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여백
HOME 기획특집 이계홍 역사소설 깃발
깃발-충무공 정충신 장군<103>-제7장 비겁한 군주
이계홍의 역사소설 깃발

충무공 정충신 장군<103>-제7장 비겁한 군주

“상감마마, 장계 서찰의 형식도 중요하지만 내용이 더 중요하옵니다.”

“도승지가 먼저 읽었어?”

선조는 슬며시 화가 나는 표정이다. 왕이 먼저 읽어야 할 것을 신하가 먼저 읽는다? 이건 왕에 대한 도전이 아닌가. 멀리 쫓겨왔다고 도승지까지도 나를 우습게 보는가, 하는 생각도 든다. 이항복이 당황해서 잠시 망설인 듯하다가 또박또박 말했다.

“상감마마, 장계 조각을 이어 붙이느라고 안볼 수가 없었나이다. 찢어진 것을 붙여서 다림질하고, 두루마리 서책 형식으로 만들었나이다. 그러나 이 내용은 저와 정충신 이외 어느 누구도 알지 못하옵니다. 기밀은 철두철미 유지되었나이다.”

“그래도 읽는 순서는 다르지…”

왕이 수긍하는 듯 머리를 끄덕이긴 했지만 명토 박을 것은 박아야 한다고 여기고, 천천히 두루마리를 펴서 글자를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읽다 말고 놀라기도 하고, 혀를 차기도 하고, 제 자리에 돌아와 무릎 꿇고 엎디어 있는 정충신을 이윽히 내려다보기도 했다.

선조가 장계를 읽는 동안 정충신은 눈을 돌려 주변을 둘러보았다. 왕의 집무실이라는 것이 너무나 황량하고 쓸쓸했다. 어전회의도 제대로 열린 것같지 않다. 전란 중이라도 왕의 권위는 확보되어야 하고, 그것이 백성의 자존심이 된다. 그래서 어전 단 위에 용상이 있고, 뒤로는 일월오봉도(日月五峯圖])가 펼쳐져 있어야 한다. 붉은 해(양)와 하얀 보름달(음), 다섯 봉우리(오행)가 담긴 그림은 음양오행의 원리를 상징하고, 우주만물을 편안하게 하면서 왕의 안녕을 기원하는 부적이다.

그러나 반드시 따라 다녀야 하는 일월오봉도가 생략되었다. 그뿐만이 아니다. 양쪽에 예쁜 궁녀가 술을 단 문장을 부채처럼 치켜들고 서서 왕의 위엄을 보태고, 그 앞에 내시가 양쪽에 읍하고 서서 보좌하고, 어전에는 직책과 나이에 따라 조정 신료들이 관복과 복대 차림으로 엎드려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또는 “주청 드리옵니다” 따위로 주상의 권위를 한껏 세워주어야 하는데, 그런 것은 더더구나 찾아볼 수 없다. 사방의 벽은 벽지 대신 갈대를 베어와 막아서 찬바람이 송송 들어오고, 의주는 한대지방인지라 벌써 몸이 오소소 떨리는 추위가 감돌고 있는데 추위를 막는 것이라곤 없다. 초병들조차 보이지 않았다.

선조가 장계를 읽다 말고 갑자기 무릎을 탁 쳤다.

“옳거니, 권율 목사가 승리로 이끌었다 이 말이지? 그래서 전세를 역전시켰다 이 말이지? 백성들이 일어나 하나같이 무찔렀다 이 말이지? 호남의 곡창지대가 지켜지고, 왜군을 물리칠 기반이 다져졌다 이 말이지? 놀라운 일이로다.”

그는 두 주먹을 모아 쥐고 몸을 부르르 떨었다. 장계는 이렇게 시작되었다.

-전하, 하늘이 비색한 운을 내려 국가가 불행한 때를 만나 관문과 요새를 지키지 못하고, 한 사람도 성을 보호하지 못하여 경기지방과 호남지방을 보전치 못하고 흉적의 소굴이 되었나이다. 전국이 곳곳마다 유린되고 우리의 모든 군사는 어디서나 불리하였습니다.

여기까지 읽다 말고 선조가 의문을 표시했다.

“호남은 보전했다고 하지 않았는가?”

“네, 그것은 호남도 유린당했지만 권율 장군이 물리쳤다는 말씀을 하시고자 하는 전제에서 출발하는 문장이옵니다. 실상은 경상도 충청도 경기도 강원도 평안도 함경도가 초토화되었지요.”

“자신이 지켜냈다는 전제 하에 글을 시작하다 보니 그리 됐다고?”

“그렇사옵니다.”

왕이 다시 읽기 시작했다.

<저작권자 © 남도일보,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김경태 기자의 다른기사 보기

기사 댓글 0
전체보기
첫번째 댓글을 남겨주세요.
icon인기기사
여백
여백
여백
여백
여백
여백
여백
여백
Back to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