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계홍의 역사소설 깃발

충무공 정충신 장군<95>-제7장 비겁한 군주

“잠이 온다. 힘들다야.”

여자가 볼록해진 자기 배를 어루만지며 소나무 그늘에 누웠다. 눈도 게슴츠레해졌다. 배부른 상태에서 그녀는 밤새 이 남자에게 시달렸던 모양이다.

“힘이 없으면 늘어진다. 내 밥 한 주먹 얻어오마.”

젊은 거렁뱅이가 일어서자 그녀가 말렸다.

“가지 마. 넌 가면 안올 놈이야.”

“그럼 함께 살 남자로 알았냐? 우리 같은 뜨내기들이 붙박고 살 처지냐고?”

“헤어질 땐 헤어지더라도 지금은 내 곁에 있어줘. 그리고 아까 하던 얘기나 해줘. 왜군사령관이 어떻다고?”

젊은 거렁뱅이가 그녀 곁에 풀석 주저앉더니 말했다.

“왜군 놈들이 계속 북상하면서 힘들다고 한다. 지루한 강행군이니 지쳐있을 것 아니냐. 그런데도 우리 군사들이 뭐하자는 짓인지 꼼짝하지 않는다. 저 새끼들이 지쳐있으니 이때가 기회다 하고 쳐부숴야 하는데, 어디에 숨었는지 나타나지 않고 있어. 왜놈들도 힘드니까 한양 점령군 총사령관이 휴전을 선포한 건데 말이다.”

“한양 점령군 총사령관? 그 잘생겼다는 우키다 히데이에?”

“화냥년은 하여간에 쯧쯧… 그 자는 지금 한양에 진을 치고 백성들 민심을 산다고 선한 정치를 한다고 공포했단다. 그것이 선무공작이라나 뭐라나… 그래서 지금 우리가 이렇게 편한 거야. 순라꾼도 없고, 포졸도 없고, 거들먹거리는 선비 나부랭이도 없으니 우리 세상 아니냐.”

그러나 그녀는 다른 데 관심이 쏠려있다.

“멋지게 생겼다는데 그 사람 한번 안고 싶다야.”

“미친년. 스무살도 안된 왜장에게 붙겠다고? 너 정신있냐?”

“사랑에 나이가 무슨 상관이고? 국경이 또 무슨 상관이야? 자유롭게 살자고 했잖아? 어차피 다 글러버린거, 안그냐?”

“인간이 고상할 때는 고상해져야지. 밤낮없이 암내 풍긴 고양이처럼 입이 헤벌래해서 요사떨면 되냐? 그자들은 지금 내분이 생겼다. 1군사령관 고니시 유키나가와 2군사령관 가토 기요마사 간에 맞짱뜨고 있단 말이다. 서로 조선의 임금을 잡아 공을 세우겠다고 경쟁이 붙고, 그래서 대립하고 있어. 이렇게 분열해있을 때가 우리에겐 기회인데 말이다. 왜군 후방부대가 올라오지 못하고, 병참선도 끊기고, 전라도에선 권율·고경명 두 노장군과 귀신잡는 정탐병이라는 권승경, 정충신 군관들이 단번에 고바야카와 다카카게 6군단을 잡아버렸다잖아. 이때 우리 군이 한양을 탈환해야 하는데 한결같이 숨어버렸거나, 임금님 호종하는 데만 신경쓰고 물러나 있으니 웃기는 놈들이지.”

“한양이 이렇게 무법천지가 되는 게 너는 되게 좋다며?”

“그래도 인간이라면 나라 걱정은 해야지. 이래봬도 난 신립 부대의 군관 출신이야. 지금 이 바닥에서 굴러먹는다고 우습게 보지 마라. 한번 군관은 영원한 군관이야. 넌 밤낮없이 남자에게 암내 풍겼지만 난 조국을 위해 이 한 몸 던지는 건아란 말이다.”

“미친놈. 실컷 놀다가 무슨 자다가 봉창 두둘기는 소리야?”

그녀가 어이없다는 듯 킬킬대었다. 그들의 수작을 엿듣고 있던 정충신은 앞으로 나설까 말까 망설였다. 그런데 갑자기 그들이 서로 끌어안기 시작했다. 누가 보거나 말거나 상관하지 않는 태도였다. 남자가 여자를 올라타더니 여자의 아랫도리를 헤집기 시작했다. 정충신은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엉겨붙는 그들을 보고 침을 칵 뱉고는 그곳을 벗어났다. 하긴 발길이 바쁜 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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