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진 병영상인, 지혜와 이재로 600년 세월을 풍미하다

최혁 주필의 전라도역사이야기
43. 강진 병영과 병영상인
강진 병영상인, 지혜와 이재로 600년 세월을 풍미하다
<理財>

북은 개성상인, 남은 병영상인(北松商南兵商)
조선 최고의 장사기술을 지녔던 병영상인들
병영성 군사들 상대로 장사하던 상인들 후예
병영성 폐성 후 전국각지로 흩어져 상권장악
고춧가루 먹고 천길 물속 달리던 진정한 상인
도전과 신용, 상생, 근검절약·겸손이 성공 원인
박성수 원장 등 연구로 병영상인 존재 부각돼
주희춘, 병영상인 활동상 소개에 뜨거운 열정
 

홍교에서 바라본 병영성과 수인산

■병영상인의 출현

전남 강진 병영. 기자는 일찍이 병영을 ‘남도의 보물’이라 칭한 적이 있다. 하멜기념관이 들어서기 전까지만 해도 사람들은 병영이라는 곳을 잘 몰랐다. 강진이 ‘남도답사 1번지’로 각광을 받을 때도 병영에는 발길이 뜸했다. 강진 영랑생가와 다산초당으로 가는 길에서 반대편으로 비켜있었기 때문이다.

그나마 병영에 인적이 끊이지 않은 것은 연탄불고기로 유명한 S식당이 자리하고 있기 때문이다. 돼지불고기를 비롯 산과 들, 바다에서 난 남도반찬이 한상 가득 펼쳐지지만 밥값은 1만원이 되지 않는다. 식당에 처음 온 사람들은 반찬가지 수에 놀라고 싼 가격에 놀란다. 그 다음에는 불고기 맛과 반찬 맛에 놀란다.

그 덕에 병영에는 사람 발길이 그럭저럭 끊기 지 않고 있다. 주말이면 제법 사람들이 몰려온다. 관광버스를 타고 온 사람들이 왁자하니 하멜기념관에 들려 사진을 찍으면서 법석을 떤다. 하멜기념관 건너편으로 보기 드문 성곽이 보이지만 관광객들은 별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 무슨 성이 있나보다~그냥 그런 표정이다.
 

병영성에서 바라본 병영면 소재지

기자가 병영을 남도의 보물이라 말한 것은 관광객들이 무심코 지나치는 ‘그 성(城)’이 병영에 있기 때문이다. 병영에 있는 성. 병영성은 남도의 장구한 역사를 품고 있는 보배다. 병영성을 중심으로 해 펼쳐지는 시대별 역사적 사실은 우리역사의 전개를 보여주는 축약본이기도 하다. 병영성의 개설과 폐성의 배경 역시 마찬가지다.

병영성은 말 그대로 군사가 모여 있는 성이다. 자연 사람이 많이 있었다. 성을 쌓을 때 사람들이 모여들었고 성을 쌓은 후에는 더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성 밖의 사람들은 성안의 군사들이 필요한 물건을 댔고, 성안의 군사들은 막대한 재정을 감당하기 위해 병사의 신분으로 공개적으로 타 지역과 무역을 했다.

병영에 사는 사람들은 백성이든 군사든, 거래에 밝았다. 어쩌면 병영 쪽 사람들의 원형질(DNA)에는 동북아해상을 주름잡으며 해상왕국을 건설했던 장보고 후예들의 상인기질이 가득 차 있었기 때문에, 유독 이재(理財)에 능했는지도 모른다.
 

병영성에서 바라본 병영면소재

구한말, 격랑의 세월이 병영성을 덮쳤다. 1894년 동학농민군이 병영성을 함락시켰다. 관아와 병영의 민가들은 거의 대부분이 불에 타버렸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그 다음해 병영성은 폐성이 돼버렸다. 그 많던 군사들은 흩어져버렸다. 병영성을 의지해 생계를 이어갔던 상인들도 하루아침에 막막한 신세가 돼버렸다.

군사들은 고향을 찾아, 상인들은 살길을 찾아 전국으로 흩어졌다. 장사에 밝았던 병영군사들과 상인들은 곧 자리를 잡았다. 신용과 정직을 최고의 밑천으로 삼은 병영출신 상인들은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그리고 병영거상(兵營巨商)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병영성의 몰락은 역설적으로 병영상인을 출현시킨 것이다.

■주희춘과 병영상인 연구
 

주희춘 강진일보 대표기자

강진에서 강진일보 편집국장을 하면서 활발한 저술활동을 하고 있는 주희춘은 <병영상인의 상인정신 연구>로 2017년 전남대학교 경영학과 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주희춘은 박사학위 내용을 좀 더 쉽게 풀어내 <병영상인, 경영을 말하다-위대한 병영상인의 상인정신>이라는 책자로 펴냈다.

주희춘은 병영상인과 관련된 논문과 책에서 박성수교수와 심덕섭교수로부터 많은 지도를 받았다는 사실을 밝히면서 향토사학자를 비롯한 여러 연구자들의 견해를 소개하고 있다. 연구자들의 공통적인 의견은 병영상인은 조선시대 전라병영의 설치와 함께 두각을 드러낸 상인들이라는 것이다.
 

강진읍 전경

논문을 통해 병영상인을 학계에 처음으로 알린 인물은 전남대교수를 역임한 뒤 광주전남연구원장으로 있는 박성수다. 박 원장은 2010년 5월 한국경영사학회 춘계학술대회에서 <강진 병영상인 형성에 대한 고찰>이라는 논문을 발표했다. 박 원장은 이 논문에서 ‘북송상(北松商)남병상(南兵商)’으로 불리는 병영상인을 소개하고 형성과정을 설명했다.

북송상은 황해도 개성지역에서 발달한 전통 상인들을 의미한다. 북송상은 조선시대 한강 이북 지역을 주름잡았다. 남병상은 앞에서 밝힌 대로 전라병영이 있던 강진지역에서 세력이 커진 상인들이다. 조선의 남쪽상권을 휩쓸었다. 병영상인은 달리 병상(兵商)이라고도 하는데 전라병영성이라는 군사시설을 무대로 해 활동하는 상인이었기 때문이다.

주희춘 국장은 선행연구자들의 견해를 따라 병영상인의 태동시기를 통일신라시대 828년 장보고가 청해진을 설치한 때로 보고 있다. 청해진 일대에서 활동했던 상인의 후예들은 고려시대 고려청자 생산과 유통을 담당했으며 또 그 후예들은 조선시대 전라병영이 설치되면서 상인으로서 만개(滿開)했다는 것이다.
 

주희춘국장이 지은 책. 장사의 기술과 병영상인 경영을 말하다

병영상인들은 500여 년 동안 전라병영을 무대로 활동하다가 병영성이 폐성된 후 일제강점기와 광복, 근현대화 과정을 거치면서 120여년이 넘게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주희춘은 병영상인의 대표적 인물로 구한말 강진일대에서 큰 한약재상을 한 강재 박기현과 일제강점기 대부호였던 김충식을 들고 있다.

또 아남그룹 창업자 김향수와 대선제분 창업주 박세정, 동원그룹 김재철 회장 등을 병영상인의 맥을 잇고 있는 강진 출신 기업가로 분류하고 있다. 주희춘은 이외에도 중소기업을 운영하고 있는 병영상인 20여명을 인터뷰해 그들의 공통점을 찾아내 ‘4가지 병영상인의 특징’을 추려내기도 했다.

주희춘이 요약하고 있는 병영상인 정신은 도전정신(Challenge)과 신용제일주의(Credibility), 상생주의(Win-Win), 근검절약과 겸손(Saving & Humility)등 4가지다. 도전과 신용, 상생, 근검절약·겸손은 오늘날 기업인들에게 절대적으로 필요한 정신이자 태도다. 주희춘은 병영상인들이 이런 정신으로 밑바닥에서 출발해 최고의 기업을 일궈냈다고 밝히고 있다.

초창기 병영상인에 대한 연구는 강진 지역 향토사학자들을 중심으로 이뤄졌다. 1984년 발간된 <병영양로당지>에는 병영상인이 어떻게 생겨났는지에 대한 향토사학자들의 견해가 다음과 같이 적혀있다.

‘병영이 설치된 이후 서울의 양반가문 출신의 대소 관헌들이 부임했으며 이것이 인연이 되어 서울의 선비들이 병영으로 많이 내려와 정착했다. 또 병영의 상류계급이 병영성의 업무에 참여했으며 서민들은 병영의 소요 물자를 조달하기 위해 자연적으로 상인이 되었다. 이 상인들이 전국 각지를 누비면서 인사 교류는 물론 물자가 유통되어 이 고장의 문화와 경제는 다른 곳보다 훨씬 선진의 길을 걷게 되었다’
 

60년대 강진시장풍경

또 병영의 향토사학자인 김흥연은 그의 <진실한 삶을 위하여>라는 자서전에서 병영상인의 태동에 대해 이렇게 기술하고 있다.

‘병영의 상업은 1417년 전라도 병마절도사영이 설치되면서 발전하기 시작했다. 병영에 갑자기 큰 성을 쌓느라 수년간에 걸쳐 수천 명이 징용되어 사람들이 모여들면서 이들의 생필품을 지원하기 위한 상교역이 이루어졌다’

병영상인들은 1895년 병영성이 폐성되면서 위기를 맞았다. 물건을 댈 곳도, 사줄 사람도 없어져버린 것이다. 박성수 원장은 지난 2011년 4월 병영면사무소에서 열린 ‘전설의 보부상 강진병영상인 학술대회’에서 병영상인들의 일제강점기와 광복 이후 활동영역 확장에 대해 다음과 같이 밝혔다.

‘병영의 상업은 전라도 병마절도사영이 폐영되면서 침체기를 맞았지만 오랜 세월동안 상인정신을 축적한 병영상인들이 다시 재기에 나서면서 북쪽으로는 속초에서 인천, 서울, 군산, 목포, 부산, 광주 등까지 진출했고 강진 주변은 고흥, 벌교, 보성, 장흥, 해남, 완도 등으로 진출하여 그곳 상권을 장악했다’

■ 병영성의 역사
 

병영성 지도

병마절도사영은 원래 지금의 광주광역시에 자리하고 있었다. 광산 현 일대(현재의 광주광역시 광산구 송정동 고내상)에 설치돼 있었으나 1417년 도강 현(강진군의 전신)의 치소자리로 옮겨졌다. 조선이 태종 때 광산 현에 설치한 병영을 불과 몇 년 뒤에 도강 현으로 옮긴 것은 왜구의 침입을 효과적으로 막기 위해서였다.

<강진군지>와 <조선환여승람>에 따르면 초대 병마도절제사 마천목(馬天牧)장군이 부임 후 성을 쌓았다. 마천목은 장흥 출신으로 할아버지 마치원(馬致遠)이 장흥 수령성을 축조했으며 아버지 마영(馬榮)도 왜구를 물리치기 위해 싸운 장수로 알려졌다. 마천목은 꿈속에서 본 눈이 녹은 자취를 따라 성을 지었다고 전해진다. 그래서 병영성은 설성(雪城)이라고도 불렸다.

병영성은 맨 처음에는 둘레 561보의 규모로 세워졌으나 <세종실록지리지> 이후의 기록들에서는 2천820척(尺)으로 나와 있다. 조선 초기에 1척은 지금의 32.21㎝ 길이였다. 따라서 병영성의 둘레는 900여m 정도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병영은 1599년(선조 32)에 장흥(長興)으로 옮겨졌으나 1604년 다시 도강현으로 원위치 됐다.

2012년 발행된 <강진군지> 2권에는 반도의 최남단 해변 가인 강진 땅 병영에 전라도의 군수권을 지휘하던 병영이 설치된 까닭이 다음과 같이 나와 있다.

‘병영이 설치되기 이전에 이곳이 주목받게 된 것은 수인산성과 연관된다고 보인다. <동국여지승람>의 기사 중에 수인산성에서 왜구의 침입을 피했다는 기록이 보이고 있다. 수인산성의 존재와 함께 병영지역이 전라도의 육군지휘부가 될 수 있었던 더욱 중요한 이유는 그 지리적 여건 탓이었다. 즉 강진 병영은 반도의 최남단으로 바다로 통하는 길목에 위치하여 왜국의 출몰에 신속히 대처할 만한 지점에 군사를 숨겨둘 수 있었기 때문이다. 더욱이 당시의 연해지역에 계속 설치되고 있었던 수군진영(만호진성)들과 힘을 합쳐 외적을 물리칠 수 있는 조건도 유리하였던 것이다’
 

1872년 강진현 지방도 중 병영성

병영성은 1555년(명종 10)에 일어난 을묘왜변(乙卯倭變)때 왜구에 함락된다. 70여척의 배를 타고 온 왜구 6천여 명은 해남의 달량진(達梁津:지금의 북평면 남창)과 이진포(梨津浦:북평면 이진)에 상륙해 달량진성을 공격했다. 급보를 받은 전라병사 원적(元績)은 강진 병영성의 군사를 이끌고 달량진성으로 급히 출동했다.

그러나 달량진성은 무너지고 말았다. 전라병사 원적도 목숨을 잃었다. 전라도 지역의 조선군사 주력부대를 무너뜨린 왜구들은 거침이 없었다. 내륙으로 깊이 들어와 본격적으로 노략질을 시작했다. 전라병사 원적이 전사하자 조선조정은 유사를 전라병사로 임명하고 급파했다. 또 장흥부사에는 벽사찰방이었던 이수남(李壽男)을 임시 장흥부사로 임명해 왜구들의 공격에 대비토록 했다

그러나 병영성은 주력병력이 달량진성 싸움에서 패한 뒤 사실상 전투부대로서의 기능을 상실한 상태였다. 왜구들이 병영성을 공격하자 새로 부임한 전라병사 유사는 성을 버리고 도망쳤다. 임시 장흥부사 이수남도 뺑소니를 쳤다. 5월 21일 병영성은 ‘함락’됐다. 그 다음 날인 5월 22일에는 장흥성(長寧城)도 함락됐다. 5월 26일에는 강진읍성이 무너졌다.

그렇지만 실상은 ‘함락’이라고 표현하기가 부끄러운 상황이었다. 성을 지키던 전라병사와 장흥부사가 모두 줄행랑을 쳤으니 누가 성을 지킬 리 만무였다. 명종실록(권 18권 10년 26일자)에 따르면 왜구들은 텅 비어있는 성에 유유히 들어와 식량과 무기들을 챙겨간 것으로 나타나있다.

기록은 다음과 같다.

“병영 가장(假裝:임시로 임명한 병사)유사와 장흥 가관(假官:임시 부사) 이수남이 성을 버리고 도망가자 왜적들이 마침내 군량과 병기를 모두 가져갔다. 당초에 관찰사 김주(金澍)가 전 부사 유사를 가장으로 삼아 병영을 지키도록 하고 벽사찰방 이수남을 가관으로 삼아 장흥을 지키도록 한 것인데 모두 먼저 도망간 것이다.

5월 21일에 왜적 50여명이 단지 칼과 창만 들고 병영에 들어와 병기와 잡물을 모두 뒤져가고 찐쌀 700여석도 실어갔다. 왜구들이 병영성을 불태웠다. 22일에는 왜구들이 장흥부에 난입해 성안에 있는 곡식과 값나가는 물건들을 모두 빼앗아갔다”

을묘왜란 때 불태워진 병영성은 후임 병사 남치근에 의해 재건됐다. 그러나 화재가 발생해 모두 불에 타버리고 만다. 조선 조정은 병영성을 다시 복구하는데 양응정이 지은 <병영중수기>에 따르면 1천800여명의 인원이 동원돼 모두 96칸의 건물이 세워졌다. 병영성은 1894년 동학농민혁명 당시 다시 불태워지고 1895년 결국 폐성(廢城)이 되고 만다.

■동학농민혁명과 병영성

동학농민혁명 당시였던 1894년 음력 12월 4일과 5일 장흥에 집결한 장흥과 보성, 강진, 해남, 고흥 일대농민군들은 벽사역과 장녕성(장흥)을 함락시켰다. 6일 농민군은 장흥과 강진병영 접경지역인 사인정(舍人亭 : 현 장흥읍 송암리) 앞들에 모여 점심을 먹은 뒤 저녁 무렵에 강진으로 출발했다.

농민군은 2개부대로 갈라졌다. 1개 부대는 강진으로 향했다. 나머지 1개 부대는 동학도 탄압의 근거지였던 병영성을 무너뜨리기 위해 병영으로 진격했다. 1만여 명의 동학농민군은 7일 아침 안개를 이용해 강진읍성 아래로 접근했다.

강진현감 이규하(李奎夏)는 구원을 요청하러 간다는 핑계를 대고 6일 새벽에 이미 나주로 달아나고 없었다. 농민군들이 함성을 지르며 포를 쏘아대자 강진읍성을 지키던 대부분의 수성군과 백성들은 무기를 버리고 도망을 쳤다. 그러나 수성군 일부는 농민군에 맞서 장렬히 싸웠다.

민보군 지휘자로 활약하던 오남(吾南) 김한섭(金漢燮)과 강진관아의 아전, 수성군 등 수많은 사람들이 죽고 관아와 민가가 불에 탔다. 12월 8일 강진읍성을 함락시킨 동학농민군은 9일 풀치재를 넘어 작천 관내로 들어왔다. 군자리 앞 강변 모래밭에 진을 치고 하룻밤을 보냈다.

군자리에서 하룻밤을 보낸 농민군은 장흥에서 올라와 있던 농민군과 합류한 뒤 10일 새벽에 병영성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병영성은 전라병마절도사가 있는 곳이라 성이 단단하고 그런대로 군사도 많았다. 농민군의 공격에 대비해 성주위에 목책을 단단히 설치하는 등 수비태세도 갖춘 상태였다.

그러나 병영성은 순식간에 무너지고 말았다. 농민군들이 병영성 동쪽의 세 봉우리(옥녀봉·성자산·성락산)를 점령하고 포격을 해대니 성안은 순식간에 아비규환으로 변해버렸다. 성안의 백성들이 앞 다퉈 성 밖으로 빠져나오자 병사(兵使) 서병무(徐丙懋)도 패랭이를 쓰고 백성들 틈에 끼어 영암으로 달아났다.

성을 지키던 지휘관이 도망가자 수성군은 무기를 버리고 앞 다퉈 줄행랑을 쳤다. 농민군들은 목책에 불을 질러 무너뜨린 뒤 일제히 함성을 지르며 성안으로 들어왔다. 그러나 일부 군관과 군졸들은 농민군에 맞서 싸우다 장렬히 순국했다. 이 과정에서 병영성내 관아건물과 성 밖의 민가가 모두 불에 탔다. 1555년 왜구에 의해 초토화됐던 병영성이 339년만인 1894년에는 농민군에 의해 다시 폐허가 돼버린 것이다.

■ 전라도 병영성에 물자가 몰려든 이유
 

병영성

전라병영에 소속된 군인의 수는 대략 1만 명이었다. 군사들은 전라도 53주6진에 살고 있던 장정들이었다. 각 고장에서 징발된 이들은 병영에 들어와 군역(軍役)을 마친 뒤 다시 집으로 돌아갔다. 그런데 병영에 군역을 들어온 사람들은 자신들이 사용할 물품들을 직접 가져와야 했다. 거기다 세금으로 바칠 무명베와 쌀까지 지참해야 했다.

당시의 전라도는 지금의 전북지역과 제주지역을 포함하고 있었다. 멀리서 온 장정들이 쌀과 무명베, 그리고 자신들이 쓸 물품까지를 지고 오지는 않았을 것이다. 돈을 가지고 와서 병영성 주변에서 구입했을 가능성이 크다. 병영성 일대에는 군역 온 장정들이 구입할 각종 물건들을 파는 상가들이 즐비했을 것으로 여겨진다.

하멜이 남긴 기록에는 병영성 군사들이 각종 장비와 소모품을 직접 조달했던 내용이 보인다. <하멜표류기>에는 이런 기록이 있다.

‘조선의 군사들은 자기부담으로 50발의 총알과 화약을 소지해야 한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당시 병영에 일본인들이 장사를 하는 왜관(倭館)이 있었다는 사실이다. <하멜표류기>에는 하멜일행 중 한 사람이 열병을 앓게 되자 전라병사가 즉각 하멜일행에게 ‘성안으로 들어가지 말 것이며 일본인 거주지로 가는 것도 피하라’고 말했다는 내용이 있다. 이 기록대로라면 병영은 일본인들까지 들어와 상업 활동을 하던 국제 무역장이었다.

병영에서는 일반 상인들만이 물건을 사고팔았던 것이 아니었다. 당시 조선은 각 군영에서 자체적으로 군자금을 조달하는 경우가 많았다. 조선왕조는 병영유지에 필요한 자금을 충당하기 위한 군사들의 상업 활동을 어느 정도 허용하고 있었다. 자연 군사들은 다른 지역과의 무역을 벌여 이윤을 남겼다.
 

병영성내에 있었던 초등학교건물

병영성은 베를 이용해 철을 수입하기도 했으며 대마도에서 조총을 수입하기 위해 부산으로 조총대금을 수송하기도 했다. 전라도를 비롯한 조선 각지의 관청도 특산품 판매활동을 했다. 이런 판국이었으니 1만 명이 넘는 군사가 있었던 병영은 각종 물자가 흘러넘쳤다. 병영성에 세금으로 바쳐진 베와 쌀. 땔감, 약재, 종이 등은 병영상인을 통해 전국으로 유통됐다.

병영성의 상인들이 활발하게 상업 활동을 할 수 있었던 또 다른 이유 두 가지는 병영에 돈을 만들던 주전소(鑄錢所)가 있었으며, 사업자금을 병영에서 대부받아 사용할 수 있었다는 점이다. 세종 6년(1424년) 백환이라는 사람이 세종임금에게 주전의 필요성을 상소했다. 백환은 주전을 담당할 인력으로 군인들을 지목했다.

세종은 이 건의를 받아들여 전라병영과 경상도 통제영에 돈을 만드는 기관을 설치했다. 화폐를 사용하는 것은 물건의 대량유통과 신속한 물류 이동을 가능케 한다. 병영상인들은 화폐를 이용해 더 많은 돈을 모았을 것이다. 돈이 부족하면 병영성에서 빌릴 수 있었으니 병영은 장사하기가 매우 좋은 지역이었다.
 

병영극장

 

 

그런데 1895년 병영성이 폐영돼 버렸다. 병영성이 생긴지 478년만의 일이었다. 1894년 동학농민항쟁 당시 병영성은 큰 피해를 입었다. 병영성 건물은 모두 불타버리고 성 주변 민가도 3천~5천 가구가 잿더미로 변해버렸다. 이런 상황에서 병영성까지 없어져버렸으니 병영은 졸지에 인적이 끊긴 고장이 돼버렸다.

동학농민항쟁 과정에서 살아남은 군사들은 병영성이 없어짐에 따라 먹고 살길이 없어져 버렸다. 성 일대에서 장사를 하던 이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이들은 호황을 누리던 병영성 시절 몸에 익혔던 장사기술과 수완을 밑천으로 해 타지로 나가 장사를 시작하게 됐다. 일제강점기와 광복 후 병영상인들이 상권을 장악하게 된 계기가 된 것이다.

■ 병영상인의 600년 장사의 비밀

주희춘은 그의 책 <장사의 기술>에서 병영상인들이 성공한 이유로 두 가지를 들고 있다. 하나는 지리적 환경의 이점을 살린 것이고, 다른 하나는 병영상인들의 남다른 ‘밑바닥 정신’이 그들을 성공으로 이끌었다는 것이다.

청해진은 조선시대 후기까지 강진현에 소속돼 있던 곳이었다. 장보고는 청해진이 중국과 일본의 중간지점에 있다는 지리적 이점을 최대한 살려 중계무역으로 부를 축적했다. 장보고 후예들의 상업적 감각을 그대로 물려받은 병영상인들 역시 병영성 설치를 기회로 삼아 장사꾼 기질을 유감없이 발휘했다.

주희춘은 병영상인들의 ‘밑바닥 정신’을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다.

‘병영상인이 성공할 수 있었던 까닭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무엇보다 전라도 병마절도사영 설치라는 시대적 상황과 이어 그들이 최대한 장사 기지를 발휘해 전국적으로 다양한 판매망과 상품 수급망을 구축한 점. 어떤 고난도 이겨내는 그들의 밑바닥 정신 등을 꼽을 수 있다. 오래전부터 병영사람들은 성냥이나 담배, 라이터돌과 같은 작은 상품을 팔면서 밑바닥부터 장사를 배워왔다. 아주 작은 것부터 팔면서 물건을 취급하고 또 손님을 상대하는 장사수완을 체득한 것이다. 객지에서 상업을 하려면 6~7년은 버텨야 한다는 말이 있다. 대부분의 상인들은 이 기간을 감내하지 못하고 포기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병영사람들은 밑바닥부터 줄곧 고생해 왔기에, 이를 악문 채 버텨내고 전국의 시장 상권을 장악할 수 있었다. 병영 사람들은 전국 어디서 장사를 하던지 실패하는 사람들이 없다시피 했다’

도움말= 주희춘

사진제공= 위직량, 최창회, 주희춘

/최혁 기자 kjchoi@hanmail.net

/정유진 기자 jin1@namdo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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