며 몰려들었다. 산의 능선 이곳 저곳에서 북소리와 함께 승리의 나팔이 울렸다. 입산한 마을의 주민들도 젖은 옷을 짜내며 찾아들었다. 그중에는 치마에 핏물이 든 아낙도 있었고, 깨진 머리를 동여맨 젊은이도 있었으나 모두들 만면에 웃음을 짓고 있었다.
“이런 일도 있고만이라이. 살다 봉개 우덜이 이기는 일도 있어라우!”
“장하다.”
이들을 보고 권율이 격려했다. 그때 권승경 부전장이 달려와 다급하게 보고했다.
“고경명 의병부대가 전멸했다고 합니다.”
“그럴 것이다.” 권율이 이미 알고 있다는 듯이 조카의 보고를 받아들였다. “거룩한 죽음이다. 고 장군의 협공이 아니었다면 우리가 당했을 것이다. 고경명 의병군이 6군단 주력을 묶어두었기 때문에 우리가 수월하게 전쟁을 치렀다. 그러니 이건 우리 승리라기보다 고 장군의 승리다.”
“그렇습니다. 장한 일입니다.”
“그것만이 아니다. 웅치전에서 싸운 정담, 변응정, 이복남, 황박 장군의 힘도 컸다.”
그들이 안코쿠지 군이 진안을 거쳐 웅치를 넘어 전주성으로 들어가는 길목을 지키지 않았더라면 더큰 낭패를 보았을 것이라고 권율은 생각했다. 그래서 이치전의 승리는 웅치전투의 영웅들에게도 돌아가야 한다고 믿었다. 권율이 말을 이었다.
“이곳을 지켰으니 전세 역전의 불씨가 살아날 것이다. 다른 지역의 패배를 만회할 것이다.”
그러면서 권율은 그간 연전연패하던 조선군의 전황을 헤아려보았다. 한마디로 수치스럽고 망신스러웠다. 1592년 4월 14일 고니시 유키나가 1군단이 부산진을 함락한 이래 15일 동래성, 18일 밀양성 함락, 19일 구로다 3군단이 김해성을 함락하고, 21일 가토 기요마사 2군단이 경주성을 함락했다. 고니시 부대가 다시 상주성·문경·탄금대를 함락했다. 구로다 군은 추풍령, 가토군은 한강, 임진강으로 진격했다. 6월 5일엔 왜의 수군들이 용인을 함락시켰고, 4-5군단은 강원 화양성, 경상도 무계, 철령, 왕성탄을 함락했다. 경북 예천, 경기 마탄, 강원 금화, 전라 운암, 경상 초계에 이어 승병장 안코쿠지 부대가 7월 8일과 10일 사이 전라도 웅치에서 승리를 거두고 남진했다. 50전 50패나 다름없었다.
그런데 육전(陸戰)에서 단 하나 승리를 거둔 전쟁이 있었으니 바로 이치전투다. 권율 고경명 황진 권승경, 정충신과 관·의병 및 진산·완주·진안·장수 백성들이 뭉친 관·의병 혼성부대가 유일하게 1만5천여 고바야카와 6군단 병력을 패퇴시킨 것이다.
이 소식을 알리기 위해 권율은 광주 관아로 돌아와 장계를 작성해 정충신 밀사 손에 들려서 의주로 보낸 것이다. 지금 임금이 압록강을 건너면 조선은 없어진다. 다행히 전라도가 지키고 있으니 나라를 지킬 근간이 될 것이다. 그러니 도망가지 말라. 장계엔 이런 내용이 담겨있었다.
김경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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