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계홍의 역사소설 깃발

충무공 정충신 장군<102>-제7장 비겁한 군주

“이렇게 나라꼴이 우습게 되어버렸단 말이다. 이런 나라에 누가 충성하고, 누가 목숨을 걸겠는가. 안그런가?”

사내가 정충신을 노려보았다. 그의 눈이 복수심에 불타듯 이글거렸다. 눈에 쌈지불을 붙이면 금방 활활 타오를 것만 같았다.

정충신은 입을 굳게 다물었다. 입은 무겁게 하고, 행동은 잽싸게 해야 한다. 이치전투에서 정탐병으로 전투를 치러본 경험자로서 익힌 생존의 비결이었다. 모략과 중상의 가운데 끼어있으면 그도 종국에는 누구의 편이 되어야 한다. 누구의 편이 된다는 것은 힘의 역학관계상 세가 약한 곳에 가면 밟히고, 강한 쪽에 가면 승리감에 도취돼 오만하게 된다. 그러나 도취된 어느 순간 정반대로 뒤집혀지고, 한 방에 훅 갈 수 있다. 그것이 인간사다. 정의와 진실과 어떤 가치를 가지고 다투는 것이 아니라, 자기 이익을 위해 쟁투하는 곳에서는 잘못 판단하거나 잘못 휩쓸리면 개죽음을 당할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침묵은 눈치보는 것이 아니라 그를 보위하는 첨단무기가 되어있다. 정충신이 계속 침묵을 지키자 일행 중 하나가 말했다.

“이 자가 어떤 놈인 줄도 모르고 우리가 함부로 입 놀렸나? 시끄럽게 생겼는데?”

“그야 이놈 목을 따버리면 그만 아닌가. 인생 별 거 있어?”

“내가 형씨들을 배신 때릴 인간으로 보이오?”

정충신이 눈에 힘을 주며 말했다. 밀리면 당할 수 있다. 그렇게 서로가 서로를 한동안 노려보는데 아무래도 사세가 불리하다고 여겼던지 그들이 야영 도구를 챙기더니 바람처럼 자리를 떴다. 정충신도 이럴 때가 아니라고 생각하고 말 잔등에 안장을 얹은 뒤 말에 올라타 힘껏 내달리기 시작했다.

“네가 이천오백리를 달려온 소년 병사 정충신이란 말이냐?”

“네. 이 어린 소년이 이천오백리 길을 한 달음에 달려와서 여기 장계를 올리고 있습니다, 전하.”

도승지 이항복이 대견스럽다는 표정으로 곁에 무릎 꿇고 엎드린 정충신을 내려다보며 보고했다. 정충신은 이항복이 시킨대로 납작 엎드려 있었다.

“네가 직접 상감마마께 장계를 올리렸다.”

이항복이 지시하자 정충신이 일어나 모듬발을 하며 왕 앞으로 나아가 장계를 올렸다. 이항복이 말했다.

“상감마마, 정충신은 이틀 전 저의 집을 찾았습니다. 장계를 숨겨오느라고 종이를 찢어서 삼태기를 만들어 메고 왔나이다. 오는 도중에 삼태기를 분실한 경우도 있었고, 나루터 초병에게 빼앗기기도 하였습니다. 하지만 다부진 몸으로 이것을 되찾아서 끝까지 가지고 왔나이다. 책임을 완수한 자이옵나이다.”

“이틀 전에 의주에 왔다고? 왜 이틀이나 묵혔는가. 장계란 속보(速報)가 생명 아닌가.”

“그렇사옵니다. 하지만 장계 종이가 새끼줄로 엮어져서 삼태기를 삼았기 때문에 그것을 풀어서 맞추고, 다림질을 해서 이어 붙이다 보니 이틀 날짜가 경과한 것이옵니다.”

“과연 지혜로다. 잘 갖춰서 올린 장계로군. 아무리 화급해도 꼴을 갖춰서 올린 것이라고? 그래, 형식이 때로 내용을 지배하는 것이니, 그것은 옳은 일이다.”

형식이 내용을 지배한다… 정충신은 순간 조선조의 통치 기법이 너무 형식에 얽매이지 않나, 속으로 생각했다. 형식이 내용을 지배해버리니 나라의 진운은 생산적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허례허식과 허위의식에 사로잡혀 있다. 정충신은 그런 생각을 하며 계속 엎드려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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