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계홍의 역사소설 깃발

충무공 정충신 장군<93>-제7장 비겁한 군주

“광화문 앞 형조와 장례원에 들어가서 노비문서를 끌어내 찢고 불태워도 노비 꼴을 못면하는군.”

“지금은 죄다 거렁뱅이에 노비 신센데 그걸 태워서 뭐해? 사대부 자제들이라고 해서 별게 있나? 낙오되니 나도 이렇게 되잖아.”

여자 목소리였다. 머리가 산발한데다 때가 전 흙투성이 옷을 입어서 외관상으로는 남녀 구분이 안되었다. 그녀는 윤원형이 사랑한 정난정의 막내딸이라고 우기다가 정철, 윤두수, 황혁, 이양원, 이산해 등 닥치는대로 이름을 대며 그들의 딸이라고 히히덕거리는 반은 미친 여자였다. 때로는 승려 보우와 정난정 사이에서 태어난 종자라고도 했다. 절간에서 한동안 자랐다고 해서 그렇게 볼 수도 있었고, 곧잘 염불도 외었는데, 그러고 보니 그런 것도 같다고 했으나 그녀가 그렇게 말한다고 해서 틀렸다고 말할 것도 없었고, 맞다고 믿는 사람도 없었다. 다만 그녀를 찬찬히 뜯어보면 콧날이 선명하고 입술이 앵두처럼 오도독하니 앙징맞은 이목구비가 분명한 여자였다. 나이는 이십이 훨씬 넘어보였으나 하는 꼬라지는 영락없는 광녀였다.

그들은 거리에서 어찌어찌 만나 부부도 아니고, 남매도 아니고, 그렇다고 동지도 아닌 상태로 임금님이 사라진 한양을 떠돌며 자유롭게 살고 있었다. 이런 세상도 다 있다는 것을 느끼고 두 사람은 그날그날을 히히덕거리며 그들 행색만큼이나 지저분한 거리를 쏘다니다 지금 남산의 소나무 밑에 자리잡고 앉아있는 것이다. 그들은 상전도, 포졸의 육모방망이도, 순라꾼의 위협도, 지엄한 나라의 임금 행차 때마다 무릎 꿇고 엎드릴 일도 사라진 자유만개의 나날을 사는 형국이었다. 넘어지건 깨지건, 아무데서나 나자빠지건 나무라는 사람이 없었다. 자유롭게 만나 나눠먹고, 좁살이나 생쌀을 훔쳐서 씹으며 지내는 것은 흡사 지상낙원 같았다. 무정부 상태가 이렇게 좋은 점도 있었다. 남자가 여자를 끌어안았다. 여자의 배는 제법 불러있었다.

“조정 신료 딸이라고 별게 있나? 첩의 딸은 이렇게 버림받고, 이건 누구 씨야?”

“임금은 첩놈 자식 아닌가?”

여자는 스스럼없이 말하고 히히덕거렸다.

“하긴 그렇군. 그런데도 차별한단 말이야. 지도 첩자식이면서 우덜을 개상놈 취급한담 말이야.”

선조는 조선 왕의 직계가 아닌 왕실의 방계에서 왕위를 계승한 사람이었다. 그는 중종의 서자였던 덕흥군의 셋째 아들이었으니 태어나는 순간부터 왕이 될 운명이라고는 눈꼽만큼도 찾기 힘든 신분이었다. 친부인 덕흥군은 중종의 열 번째인가 열한 번째 후궁에게서 태어난 왕의 일곱번째 아들이다. 따지고 보면 후궁의 서열도 분명치 않지만, 어쨌든 그는 중종의 여러 후궁 중 하나인 창빈안씨의 소생이고, 지금은 왕이다. 선조가 왕위에 오를 수 있었던 것은 명종이 젊은 나이로 후사 없이 세상을 떠났기 때문이다. 막강한 권력을 무지막지하게 휘둘러 ‘종묘사직의 죄인’(명종실록 31권)이라 불렸던 문정왕후 윤씨와 그의 동생 윤원형 일파의 득세로 왕다운 왕 노릇 한번 제대로 행사하지 못했던 명종에게는 친자 순회세자가 있었지만, 그가 어린 나이로 죽자 후계자가 없어 더욱 쓸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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