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혁 주필의 전라도역사이야기

44. 나주 정수루 북과 조선 통신사 김성일(金誠一)

냉정한 정세파악과 힘만이 평화를 지킨다

조선통신사 부사로 日 살핀 뒤

“일본 침략 없다” 보고한 김성일

강직하고 경륜 깊었던 그가 왜?

역사학계가 고민하는 미스터리

김성일 나주목사 재임 시 善政

수성루에 북 설치하고 민원 들어

김성일 자취 묻은 정수루 북 통해

한반도 평화 정착시킬 교훈 얻어야
 

나주관아 정문인 정수루. 2층에 있는 북은 김성일이 나주목사재임시절 신문고용으로 설치한 것으로 알려졌다.

■전쟁이냐 평화냐? 428년 전의 고민이 되풀이되다

지난 4월 27일은 한반도 역사에 이정표가 되는 날이었다.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북한 노동당 위원장이 이날 판문점 군사분계선에서 역사적인 남북 정상회담을 가진 것이다. 이후 한반도에는 평화와 화해의 바람이 불어왔다. 그러나 이런 기대는 불과 보름을 넘기지 못했다. 북한이 태도를 돌변해 어깃장을 부리기 시작한 것이다.

한반도에 불어온 훈풍을 잠재운 북한 발(發) 꽃 샘 추위는 지난 23일 미국 워싱턴에서 열린 문재인대통령과 도널드 트럼프 미국대통령과의 한미정상회담 이후 누그러져는 모습이다. 이 정상회담에서는 북한 측이 요구하는 단계적 비핵화 주장 일부를 수용하는 문제가 논의된 것으로 알려졌다.

이에 따라 한국 취재진의 북한 풍계리 핵실험장행도 막판에 가까스로 성사됐다. 북한은 한국취재진의 방북을 불허하고 22일 외신 기자들만 원산에 데려갔었다. 북한은 한미정상회담 직후인 23일 오전 9시쯤 판문점 연락채널이 열리자마자 취재진 명단을 수령한 뒤 한국취재진 방북을 전격 허용했다.

한반도의 평화정착을 위한 남북한 간의 대화와 관계는 날씨로 비유하자면 ‘맑은 날’과 ‘천둥 번개치는 날’이 반복될 것으로 보인다. 북한에 대한 불신감은 남북대화에 대한 북한의 입장을 ‘위장평화전술’이라 여기고 있다. 그러나 ‘북한이 이번만큼은 다르다’는 생각은 한반도 평화정착에 청신호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문제는 우리의 자세다. 심리적 해체가 된 상태에서의 무조건적으로 평화통일 분위기에 젖어있는 것은 곤란하다. 그렇다고 해서 북한 측의 핵 폐기 의지와 평화정착 의지를 불신해서도 안 된다. 어떤 경우든 만반의 준비를 갖춘 상태에서 평화적 대화를 유지해가는 것이 중요하다. 평화는 힘의 우위와 유비무환의 준비에서 가능하다.

지금으로부터 428년 전, 이 땅위에서는 지금과 비슷한 일이 일어났었다. 조선조정은 일본의 조선침략 소문이 무성하자 1590년 일본사정을 탐지하기 위해 통신사를 보냈다. 통신사 중 정사는 서인인 황윤길(黃允吉)이었고 부사는 동인인 김성일(金誠一), 서장관은 허성(許筬)이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조선통신사의 방일은 임진·정유재란이라는 참화를 막지 못했다.
 

나주목사내아인 금학헌

 

 

■1590년 조선통신사와 2018년 대북특사단

통신사 일행은 1591년 음력 2월 부산에 돌아와 각자 조정에 상소를 올렸다. 그러나 보고내용은 서로 달랐다. 황윤길은 ‘반드시 왜군의 침입이 있을 것’이라고 밝혔다. 이에 반해 김성일은 “그러한 정상은 발견하지 못하였는데 황윤길이 장황하게 아뢰어 인심이 동요되게 하니 사의에 매우 어긋납니다”라며 일본 측의 침략이 없을 것이라는 견해를 보였다.

어전 회의에서도 정사 황윤길은 “앞으로 반드시 병화가 있을 것이옵니다”라고 일본의 침략을 예고했다. 그러나 부사 김성일은 “그러한 조짐이 전혀 없었사옵니다”라고 상반된 대답을 했다. 그렇지만 같은 동인이었던 허성은 ‘왜구가 침입할 것이 분명하다’며 정사 황윤길과 의견을 같이했다. 김성일을 수행했던 황진(黃進)도 부사의 무망(誣罔)을 책했다고 한다.

당시 조선조정은 동인이 장악하고 있었다. 그래서 동인의 주장대로 조선조정은 일본이 침략하지 않을 것이라고 결론을 내렸다. 동인들 상당수가 왜구의 침략을 우려했지만 동인 영수들의 뜻을 거스를 수는 없었다. 당략과 당의 방침에 따라 그릇된 일인지 알면서도 그대로 쫓아가는 오늘의 현실과 별로 다를 것이 없었다.

한국정부가 지난 3월5일 북한에 파견한 대북특사단의 주요임무 역시 김정은 위원장의 진의를 파악하기 위해서였다. 정의용 수석대북특사(국가안보실장)와 서훈 국정원장, 천해성 통일부 차관, 김상균 국정원 2차장, 윤건영 청와대 국정상황실장 등 대북 특별사절 대표단은 1박2일 일정으로 평양을 방문해 남북정상회담과 한반도비핵화에 대한 북측의 의중을 파악했다.

경우가 조금 다르지만 1590년 조선통신사와 2018년 대북특사단은 공통점이 있다. 일본 방문과 북한 방문의 결론이 평화유지 쪽으로 방점이 찍힌 것이다. 차이점은 우리의 대응자세다. 조선통신사들의 일본방문은 탐색의 성격이 짙었다. 수동적이다. 이에 반해 문재인대통령의 대북특사단은 북한을 설득해 협상과 대화의 테이블로 끌어내려는 주도적인 측면이 강했다. 능동적이다.

국민들의 염원은 ‘한반도 평화정착’에 모아지고 있다. 특사단 파견과 뒤이은 남북정상회담은 한반도 평화의 초석이 될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한반도 평화가 정착되면 후세의 역사가들은 ‘대북특사단의 방북’에 대해 ‘평화의 물꼬를 튼 전기’였다고 평할 것이다. 그렇지만 그 반대의 경우라면, 결과적으로 실패였던 1590년 조선통신사의 일본방문에 빗대어질 것이다.

■ 나주 정수루에서 역사의 기로를 헤아리다

 

 

 

 

 

금성관
전남에는 이런 역사적 사실을 헤아리면서 지금의 남북 상황을 살펴볼 장소가 있다. 바로 전남 나주 금성관 곁에 있는 정수루(正綏樓)다. 누각형태로 지어진 정수루는 나주관아의 정문이다. 바를 정(正), 갓끈 수(綏)의 정수는 의관을 단정하게 하라는 뜻을 지녔다. 관아를 들어서기 전 이곳에서 옷매무새를 고치고 바른 마음가짐으로 관아에 들어오라는 의미다.

정수루 2층에는 큰 북 하나가 걸려 있다. 이 북은 시간을 알릴 때 사용했다고 전해진다. 또 한편으로는 백성들이 억울한 일을 당하면 이 북을 쳐서 알리라는 신문고였다는 설도 있다. 이 정수루의 북을 설치한 사람이 바로 조선통신사 부사였던 학봉(鶴峰) 김성일(金誠一)이다. 김성일은 그의 나이 47세였던 1584년 나주목사로 부임했다.

김성일은 나주목사로 부임해 나주 유력가문간의 갈등을 조정해 지역을 평화롭게 만들고 백성들에게 선정을 베풀었던, 능력 있는 관리였다. 김성일은 오랫동안 갈등을 빚어오던 임씨(林氏)와 나씨(羅氏)가문 사이의 송사(訟事)를 해결했다. 또 금성산(錦城山) 기슭에 대곡서원(大谷書院)을 세워 김굉필(金宏弼)·정여창(鄭汝昌)·조광조(趙光祖)·이언적(李彦迪)·이황 등을 제향하고 선비들이 학문에 전념할 수 있도록 도왔다.

김성일은 1586년나주사직단(社稷壇)의 화재에 책임을 지고 사직하고, 고향에 돌아와 <주자서절요>(朱子書節要),<자성록>(自省錄),<퇴계집> 등을 편집·간행했다. 1588년 종부시첨정에 이어 봉상시정·경기추쇄경차관(京畿推刷敬差官)·예빈시정·사성 등을 역임했다.

 

 

 

 

 

 

나주 정수루 북. 김성일이 나주목사재임시절 신문고용으로 설치한 것으로 알려졌다.
정수루 북 설치자로 김성일 목사가 거론되고 있는 것은 후세 사람들의 그에 대한 훌륭한 평가와 무관치 않다. 그렇지만 그는 후대 역사가들로부터 ‘당파 때문에 어긋난 보고를 해 조선을 전쟁의 참화 속으로 몰아넣은 인물’로 평가받고 말았다.

김성일에 대한 이런 평가는 국민들에게 여과 없이 받아들여졌다. 그래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김성일을 당파 때문에 국난을 초래한 인물로 인식하고 있다. 그러나 이 같은 평가는 매우 편향적이다. 김성일의 발언에는 ‘우선 내치를 튼튼히 해 백성들을 편안히 해야 한다’는 ‘우국의 충심’이 담겨져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렇지만 김성일의 “전쟁은 없다”발언은 ‘반대를 위한 반대’ 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것이 일반적이다. 당시 재상이었던 류성룡은 조선통신사들의 보고가 엇갈리자 같은 동인인 김성일의 편을 들었다. 선조 역시 전쟁을 준비해야 한다는 서인들의 보고가 부담스러웠기에 조정을 장악한 동인들의 손을 들어줬다.

무능하고 중심이 없던 선조는 현상유지가 좋았던 것이다. 그렇지만 김성일이나 류성룡은 전쟁의 가능성을 염려하지 않았던 것이 아니었다. 내심 걱정이 컸다. 류성룡은 어전회의가 끝난 뒤 김성일 따로 만나 이렇게 물었다.

“그대가 황윤길의 말과 고의로 다르게 말하는데, 후일 병화가 있다면 어떻게 하려고 하느냐?”

김성일은 이렇게 답했다고 전해진다.

“나도 어찌 왜적이 침입하지 않을 것이라 단정하겠습니까? 다만, 온 나라가 불안에 휩싸일까봐 그런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조선조정은 아무런 방비를 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조선 조정은 황윤길의 ‘왜군의 침입이 예상된다’는 상소에 따라 각지에 성을 쌓고 장정들을 징집해 훈련을 시키는 등 나름대로 대비책을 마련했다. 그러나 너무도 갑작스럽게 서두르는 바람에 나라가 시끄러워졌다.

민심이 동요하자 김성일과 류성룡 등 동인들은 ‘왜군이 쳐들어오지 않을 것’이라며 각 도에성을 축조하고 보수하는 일을 중단시켰다. 그런데 왜관(倭館)에 머무르던 일본인들이 모두 본국으로 소환돼 왜관이 텅 비게 됐다. 이때서야 조선 조정은 일본의 침입이 곧 있을 것임을 알아차리고 전쟁준비에 나섰다.

 

 

 

 

 

 

학봉 김성일의 비
선조는 김수를 경상감사, 이광(李洸)을 전라감사, 윤선각(尹先覺)을 충청감사로 삼아 무기를 정비하고 성지(城池)를 수축하기 시작했다. 한편으로는 신립(申砬)을 경기·황해도에, 이일(李鎰)을 충청·전라도에 급파해 무기와 군량 등을 점검하게 했다. 그러나 너무 늦은 일이었다. 싸움터에 나갈 병사를 1~2개월 만에 육성시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마침내 일본은 조선을 침략했다. 1592년 4월 13일이었다. 조선조정은 임진왜란의 책임을 김성일에게 돌렸다. 1592년 음력 6월 28일의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은 김성일을 비난하는 내용으로 채워져 있는데 내용은 아래와 같다.

“김성일은 통신사로서 일본에 갔다가 돌아온 뒤 왜적들이 틀림없이 쳐들어오지 않을 것이라고 했으나 이것은 그의 지혜가 미치지 못한 바가 있어서 그러했던 것이다. 사신으로 일본에 같이 갔던 황윤길, 허성 같은 이는 왜적들이 틀림없이 쳐들어올 것이라고 했는데 김성일만이 유독 왜적들이 쳐들어오지 않을 것이라고 하였으니 진실로 괴이하다”

■임진왜란과 김성일의 활약상

김성일은 안방준(安邦俊) 등에 의해 ‘왜란을 불러온 장본인’으로 지적됐다. 왜란 초에는 그릇된 판단을 내린 죄로 파직되기도 했다. 그렇지만 김성일은 곧 경상도 초유사(招諭使)에 임명됐다. 이는 김성일에 대한 백성들의 존경심이 매우 두터웠기 때문이다. 김성일은 퇴계 이황의 학문적 적통을 이어받은 수제자이면서 또 한편으로 왕과 권력자들에게 직언을 서슴지 않는 강직한 인물이었다.

그래서 환란을 당해 국가를 위해 목숨을 바칠 군사를 모으고 식량을 구할 수 있는 최적임자라고 판단돼 초유사로 임명된 것이다. 특히 경상도 지역은 왜구들이 휩쓸고 지나가면서 피해가 컸다. 조총을 든 왜구들의 위력을 실감한 경상도 지역 백성들은 쉽게 싸움터에 나가지 않으려 했다. 흩어진 민심을 다시 모으는 데는 김성일만한 적임자가 없었다.

 

 

 

 

 

 

나주고지도
초유사 김성일은 격문을 지어 백성을 불러 모아 군사로 삼았다. 조선관군이 뿔뿔이 흩어진 상황이라 의병을 일으킨 곽재우(郭再祐)·김면(金沔)·정인홍(鄭仁弘) 등을 찾아 협력할 수 있는 작전체계를 수립토록 도왔다. 또 수령이 없는 마을은 담대하고 용감한 자를 임시로 뽑아 행정을 관장토록 했다. 군사를 일으키고 행정을 수습해 왜구와 맞서 싸울 수 있는 기틀을 마련한 것이다.

경상도 지역은 한양으로 향하는 왜군들의 진격 로이었기에 피해가 컸다. 임진왜란 초기 왜군들의 학살로 많은 이들이 목숨을 잃었다. 여자들은 겁간을 당했고 마을은 쑥대밭이 돼버렸다. 식량을 모두 빼앗겨 목숨을 부지하기도 힘들었다. 이런 상황에서 김성일은 동분서주하며 민심을 진정시켰다.

김성일은 진주판관이던 김시민을 설득해 진주목사직을 수행토록 하고, 의병들을 모아 진주성의 방비를 튼튼히 하도록 했다. 김성일은 왜군이 곡창지대인 호남을 공략할 것이라 생각해 전략적 요충지인 진주성 방어에 심혈을 기울였다. 김성일은 1592년 1차 진주성 싸움을 지휘했다. 다음해 이후 제2차 진주성 전투에서 병을 얻어 세상을 떠났다. 사후 선무원종공신 1등관에 추서됐다.

김성일이 1592년 경상우도 초유사로 분전고투하면서 진주에서 지었다는 시가 아래와 같이 전해지고 있다.

촉석루 위 마주 앉은 세 장사들은(矗石樓中三壯士 )/

한잔 술로 웃으면서 남강 물을 가리키네(一杯笑指長江水)/

남강 물은 밤낮으로 쉬지 않고 흘러가니 (長江之水流滔滔)/

강물이 마르지 않는 한 넋도 없어지지 않으리(波不渴兮魂不死)

■ 강직했던 조선관리 김성일

 

 

 

 

 

 

김성일필적
김성일(1538년~1593년)의 본관은 의성이다. 아버지 김진(金璡)과 어머니 여흥 민씨 사이에서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호는 학봉, 자는 사순(士純)이다. 퇴계 이황의 수제자로 영남학파의 중심인물이다. 1564년 진사시, 1567년 대과에 합격해 승문원 부정자에 임명됐다. 1572년(선조 5)에는 상소를 올려 사육신을 복관시키고 종친을 등용할 것 등을 주장했다.

1579년 사헌부 장령에 임명돼 종실의 비리를 탄핵해 ‘대궐의 호랑이’(殿上虎)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다. 1579년 함경도순무어사가 되어 영흥·함흥·삼수·길주·명천 등의 고을을 순행하면서 민정을 살피고 수령들의 근무태도를 점검하였다. 1583년 나주 목사 시절, 순무어사로 나주를 시찰하던 김여물이 민가에서 술을 마시고 밤에 관아로 오자 이를 꾸짖고 관아 문을 열어주지 않는 강직함을 보이기도 했다.

그의 담대함과 강직함은 통신사 자격으로 일본으로 건너갔을 때도 여실히 나타났다. 조선통신사 일행은 1590년 3월에 한양을 출발했다. 대마도에서 한 달을 머무르다가 7월 22일에 경도(京都)에 도착하였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조선에서 통신사 일행이 왔음에도 4개월이 지나도록 그들을 만나지 않았다.

 

 

 

 

 

 

도요토미 히데요시
통신사 일행은 11월에 가서야 도요토미를 만나 국서(國書)를 전할 수 있었다. 도요토미가 동북 지방을 경략 중이어서 그리됐다고 핑계를 댔지만 사실은 조선통신사 일행을 하찮게 여긴 것이다. 그리고 실제로 도요토미는 조선을 일본보다 한 단계 낮은 나라로 여겼다. 이런 분위기 가운데 일본 측에 도요토미와의 만남을 재촉한 유일한 인물이 김성일이었다.

김성일은 정사인 황윤길이 일본의 위압적인 분위기에 짓눌려 제대로 말을 하지 못하고 있을 때 도요토미와의 만남을 재촉했다. 그리고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보낸 답서에 조선왕을 깔보는 오만불손한 내용이 많음을 지적하면서 그 시정을 요구한 인물도 김성일이었다. 대마도에는 조선국통신사 김성일을 기리는 시비가 남아있다.

■김성일에 대한 후세의 평가

 

 

 

 

 

 

학봉 김성일의 묘
김성일이 어떤 이유로 ‘왜적이 침범해올 기미가 없다’고 조정에 보고했는지는 참으로 알쏭달쏭한 문제다. 그의 식견은 높았으며 성찰도 뛰어나 일본의 조선정벌 야욕을 간파하지 못했을 리가 없다. 현재까지의 유일하면서도 타당성 있는 해석은 앞서 밝힌 대로 ‘적대적인 서인의 의견에 동조하기 싫어, 더 나아가 서인의 주장이 받아들여져 국정의 주도권이 서인으로 넘어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일부러 ‘일본의 조선정벌론’에서 힘을 뺐다는 것이다.

또 다른 추정은 예의를 중시하는 김성일의 성향과 중국 중심의 세계관이 일본을 낮춰보게끔 했으며 군사강국인 일본의 실체 역시 인정하지 않은 요인으로 작용했을 것이라는 점이다. 김성일은 도요토미에 대해 “눈이 쥐와 같으니 두려워할 만한 위인이 못 된다”고 말했다. 조선국왕과 사신을 깔보는 도요토미를 높게 평가하는 것은 그의 자존심에 맞지 않는 일이었을 것이다.

또 비록 현지에서 보고 들은 일본의 군사력이 강대했지만 그 군사력 앞에 조선이 굴복하거나 겁먹는 모습을 보이는 것도 어긋나는 일이라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금방이라도 전쟁이 날 것처럼 호들갑을 떠는 정사 황윤길의 모습에 동조할 수 없다는 반감이 ‘왜적이 조선을 침범할 기미가 없다’는 말을 내뱉게 한 것인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결과적으로 김성일의 판단은 잘못된 것으로 판명됐다. 일본은 조선을 침범했고 조선은 7년 동안 아비규환에 빠져 전쟁을 치른 것이다. 김성일의 ‘상황판단 잘못’은 임진왜란 발발 원인을 지적할 때 단골메뉴로 등장하고 있다. ‘김성일의 안이한 판단과 당파에 얽매인 편협한 사고 때문에 임진왜란이 일어나고야 말았다’는 지적이 빠지지 않고 있다.

그러나 김성일은 임진왜란 발발에 책임이 있는 선조와 대신들(특히 서인들)의 ‘책임 뒤집어 씌우기’에 희생양이 된 측면이 있다. 임진왜란 발발에는 여러 가지 원인이 있다. 각종 사화로 인해 일본의 정세에 신경을 쓸 수 없었던 조선내부의 문제와 통신사절단의 오판, 조선조정을 장악했던 동인의 ‘묻지 마 서인주장 반대’ 그리고 전쟁의 가능성을 전혀 인정하지 않고 태평성대의 왕이 되고자 했던 선조의 무능과 비겁함 등이 원인이다.

그러나 이 모든 원인은 과소평가되고 오로지 김성일의 판단착오만 침소봉대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그 증거가 <선조수정실록>에 남아있는 김성일에 대한 폄훼와 조롱이다. <선조실록>은 나중에 서인들에 의해 수정돼 <선조수정실록>에 남게 되는데 김성일의 과(過)가 지나치게 과장되거나 곡해돼 있다.

학봉 김성일을 ‘임진왜란 발발의 원흉’으로 지목해 2000년대 우리 역사교육에 고정관념(스테레오타입)을 생성시켜버린 사학자 황의돈이 황윤길의 문중 족손이라는 사실도 이런 왜곡 론을 뒷받침하고 있는 요인이다. <선조수정실록>과 현대사학자에 의해 가해진 ‘김성일 죽이기’가 결국은 ‘임진왜란 발발 원흉=김성일’이라는 등식을 만들어버렸다는 지적이다.

 

 

 

 

 

 

임진정유왜란 당시 조선에서의 전쟁참상을 묘사한 그림. 일본인이 그린 것으로 도요토미히테요시의 일대기를 적은 책에 넣어진 삽화다.
황의돈은 광복 후 동국대학교에서 사학을 연구했다. 그는 저서 <신편 조선역사>에서 ‘류성룡, 이산해 등 당시 득세한 동인배가 김성일의 편을 들어 군사 시설을 모두 부수고 조정의 모든 대신들이 마음을 놓아 태평한 꿈에 취하여 드러누웠다’고 기록했다. 임진왜란의 발발책임을 김성일과 동인에게 모두 전가한 것이다.

그러나 역사학자 신복룡은 ‘한 역사적 인물의 행적은 그의 진심과 동기를 이해하는 데에서부터 비롯해야 하며 그의 진심은 그가 마지막 생애를 어떻게 마쳤는가에 따라 평가되어야 한다. 김성일은 신중한 애국자요 충신이었지 결코 의롭지 않게 거짓말을 말할 사람은 아니었다. 그는 문중 사학의 희생자였다’며 김성일에 대한 과도한 비판을 경계했다.

김성일에 대한 과도한 비판과 맥락을 같이하고 있는 것이 ‘율곡 이이 선생의 10만양병설 조작 논란’ 논란이다. 여러 사료에 이이가 주장한 10만양병설이 등장하고 있지만, 일부 역사학자들은 ‘인조반정 이후 집권한 서인(노론)세력이 자신들의 대스승인 율곡을 추켜세우고 반대파인 동인(남인)의 영수 유성룡을 깎아내리기 위해 10만 양병론을 조작했다’는 시각을 보이고 있다.

송복 교수의 경우 “율곡 제자들의 의도는 명백하다. 율곡을 성인의 레벨에, 반면 유성룡은 속류(俗流) 정치인으로 떨어뜨리는 데 있음은 삼척동자도 알 수 있다”고 말했다. 김연수는 그의 저서 <조선 지식인의 위선>에서 ‘인조반정으로 서인이 권력을 장악한 뒤 이이를 높이기 위해 없던 사실을 지어내 선조수정실록 말미에 사관 의견으로 끼워 넣었다는 주장이 유력하다’고 적었다.

여기에 이덕일 소장 같은 이는 “이 병도 등 노론의 후예사학자들이 자신의 집안 당파인 노론을 정당화하기 위해 10만 양병설을 사실처럼 믿게 만들었다”는 주장을 펴고 있다. 이 소장은 “10만 양병설은 이병도가 자신의 저서 <조선사대관> <국사대관> <한국사대관>에 거듭 사실인 것처럼 적어놓았고 그의 제자들이 국사 교과서에까지 실음으로써 전 국민의 상식으로 승격했다”고 말하고 있다.

나주 정수루의 북에서 우리가 얻을 교훈은 정확하고 냉정한 정세파악이 한반도의 평화를 가져온다는 것이다. 정파에 따른 곡해나 반대를 위한 반대가 없어야 한다는 점이다. 그리고 어떤 이에 대한 삶의 평가는 그의 삶 전체를 대상으로 하는 현명함이 필요하다. 부분을 가지고 전체를 곡해하는 일이 벌어지면 우리사회는 물론이고 남북 간의 평화는 요원해진다.

■김성일과 경현서원(景賢書院)

 

 

 

 

 

 

나주경현서원
경현서원은 전남 나주시 노안면 영평리에 있는 서원으로 김성일과 조선 전기의 학자 김굉필 (金宏弼 1454~1504)등 7위를 배향하고 있다. 경현서원의 전신은 금양서원(錦陽書院)이다. 1583년 선조는 유림의 상소에 따라 김굉필을 모실 서원 창건을 허락받고, 이듬해인 1584년 금양서원을 건립했다.

당시 서원은 나주 서문 밖 대곡동(현재 나주시 경현동 부근)에 세워졌다. 1589년(선조 22) 정여창(鄭汝昌 1450~1504), 조광조(趙光祖 1482~1519), 이언적(李彦迪 1491~1553), 이황(李滉 1501~1570) 등 4위가 추가로 배향됐다. 명칭도 오현사(五賢祠)로 바뀌었다. 정유재란 때 소실됐으나 1608년 중건됐다. 1609년 사액서원이 되면서 경현(景賢)이라는 액호를 받았다.

1693년(숙종 19) 기대승(奇大升 1527~1572)과 김성일이 추가로 배향돼 모두 7위를 제향하게 됐다. 1868년(고종 5) 서원 훼철령에 따라 철폐되었다가 1977년 현 위치(나주시 노안면 영평리 영안마을)에 복설됐다. 김성일은 안동의 호계서원(虎溪書院)·사빈서원(泗濱書院), 영양의 영산서원(英山書院), 의성의 빙계서원(氷溪書院), 하동의 영계서원(永溪書院), 청송의 송학서원(松鶴書院) 등에 제향 돼있다. 이조판서에 추증됐으며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도움말= 김세곤, EBS역사채널, 청원미학역사연구소

사진 =위직량
/최혁 기자 kjchoi@hanmail.net

/정유진 기자 jin1@namdo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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