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계홍의 역사소설 깃발

충무공 정충신 장군<100>-제7장 비겁한 군주

그는 얼굴이 온통 시커먼 수염으로 뒤덮여 있었다.

“말해봐야 쓸데없어. 왕이란 자가 비겁하게 도망갔는데 쉽게 돌아오겠냐. 오더라도 백성들 다 죽은 뒤 오면 뭘하냐. 고따구 용렬한 자는 우리의 주군이 될 수 없어. 그래, 니놈이 조정에 줄을 댄 놈이라면 행재소에 가서 꼭 이렇게 전해라. 왕이란 자는 개상놈의 새끼라고. 우리가 상놈이 아니라고. 상놈 짓하는 놈이 상놈이라고. 이젠 노비문서도 불태웠으니 어떤 노비도 노비가 아니라 자유인이다. 알았나? 그런데 도대체 왕이 뭐냐? 백성을 쳐바르는 왕이 왕이냐? 씨발놈.”

-정말 막가자는 것인가?

아무리 무정부 상황이라고 해도 이렇게까지 왕을 모욕하는 것이 충격적이어서 정충신은 한동안 정신이 혼미했다. 한양 천리를 지나 임진강까지 오는 사이 보도 듣도 못한 일들을 너무 많이 겪어서 웬만한 것은 면역이 되어버렸지만, 임금에게까지 이런 식으로 몰아붙이자 혼란스러웠고, 나라가 절망의 끝에 와있는 느낌이 들었다. 갈 데까지 가보자는 식인 것같다.

팔에 붕대를 감은 다른 장정이 나섰다. 붕대에는 핏물이 얼룩져 있어서 부상병임을 말해주고 있었다.

“왕이 임진강을 도강하고는 배를 모두 불사르고, 이쪽 마을까지 태워버렸댄다. 왜군이 뒤쫓을까봐 그렇게 한 것이라고 한다. 마을 사람들이 적에게 협력하거나 곡식을 바칠까 싶어서 모두 불살라버렸다는 것이야. 하나만 알고 둘을 모르는 그런 개새끼가 왕이라고? 지 혼자 살겠다고 백성들 먹을 것, 입을 것, 집까지 불싸지르고 도망가다니, 그런 자가 도대체 우리 주상이란 거야? 백성은 디지거나 말거나 지만 살겠다고 도망가면서 백성들 재산 다 태워없애도 편안하냐고? 지는 누구 때문에 있는데? 백성이 없는 왕이 왕인가?”

그러자 다른 자가 받았다.

“이러니 우리가 왜군에게 협력해도 개소리할 수 없게 돼있어. 패잔병 상당수가 왜군에 투항했지만 꼭 그들만 탓할 수 없다니까. 벌써 왜군놈들 앞잡이가 되어서 우리 군사 있는 곳 알려주고, 장수 거처지 밀고하고, 예쁜 여자도 물어다 주는 자들이 늘어나고 있다. 민심이 이렇게 돌아서버렸다. 왕이 도망가 명나라 땅뙈기 좀 불하받아서 여생을 편안하게 보낸다고 하니 우리는 개좆이 돼버렸어. 조선반도는 이제 완전히 왜나라가 돼버린 것이야. 그래서 눈치 빠른 자들이 풀잎보다 먼저 누워서 별 간나구짓을 다하잖아. 그렇대도 이걸 꼭 그들 탓만 할 수는 없다니까. 그것도 그들이 사는 방법 중의 하나라는데 뭐라고 하겠어.”

정충신은 왕실의 권위도 나라의 기강도 무너진 것을 새삼 확인하였다. 구레나룻이 덥수룩한 자가 다시 나서더니 투덜대었다.

“인근 평산에 서인인 성혼 선생이 살고 있다. 선생이 동인 세력에 밀린 뒤 평산 자택에서 요양하고 있었다는 거야. 평산은 파주 큰 길에서 이삼십 리 떨어진 산중이라는 곳이랴. 임금이 피난 중이라는 소식을 듣고 선생이 아들을 큰 길로 보냈다는 거야. 자기를 돼지 오줌보차듯 차버린 분이라도 나랏님은 나랏님이니까 안위가 걱정되었던 것이지.”

그런데 아들이 가서 살펴보니 임금은 벌써 파주를 지나 임진강변에 이르렀다. 임진강 가에서 선조는 성혼의 고향이 파주 평산이라는 것을 알고 혼잣소리로 중얼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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