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계홍의 역사소설 깃발

충무공 정충신 장군<101>-제7장 비겁한 군주

“성혼의 집이 이 근처라는데, 내가 좀 심했었나? 나올 법도 한데 얼굴을 안비치는 것 보니 섭섭했던 모양이군. 성정이 곧고 율곡과 함께 학문이 깊어서 내 일찍이 공조좌랑, 사헌부 지평을 제수했었지. 그 직을 사양해서 기어이 불러내 직책을 주고, 그 후에도 주요 직책을 주었어. 율곡과 작당해 서인의 우두머리가 되니 눈밖에 나긴 했지만 병이 났을 때 의원을 보내 약을 지어보내면서 사랑을 듬뿍 주었단 말이다. 그랬거늘 안나온다? 이건 엄연히 불충 아닌가…”

뒤따르던 병조좌랑 이홍로가 이 말을 듣고 재빨리 나서서 강가에 있는 괜찮은 집을 가리키며 말했다.

“바로 저 집이 성혼의 집입니다, 마마”

그러자 선조의 눈썹이 일순 뒤틀어지기 시작했다.

“왕이 여기까지 왔는데도 나와 보지 않는다 이 말이지?”

선조는 서인의 대표격인 성혼이 기축옥사 때 정철 등 서인을 이용해먹고 배격하자 골을 내고 나타나지 않은 것으로 판단했다. 지금 왕은 동인 편에 서있었다. 그런 그의 내심을 꿰뚫은 듯 이홍로가 불을 질렀다. 동인인 그로서는 서인 대표를 확실하게 밟아버려야 했다.

“그런 자가 어찌 상감마마를 모셨다고 할 수 있겠나이까.”

“밴댕이 속이란 말이지?”

“성은을 받은 자가 배신 때리는 것 같아서 제가 고통스럽사옵니다. 전하께옵서 이렇게 처량하게 몽진을 떠나시니 저런 늙다리까지 상감마마를 흑사리 껍데기로 아는 것이옵니다. 한마디로 우습다 이거지요. 인간사의 비정함을 이런 자리에서까지 보게 되니 가슴이 무너지나이다.”

그러나 성혼은 아들로부터 소식을 듣고 병든 몸을 이끌고 임진강으로 달려갔다. 왕은 벌써 강을 건넌 뒤였고, 나룻배도, 주변의 집도 모두 불에 타 없어진 뒤였다.

며칠 후 세자 광해군이 임진강에 도착한다는 소식이 날라들었다. 이번에는 실수를 하지 말자고 여긴 성혼은 미리 임진강에 나가 기다렸다가 광해를 만났다. 광해는 성혼을 보자 몹시 반겼다. 동인에게 당한 구원(舊怨)을 씻고 나라를 위해 나서주는 것이 고마웠다. 성혼은 개성유수 이정형과 함께 광해를 수행, 평양을 거쳐 의주 행재소까지 동행했다. 의주 행재소에 가면 임금을 배알할 예정이었다. 이 사실을 접한 이홍로가 성혼의 동태를 미리 파악한 뒤 유언비어를 퍼뜨렸다.

“성혼이란 자, 국왕이 임진강을 건널 때는 코빼기도 비치지 않더니 세자가 나타나자 여우처럼 따라붙고, 행재소 별궁까지 따라왔다. 군의 일을 맡기로 했다는데, 난세를 틈타 군사를 일으켜 왕을 물리치고 세자 즉위를 도모하는 모의를 꾸미고 있다고 한다…”

정적의 빈틈을 파고드는 데는 놀라운 천재성을 발휘한 이홍로의 흑색선전은 그런 쪽에 귀가 밝은 임금에게 딱 걸리기 좋은 구실이 되었다.

“대간(大奸) 성혼을 잡아들여라.”

“벌써 잡아들였나이다.”

이홍로는 성혼이 임금의 거소인 행재소는 오지 않고 광해군의 처소인 별궁부터 찾은 것을 증거로 제시했다. 그렇잖아도 도성을 버리고 단숨에 피난온 자격지심에 사로잡혀 있는 선조가 이를 선의로 봐줄 리 만무했다. 성혼은 안죽을 만치 추국을 당하고, 그러나 고매한 인품 때문에 죽임은 면하고 쫓겨났다. 이렇게 피난 임시정부는 여전히 당쟁으로 시끄럽고 어지러웠다. 그렇다고 한쪽이 영원히 몰락하는 것은 아니었다. 한 세력이 비대할라 치면 반대 세력이 치도록 견인하고, 여기에 새로운 파벌인 북인과 남인을 등장시켜 대립하도록 용인술을 썼다. 환란 속에서도 모함과 배신과 다툼은 끊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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