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계홍의 역사소설 깃발

충무공 정충신 장군<97>-제7장 비겁한 군주

박석고개, 홍제골, 우물골, 제각말, 상림을 지나니 구파발의 마고정(馬雇亭)이었다. 이곳에서 내쳐 북으로 달리면 삼송이 나오고 벽제역에 이른다. 벽제역의 객관(客館)에는 중국 사신들이 유숙하며 궁궐 들어갈 준비를 하는 곳인데, 정충신이 당도했을 때는 잡인들로 들끓었다. 이곳에는 또다른 세상이 펼쳐지고 있었다.

벽제관 객사에는 갓바치, 보상, 부상, 엿장수, 새우젓장수, 포목장수, 걸인 할 것없이 행로객들이 제 집인 양 죽치고 있었다. 밑바닥 인생들이 모처럼 객관을 차지해 사신 흉내를 내니 복잡하지만 그럴싸했다. 객관의 상석에 자리잡은 어떤 자가 문자를 써가며 떠들기 시작했다.

“벽제역은 고려시대 역도(驛道)인 벽지역(碧池驛)이었으나 조선시대에 벽제역으로 바뀌었네. 여기 벽제관은 우도정역찰방(右道程驛察訪), 영서도(迎曙道) 찰방의 관리 아래 있었는데 중국사신을 영송하는 중요한 역로상에 위치한 객사인지라 관기도 꽤 있었지. 지금 우리에게도 그런 관기가 하나 붙으면 제대론데 찾아볼 수 없군. 얘들아, 어서 기녀 하나 잡아들이렸다?”

“술이 있어야 기녀 붙들고 기분 내지. 술은 있나?”

“있지. 세도가 집에서 가져온 농주가 그럴싸하지.”

그가 허리춤의 꼴마리를 까 호로병을 꺼내더니 입으로 가져가 벌컥벌컥 마셨다.

“카, 좋다. 난리는 좋은 세상이여. 천한 놈들이 한 세상 사는 좋은 세상이여. 자, 들어봐라. 이곳은 의주 방향의 서북대로와 연결되는데, 횃불에 의존하는 봉수제(熢燧制)가 사라지면서, 이를 대신한 것이 파발제란 말이다. 파발은 화급을 다투는 공문서의 전달에 있지. 방법은 사람의 속보에 의존하는 보발(步撥), 말의 등에 의존하는 기발(騎撥)로 나누는데, 변방의 위급한 상황을 알리는 길은 말에 의존하는 방법이 최고지. 마침 말 세 필이 있으니 있다가 기발 시합한번 해볼까.”

“좋지.”

건달들이 그렇잖아도 소일거리가 없어서 심심하던 차에 잘됐다면서 호들갑을 떨었다. 말은 기마부대에서 끌고나와 도망친 군마 두 필이고, 다른 두 마리는 남산 밑 회현골에 주둔한 조선침공군 총사령관이자 제8군 사령관 우키타 히데이에의 기병대에서 훔쳐온 군마였다. 이들 말은 벽제관 마방에 들어가 눈을 껌벅이며 여물을 오물거리고 있었다. 마방을 들여다보던 정충신은 놀랐다. 한마디로 준마였다. 털이 반지르르 윤이 나고, 눈은 호수같이 맑다. 정충신은 광주 목사관에서 목사의 말들을 건사한 경험이 있었으므로 말과 교신이 될 정도로 말의 성질을 잘 알았다.

객관으로 나오자 건달들이 말 고삐를 끌고 풀밭으로 나왔다.

“왜군 기마부대 놈들이 한양을 접수하니 이젠 욕정을 푸는 일만 남은 모양이야. 한 작자가 나를 부르더니 여자들이 많이 있는 곳을 알려달라는 거야.”

“기생집을 알려달라는 거야?”

“그렇지. 왜 그러냐니까 객고를 풀겠다는 거지. 왜나라는 별점(別店)에서 여자를 마음껏 골라잡는데 한양은 다르대나 어쩌대나. 별점이란 여자들이 남자를 만나 몸을 푸는 곳이랴. 왜나라는 여자가 남자보다 숫자가 배가 많으니 여자 태반은 남자를 보면 환장을 해가지구 길을 막고 한번 눌러달라고 청하는데, 그래서 속곳을 안입고 다닌댜. 우리의 고쟁이라는 것이 없다는겨. 환장할 일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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