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계홍의 역사소설 깃발

충무공 정충신 장군<96>-제7장 비겁한 군주

도성의 반이 불에 타 폐허가 되고, 쓰러져가는 집의 지붕에는 벌써 잡초가 무성했다. 양반과 세도가들은 벌써 도망을 가고, 건달과 거렁뱅이들이 도성을 지키고 있었다. 거렁뱅이들이 빈 집을 들락거리며 대문간 앞에서 새까만 손가락으로 밥을 떠먹는 모습이 보였다. 모두가 머리를 산발해서 남녀 구분이 안되었다. 다만 목소리로 알아볼 수 있었는데 개중에는 여자아이 두세 명이 섞여 있었다. 도둑질한 것을 나눠먹거나 나눠갖고, 또 아무렇게나 몸을 섞고 사는 무리들이었다. 말 그대로 인생막장을 살고 있는 것이다.

정충신은 걸망을 단단히 매고 빠른 걸음으로 인왕골로 접어들었다. 그는 세상의 풍경이 너무나 어수선하고 을씨년스러워서 잠시 의주행재소를 달려갈 일을 잊었다. 그러나 빨리 달려가서 장계를 올리고 나라의 기강을 바로잡도록 해야 했다. 이것이 나라인가.

불광산으로 들어서는데 숲 한켠에서 여인이 엎드려 울고 있었다. 그 여인은 너무나 오래 울었던지 목이 쉬고 소리도 메말라 있었다. 얼핏 보기에는 온갖 풍상을 겪은 탓인지 노파처럼 보였으나 얼굴은 사십대 후반쯤되는 여인이었다.

“아주머니 왜 그렇게 슬피 우십니까.”

그러나 정충신은 묻다 말고 흠칠 놀라고 말았다. 아낙네 앞에 목이 달아난 시체 두 구가 놓여 있었다. 시체의 옷은 시커멓게 그을려있고, 옆구리에서 핏물이 흘러내렸으며, 허벅지살이 드러나고, 너덜너덜한 짚신짝은 황토흙이 잔뜩 묻어있었다.

“애비가 한 해 전에 떠나가고, 두 아들마저 이렇게 가버렸소. 나는 이제 못살아요. 나쁜 놈들, 못된 놈들, 천하에 죽일 놈들…”

여인은 넋잃은 듯 계속 주술처럼 외며 울고 있었는데, 사연은 이러했다. 열아홉, 열일곱 두 아들이 있었다. 두 아들은 인왕산 삼각산 세검정 골짜기를 더듬으며 약초로 연명했다. 전날에도 두 형제는 약초를 캐러 삼각산 능선을 탔다. 밤이 지나도 돌아오지 않아 기다리던 여인이 다음날 일찍 두 아들이 잘 다니는 산길을 더듬었더니 이렇게 머리가 잘려나간 시신을 발견했다는 것이다.

이 무렵 지방의 관아와 의주 행재소에서는 왜놈의 두상을 가지고 오면 상을 내렸다. 머리 하나에 쌀 한섬이 내리고, 두 개면 배가 되고, 세 개 이상이면 벼슬을 내렸다. 이 소식을 들은 건달들이 몸 약한 남자들을 미행하다가 도창으로 찌르고 목을 잘라 두상을 소금에 절인 뒤 관아로 가져가고, 의기있는 자는 평양이나 의주로 달려갔다.

“나으리, 왜군 병사 목을 따왔습니다.”

“과연 장한 일이다.” 개인행동을 하는 왜 병사 목을 우연찮게 따서 고을 두령에게 가지고 가니, 두령은 상을 내리고, 이것을 또 의주 행재소로 보내니 더큰 상과 치하가 내렸다. 그래서 이런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그러나 왜군은 어쩌다 개인행동을 하는 자가 있었을 뿐, 대체로 세력으로 움직인 데다가 무장을 했기 때문에 좀처럼 목을 딸 수가 없었다. 그래서 대신 얕잡아 볼만한 남자의 목을 쳐서 한 이틀 피를 뺀 다음 소금에 절여서 관아와 행재소로 가지고 달려갔던 것이다.

“그것이 언제 일입니까.”

“어제 일이지 언제겠소. 천벌을 받을 놈들. 내 그놈들 다 알아요. 도망병들이 이 산에 진을 치고 있다우.”

“알겠습니다. 저 시신이나마 잘 거두십시오.”

정충신은 여인을 뒤로 하고 고개를 넘었다. 멀리 가지 않았을 것이다. 핏물을 빼려면 하루이틀 시간도 요할 것이다. 계곡으로 들어서니 개를 때려잡아 털을 불에 그슬리는 일당을 발견했다. 전립에 꾀죄죄한 군복을 걸친 것으로 보아 도망병임에 틀림없었다. 그들의 한켠엔 목이 잘린 두상 예닐곱개가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말하자면 포상 증거물인 것이다.

“저 두상은 무엇이오?”

정충신이 물었다.

“왜놈 병사 두상이다.”

“생김새로 보아서는 왜놈 두상이 아닌데? 왜놈 상투는 저것이 아니잖나. 왜인은 이마가 좁고, 이빨이 안좋아서 뻐드랑니가 많은데 저 두상들은 한결같이 이마가 넓고 이가 고르다.”

그가 단번에 호령하자 일당이 주춤했다. 한인과 왜인을 이렇게 단적으로 구분하는 경우는 처음 보는지라 그들은 잠시 멈칫거리더니 한 놈이 소리질렀다. “니놈이 알아버렸으니 너도 오늘이 마지막이다. 포상감이 하나 더 늘었군.”

그리고 도창을 들고 정충신에게 달려들었다. 그들은 숫자가 네 놈이나 되었으므로 중과부적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하는 수없이 몸을 숨기고 골짜기로 내달리기 시작했다. 한참을 달리자 그들은 따라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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