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계홍의 역사소설 깃발

충무공 정충신 장군<91>-제7장 비겁한 군주

왜의 고니시 유키나가 제1군단은 침략군의 선봉대가 되어 부산포-밀양-대구-상주-문경-한양을 거쳐 서북 육로를 진격해 의주로 몽진(蒙塵)한 선조의 뒤를 쫓아 평양성에 이르렀다. 가토 기요마사가 이끄는 제2군단은 부산포-울산-영천을 거쳐 회령까지 피난 간 선조의 두 아들 순화군과 임해군을 붙잡기 위해 함경도로 진격했다. 구로다와 시마즈의 3군단은 부산포-진해-추풍령-한양을 거쳐 황주와 개성에 포진했다.

왜군은 가는 곳마다 연전연승을 거듭했다. 조선 관병들은 도망가기에 바빴다. 장수들은 작전개념이라는 것이 없었으니 전투에 나서면 병사들을 곧바로 죽음으로 내몰고 마는 꼴이었다. 이러니 병졸들은 개죽음을 피하려고 도망가고 보는데, 그중에는 왜군 앞잡이로 변신해 활약하는 자도 나타났다.

추풍령 영동 김천 봉산 일원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관·의병이 전멸했다. 군사적으로 중요한 요충지인 추풍령에서 의병장 장지현이 의병 2천을 이끌고 왜군 2만 명을 맞아 전투를 벌였으나 아군의 진지를 첩자들이 왜에게 밀고한 바람에 소탕되고 말았다.

왜란이 터지자 조정은 다급한 나머지 각 지방의 수령들을 장수로 임명해 전선에 투입했으나, 이들은 사서삼경을 옆구리에 끼고 주구장창 문장만 외는 사람들이었으니 철환이 무엇이고, 마름쇠, 거마창, 진천뢰 따위가 무엇에 쓰는 지도 잘 몰랐다. 갑옷을 갖춰 입고 투구만 썼지 행동은 꼭 철 지난 들판의 허수아비 꼴이었다.

왜군이 볼 때 도대체 군대랄 것이 없었다. 장수든 병졸이든 하나같이 숨거나 도망가니 맥이 빠질 지경이었다. 싸우지 않고도 이기는데, 그중 일부 백성들은 왜군의 앞잡이가 되어 동족의 목을 잘라 왜장에게 바치기까지 하는 것이다. 두상 하나에 엽전 쉰 냥이라는 말이 유포될 정도였다. 세상에 이런 웃기는 전쟁도 있었다. 부산포 동래포 가덕도 거제도 사천 일대는 벌써 왜의 점령지가 되어 왜군의 씨를 밴 아낙들도 많이 나타났다.

왜군의 조선 정벌 중 유일하게 육전에서 패배한 고바야카와 다카카게 6군단은 패잔병을 수습해 한양으로 진격했다. 다른 부대보다 먼저 의주에 당도해 조선왕의 목을 따는 것으로 이치전 패배를 만회할 요량이었다.

그러나 그것도 고니시 유키나가 군대와 가토 기요마사 군단에게 선수를 빼앗겼다. 고니시와 가토 군단은 거의 동시에 피 한방울 흘리지 않고 동대문과 남대문에 입성했는데, 왕이 도망갔다는 소식을 듣고 낙심천만이었다. 조선 왕이 평양성으로 피신했다는 말을 듣고 서로 먼저 치겠다고 나서다가 결국 제비뽑기로 결정하기로 했다. 두 사람은 한치 양보 없는 경쟁자였다. 고니시가 제비뽑기에 이기고, 대신 가토는 임해군과 순화군 두 왕자가 숨은 함경도로 진격하기로 계획을 바꾸었다.

이 북상 대오에 고바야카와 6군단도 합류했다. 그와 함께 정충신도 장계를 꾸려서 북행길에 올랐다. 서찰을 잘게 잘라 꼬아서 망으로 삼으니 감쪽같이 숨길 수 있었지만, 가는 곳마다 왜 군대와 맞닥뜨렸다. 그들은 재물 약탈과 부녀자 강간으로 한창 재미를 붙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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