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민족사상의 횃불 돼 겨레 얼을 밝히다

최혁 주필의 전라도역사이야기
45. 홍암(弘巖) 나철(羅喆) 선생

조선민족사상의 횃불 돼 겨레 얼을 밝히다
일제 조선침략 본격화되자
관직 물러나 을사오적 처단 나서
대종교 창시 민족혼 교육
제자 서일·김좌진 항일투쟁 선봉
독립·한글 운동에 큰 영향
주시경·지석영등 나철선생 뜻 쫓아
보성출신 조선독립운동 泰山
나철기념관에서 발자취 느껴보기를
 

홍암 나철선생 영정. 나철선생은 일제의 조선 침탈에 맞서 민족혼 교육에 자신의 생애를 바쳤다.

우리는 숲을 보지 못하고 나무를 볼 때가 많다. 사람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단편적인 사실 몇 가지만 가지고 그 사람의 일생을 단순화, 혹은 정형화시켜 버린다. 구한말, 일제의 조선침략에 맞서 활동했던 홍암(弘巖) 나철(羅喆)선생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나철선생의 삶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선생은 피상적으로 생각하던 단순한 종교인이 아니다.

선생은 조선독립운동의 태산이자 해외독립운동의 본령(本領)이었다. 그렇지만 우리 대부분은 선생을 대종교의 초대교주 정도로만 생각하고 있다. 또한 독립운동가로 여기고 있지만 선생이 어떤 활동을 했는지는 자세히 알지 못하고 있다. 하지만 선생의 족적을 살펴보면 우리는 선생의 위대함에 저절로 찬탄과 존경심을 금치 못하게 된다.

전남 보성에 있는 홍암 나철 기념관. 보성에 마련돼 있는 홍암 나철 기념관에서 조국과 겨례를 사랑하던 선생의 발자취를 느낄 수 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 소개 돼 있는 나철선생에 대한 요약설명은 다음과 같다.

‘본관은 나주(羅州). 본명은 나두영(羅斗永)·나인영(羅寅永). 호는 홍암(弘巖). 전라남도

보성(寶城) 출신. 1863(철종 14)∼1916. 대종교의 초대 교주·독립운동가’

다음은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 나와있는 나철 선생의 생애와 활동에 대한 서술이다. 어느 인물사전이든 아래의 내용과 크게 다르지 않다.

‘29세 때 문과 병과(丙科)에 급제하여 이후 승정원가주서(承政院假注書)와 승문원권지부정자(承文院權知副正字)를 역임하였다. 일본의 침략이 심해지자 관직을 사임하고 호남 출신의 지사(志士)들을 모아 1904년 유신회(維新會)라는 비밀단체를 조직하여 구국운동을 하였다.을사조약 체결 직전인 1905년 6월 오기호(吳基鎬), 이기(李沂), 홍필주(洪弼周) 등과 함께 일본에 건너가 -동양의 평화를 위하여 한·일·청 삼국은 상호 친선동맹을 맺고 한국에 대해서는 선린의 교의로써 부조(扶助)하라-는 의견서를 일본의 정객(政客)들에게 제시하였으나 응답이 없자 일본의 궁성 앞에서 3일간 단식투쟁을 하였다.

그러던 중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가 조선과 새로운 협약을 체결한다는 소식이 각 신문에 발표되자 나라 안에 있는 매국노들을 모두 제거해야 국정을 바로잡을 수 있다고 생각하고 단도(短刀) 두 자루를 사서 품에 넣고 귀국하였다. 교단에 전하는 말로는 서울에 도착하여 숙소로 걸어가는 도중에 한 백전 도인에게서 두 권의 책을 받았는데, 그 책이 바로 <삼일신고(三一神誥)>와 <신사기(神事記)>라고 한다.

1906년, 다시 한 번 일본의 반성을 촉구하기 위해 일본으로 건너가 당시 이토 히로부미와 대립관계에 오카모토(岡本柳三助)·도야마(頭山滿) 등을 만나 협조를 구했으나 별 효과를 얻지 못하였다. 또한 귀국길에 폭탄이 장치된 선물상자를 구입하여 을사오적을 살해하려 하였으나 실패하였다.

홍암 나철선생기념관 직원 이성심씨가 나철선생의 삶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1907년 1월부터 암살 계획을 구체적으로 추진하여 3월 25일을 거사일로 정하고 오적의 주살(誅殺)을 시도하였다. 그러나 서창보(徐彰輔) 등이 붙잡히고 사건의 전모가 드러나자, 동지들의 고문을 덜어 주기 위해 오기호, 최인식(崔寅植) 등과 함께 평리원(平理院)에 자수하여 10년의 유배형을 받았다. 고종의 특사로 그 해에 풀려나서 1908년 다시 일본으로 건너가 외교적인 통로에 의한 구국운동을 계속하였다. 그러나 소득 없이 귀국하였다.

귀국하자마자 오기호, 강우(姜虞), 유근(柳瑾), 정훈모(鄭薰模), 이기, 김인식, 김춘식(金春植) 등의 동지들과 함께 서울 재동에서 ‘단군대황조신위(檀君大皇祖神位)’를 모시고 제천의식을 거행한 뒤 단군교를 공표하였다. 이 날이 바로 중광절(重光節)이다.

곧 교직을 설치하고, 초대 교주인 도사교(都司敎)에 취임하여 5대 종지를 공포하였다. 또한 단군의 개국과 입도(立道)를 구분하여 서기전 2333년에 124년을 더하여 ‘천신강세기원(天神降世紀元)’이라고 하였다. 1910년 8월에는 대종교라고 이름을 바꾸었다.

1911년에는 대종교의 신관(神觀)을 삼신일체의 원리로 설명한 <신리대전>(神理大全)을 발간하는 한편, 강화도 마니산 제천단(祭天壇)과 평양의 숭령전(崇靈殿)을 순방하고 만주 화룡현 청파호(靑波湖)에 교당과 지사(支司)를 설치하였다.

이와 같은 교세의 급속한 확장에 당황한 일제는 1915년 종교통제안(宗敎統制案)을 공포하고 대종교를 불법화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교단이 존폐의 위기에 봉착하자 1916년 음력 8월 4일, 상교(尙敎) 김두봉(金枓奉)을 비롯한 시봉자(侍奉者) 6명을 대동하고 황해도 구월산 삼성사(三聖祠)에 들어가 수행을 시작하였다.

그리고는 사당 앞 언덕에 올라 북으로는 백두산, 남으로는 선조의 묘소를 향해 참배한 뒤 “오늘 3시부터 3일 동안 단식 수도하니 누구라도 문을 열지 말라.”고 문 앞에 써붙인 뒤 수도에 들어갔다.

그러나 16일 새벽 이상스럽게 인기척이 없어 제자들이 문을 뜯고 들어가니, 8월 15일 그는 자신이 죽음을 택한 이유를 밝힌 유서를 남기고 폐기법(閉氣法)으로 이미 숨을 거둔 뒤였다. 그의 유언에 의하여 청파호 언덕에 유해를 안장하였으며, 그 후 대종교에서는 그가 운명한 날을 가경절(嘉慶節)이라 하여 4대경절(四大慶節)의 하나로 기념하고 있다. 1962년에 건국훈장 국민장이 추서되었다’

중국 길림성 청파호 인근의 나철선생묘지

 

■ 나철선생과 을사오적 처단

나철 선생은 1863년 12월 2일 전남 보성에서 태어났다. 본명은 두영이었으나 인영으로 개명했다. 대종교를 창시한 이후에는 철로 바꾸었다. 선생의 나이 29세 때인 1891년(고종 28)에 식년문과에 급제했다. 1895년 오늘날의 세무서장에 해당되는 징세서장(徵稅署長)에 임명됐지만 러일전쟁에서 이긴 일제의 조선내정간섭이 갈수록 침략이 노골화되자 자리를 사직하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청년시절의 나철과 과거급문

이후 강진 출신 오기호와 부안 출신 이기 등 호남출신 애국지사들을 규합해 유신회(維新會)를 조직했다. 선생은 ‘호랑이를 잡으려면 호랑이 굴에 들어가야 한다’는 말처럼 1905년 일본으로 건너갔다. 그리고 이토오 히로부미와 라이벌 관계에 있었던 정치인들을 만나 조선침략의 부당성을 호소했다. 당시 선생이 만난 일본 정치인들은 흑룡회 간부였던 우치다 료헤이를 비롯해 마츠무라 류노스케, 오카모토 류노스케, 토야마 미츠루 등이었다.

나철 선생은 이토 히로부미와 총리대신 오쿠마 시게노부 등에게 ‘조선의 주권을 보장하고 동양 평화를 위하여 한·중·일 3국이 친선동맹을 맺어야 한다’는 내용의 서신을 보냈다. 그러나 아무런 회신이 없자 궁성 앞에서 3일 동안 단식하며 일제의 조선침략이 부당함을 알렸다. 선생은 을사늑약이 체결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일제에 붙어 나라를 팔아먹는 매국노들을 죽여야 조선을 바로 세울 수 있다”며 칼 2자루를 품고 귀국했다.

대일외교투쟁당시의 나철선생

나철선생은 이완용, 권중현, 박제순, 이지용, 이근택 등 을사오적을 처단하기 위해 ‘자신회’라는 결사조직을 만들었다. 그리고 결사대원들에게 ‘참간장’(斬奸壯)라는 증서를 만들어주었다. 참간장은 ‘간신배(매국노)를 죽이는 것은 하늘의 뜻이기에 죄가 되지 않는다’는 일종의 살인허가증이었다. 자신회 결사대원들은 몇 차례나 거사를 준비했으나 그때마다 일이 틀어져 결국은 성공하지 못했다.

나철선생과 결사단원들은 1907년 3월 20일 군부대신 권중현을 암살하기 위한 거사를 단행했다. 조선 최초의 을사오적 처단 암살사건이었다. 그러나 아쉽게도 유신회 암살단원이 발사한 총알은 권중현을 빗나갔다. 미수에 그치고 만 것이다. 을사오적 처단에 나섰던 결사대원 18명이 현장에서 체포됐다. 일제는 결사단원들을 고문해 나철의 행방을 물었다. 선생은 동지들이 고통이 심할 것을 우려해 스스로 일본헌병을 찾아가 체포당했다.

재판에 회부된 나철 선생은 10년형을 선고받고 유배에 처해졌다. 유배지는 지금의 신안군 지도(智島)였다. 다행스럽게도 선생은 오기호, 이기 등 동지들과 함께 광무황제의 특사로 유배 4개월 만에 석방됐다.

을사오적

 

■ 대종교 창시

나철 선생은 을사오적을 처단하는 지엽적인 방법만으로 조선의 국권을 되찾을 수 없다고 깨달았다. 그래서 뜻을 같이 하는 사람들과 민족 종교 운동에 주력하고 1909년 1월 15일 서울에서 대종교를 창시했다. 선생은 서울 재동, 취운정에서 제천의식을 갖고 단군교를 공식 종교로 공표했다. 단군교는 우리 민족 기원 신화에서 비롯된 단군을 교조로 섬기는 종교다.

선생은 1910년 8월 경술국치로 조선의 국권이 일제에게 완전히 넘어가자 민족혼을 되살려야 조선을 다시 살려낼 수 있다고 판단했다. 눈앞의 이익을 쫓는 풍조가 만연했기에 결국은 대신들과 백성들이 나라를 등졌다고 여겼다. 선생은 조선이 망한 가장 큰 이유를 의로움보다는 외세에 붙어 호의호식하려는 기회주의적 태도에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민족혼을 살려낼 새로운 구국운동과 민족중흥의 방법을 모색했는데 이것이 바로 단군교 중광(重光)을 통한 민족혼 부활이었다. 중광이란 ‘어둠에 잠겼던 단군교(대종교)를 다시 밝히면서 광명세계를 이끈 한배검(단군)의 교단이 다시 이어졌다’는 뜻이다. 선생은 우리민족이 잃어버린 단군정신을 회복하는 것이 민족정신을 다시세우고 조선 국권을 되찾는 길이라 확신했다. 그리고 10월3일을 단군이 나라를 연 개천일로 정했다.

선생은 일제의 탄압을 피하기 위해 1910년 8월 5일 교명을 단군교에서 대종교로 바꿨다. 그러나 일제는 대종교가 조선민족혼을 살리려는 의도를 갖고 중광된 종교라는 사실을 간파하고 대종교를 탄압하면서 포교를 금지했다. 선생은 국내에서의 포교활동이 어렵게 되자 1914년 5월 13일 중국 길림성 화룡현(和龍縣) 청파호로 대종교총본사를 이전했다.

대종교는 나라를 잃은 조선민족을 하나로 묶어주는 구심점이 됐다. 종교를 넘어 민족정신을 계승하고 공유하는 ‘정신적 의미의 나라’가 됐다. 이에 대종교 사상은 만주에 급속도로 퍼져 나갔다. 교세가 크게 늘자 나철 선생은 체계적인 관할을 위해 포교지역을 네 개로 나누고 책임자를 파견했다.

선생은 대총교총본사 산하에 동서남북 4개교구와 외도교구 등 5개 교구를 설치했다. 북도본사는 이상설과 이시영, 동도본사는 만주 무장 대일항쟁을 실질적으로 이끈 서일, 남도본사는 동아일보 편집국장으로 일하면서 백두산 성산운동을 펼친 강우, 서도본사는 신규식과 이동녕에게 맡기고 대종교를 번창시키도록 했다.

이런 교구들은 지역의 조선민족을 단합시켜 국외 독립운동기지 역할을 했다. 선생은 또 교인들의 자녀교육을 위해 교육시설을 마련하고 민족교육을 실시해 독립정신을 고취시켰다. 대종교의 교세가 크게 늘자 일제는 당황했다. 그래서 조선총독부는 1915년 모든 종교를 신고토록 하면서 대종교를 종교로 인정하지 않고 포교금지조치를 내렸다.

이때 조선총독부가 총독부령 제 83호 제1조를 통해 내린 종교는 신도(神道), 불도(佛道), 기독교 세 가지였다. 일제는 대종교를 독립운동단체로 규정하고 남도본사를 강제로 해산했다. 일제는 대종교를 조선민족주의자들과 독립운동가들의 소굴로 간주했다. 사실이 그랬다. 일제는 대종교를 유사종교단체로도 취급하지 않고 철저히 탄압했다.

이에 나철선생은 황해도 구월산 삼성사을 찾았다. 이곳은 예전에 매년 나라에서 단군에게 제사를 올렸던 곳이었다. 나철 선생을 수행했던 제자는 후에 북한의 부주석이 된 김두봉이었다. 선생은 이곳에서 대종교에 대한 일제의 간악한 탄압에 죽음으로 항거하기 위해 1916년 8월 15일 구월산 삼성사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교통(敎統)은 김교헌에게 전수됐다.

■ 항일독립운동과 민족혼 교육의 요람이었던 대종교

대종교는 조선암흑시기에 불타오른 민족종교였다. 세상을 이롭게 하는 종교이면서 조선민족을 하나로 묶어주고 조선민족혼을 불타오르게 하는 종교였다. 대종교는 만민평등과 세계평화를 추구하면서 한편으로는 조선독립을 위해 조선민족이 온 힘을 다할 것을 강조한 종교였다.

세계평화와 민족혼을 강조하는 나철선생의 사상과 대종교의 종교적 가르침은 그의 밑으로 많은 사람들을 모여들게 했다. 자연 나철선생의 사상과 이념의 영향을 받은 많은 청년들이 독립운동지도자로 양성됐다. 나철선생의 대종교에서 청산리 전투를 주도한 서일을 비롯, 김좌진, 박은식, 김규식 등 수많은 독립운동가가 배출됐다.

1918년 제1차 세계대전이 종료된 후 중국에 망명 중인 독립운동 지도자들이 대한독립선언서(일명 무오독립선언서)를 발표했다. 이 무오독립선언은 1919년 국내 3·1독립운동에 앞서 동경에서 발표된 2·8독립선언보다도 앞선 것이다. 무오독립선언서에 서명한 39명의 독립지사 중 25명이 대종교 출신인사였다.

1918년 무오독립선언서의 내용과 주요 서명자는 다음과 같다.

무오독립선언서

1. 일본의 합방 동기는 그들의 소위 범일본주의를 아시아에서 실행함이니, 이는 동아시아의 적이요,

2. 일본의 합방 수단은 사기강박과 불법무도와 무력폭행을 구비하였으니, 이는 국제법규의 악마이며,

3. 일본의 합병 결과는 군경의 야만적 힘과 경제의 압박으로 종족을 마멸하며, 종교를 억압하고 핍박하며, 교육을 제한하여 세계 문화를 저지하고 장애하였으니 이는 인류의 적이라,

건국기원 4252년 2월

김교헌(金敎獻) 김규식(金奎植) 김동삼(金東三) 김약연(金躍淵) 김좌진(金佐鎭) 이동녕(李東寧) 이동휘(李東輝) 이범윤(李範允) 이상룡(李相龍) 이승만(李承晩) 이시영(李始榮) 박용만(朴容萬) 박은식(朴殷植) 박찬익(朴贊翼) 신채호(申采浩) 안정근(安定根) 안창호(安昌浩) 윤세복(尹世復)

이 무오독립선언서는 항일무장투쟁을 분명히 명시했다는 점에서 기미년 독립선언서와 큰 차이를 보이고 있다. 해외독립 운동가들은 무오독립선언서를 통해 밝힌 것처럼 항일무장투쟁을 본격적으로 벌여가기 시작했다. 서일은 중광단을 토대로 해 독립군을 조직해 갔다. 중광단은 대한정의단(大韓正義團)-대한군정서(일명 북로군정서)로 확대 발전됐다.

서일. 그는 무장항일독립운동가로 청산리전투의 실질적 주역이었다.

홍범도가 이끄는 조선독립군은 1920년 6월 봉오동 전투에서 승리했다. 1920년 10월 대한군정서는 총재 서일의 지휘아래 부총재 현천묵, 총사령관 김좌진·나중소(羅仲昭)·이범석(李範奭)등이 독립군을 지휘한 가운데 청산리 전투에서 대승을 거뒀다. 중국 길림성 화룡현 봉오동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전사한 일본군은 157명이었다.

또 1920년 10월 20일부터 22일까지 중국 길림성 화룡현 청산리 일대에서 벌어진 청산리 전투에서 일본군 가노 19사단이 입은 피해는 사상자 3천300명이었다. 1933년 7월 1일 흑룡강성 대전자령의 전투에서는 지청천이 지휘한 조선독립군이 일본군 1개 연대 병력에 큰 피해를 입혔다. 이 봉오동전투, 청산리전투, 대전자령 전투를 ‘일제하 3대 대첩’이라 부른다.

대종교 인사들이 주축이 된 조선독립군은 1925년 신민부(新民府)를 결성해 민정(民政)과 군정(軍政)을 아우르는 한인자치정부 성격을 띤 독립군단을 성립시켰다. 대종교 3대 교주 윤세복(尹世復)은 안희제(安熙濟)등과 함께 1933년 발해의 고도인 영안현(寧安縣) 동경성(東京城)에 발해농장을 세우고 이곳을 조선민족의 독립운동기지와 교육 산실로 삼았다.

발해농장 수전모습

발해농장은 겉으로 보기에는 땅을 개간해 농사를 짓는 농장이었다. 대종교인을 중심으로 한 조선인들은 땅을 개간하고 둑을 쌓는 공사를 한 뒤 농토를 확보해 농사를 지었다. 쌀 3천가마가 생산될 정도로 큰 규모였다. 그렇지만 발해농장은 실은 경제활동과 민족정신교육을 하면서 한편으로 독립군을 양성하는 독립군 기지 역할을 하는 곳이었다.

부산의 거부로 중외일보 사장직을 맡고 있었던 안희제는 거금을 지원해 발해농장이 운영되도록 도왔다. 발해학교에서 학생들은 우리 역사를 배우면서 민족정신을 키웠다. 일제는 동경성 내에 있는 대종교 삼일학원과 발해농장을 눈엣가시로 여겼다. 삼일학원에서는 조선인들을 대상으로 한 민족혼교육이 이뤄졌고 발해농장에서는 독립군이 양성되고 있었던 것이다.

■ 임오교변과 조선어학원사건

1910년대부터 1940년대 광복까지 강력하게 무장독립항쟁을 펼쳤던 단체들 대부분은 대종교 출신 지도자들이 이끌었던 세력들이었다. 상해 임시정부는 각지에 흩어져 독립운동을 하던 단체들을 불러 모았는데 대종교 인맥이 다수를 차지했다. 실례로 1921년 제2회 상해 임시의정원 위원 29명 중 21명이 대종교인으로 이동녕을 비롯, 이시영, 김구, 조완구, 조성환, 차이석, 송병조 등이 그 핵심 인물이었다.

1941년 태평양 전쟁이 시작되면서 일제의 조선식민지 수탈과 징병, 조선민족문화말살 정책은 극으로 치달았다. 쌀과 면화 등 각종 물자는 전쟁군수품으로 모두 실려 나가고 청년과 처녀는 전쟁터로 끌려갔다. 창씨개명을 통해 이름마저도 바뀌었다. 항일민족세력들의 입지는 갈수록 좁아졌다.

일제는 대종교 세력 제거를 위해 1942년에 조선어학회 사건과 대종교의 임오교변을 2개월 사이로 일으켰다. 민족혼 교육과 조선어교육을 말살시켜야 조선독립운동을 근본적으로 막을 수 있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일제는 한글을 지키는 학자들을 상대로 해 대대적인 탄압을 시작했다.

일제는 한글로 쓰인 일기장을 빌미로 삼았다. 일제는 1942년 8월 함흥 영생여고 여학생이 한글로 쓴 일기장을 트집삼아 조선어학원 사건을 일으켰다. 일제는 조선어학회 관련 인사들을 붙잡아 13명을 공판에 회부했다. 이중 이윤재와 한징은 고문에 시달리다 옥사하고 이극로, 최현배, 이희승, 정인승, 정태진 등 11명은 6년에서 2년의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동경성에 있던 대종교본사 교인들. 앞쪽 왼쪽에서 두번째가 윤세복 3대교주다.

그러나 조선어학회 사건의 발단은 알려진 것과는 크게 다르다. 상당수 학자들은 ‘조선어학회 사건이 당시 대종교 교주였던 윤세복 선생이 이극로에게 보내 작곡을 의뢰한 편지와 연관이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즉 윤세복 선생이 단군성가라는 노래 가사를 이극로에게 보내 작곡을 의뢰하는데 이 그 단군성가가 이극로 책상 위에서 발견되면서 조선어학회 사건이 일어나게 됐다는 것이다.

조선어학회 사건 발생 당시 변호사이며 조선어학회 사건의 직접 연루자인 이인이 쓴 <반세기의 증언>에는 사건의 전말이 자세히 기록돼 있다. 이 책에 따르면 조선어학회 초대이사장을 지낸 이극로는 대종교인으로 윤세복의 감화를 받아 조선 독립을 목적으로 조선어학회를 세웠다.

일제는 한글운동을 조선민족혼 운동으로 간주했다. 그래서 한글운동가를 독립운동가처럼 가혹하게 탄압했다. 한글운동의 선구자 주시경 선생 역시 일제로부터 숱한 고통을 받았다. 주시경 선생은 ‘암글’ ‘언문’이라고 천대받던 우리글에 처음으로 ‘한글’이라는 이름을 붙인 학자였다.

주시경 선생은 1910년 4월 펴낸 <국어문법>이라는 책을 통해 ‘한글의 발생 자체가 단군의 강림과 관련이 있다’는 주장을 펼쳤다. 나철선생의 대종교 사상에서 영향을 받아서이다. 주시경 선생의 제자들이 주축이 돼 결성한 조선어학회 역시 한글발생의 연원을 단군에게서 찾는 입장을 견지했다.

조선어학회 사건이 일어난 지 한 달 뒤 만주와 한반도 전역에서 대종교 간부들이 대거 검거됐다. 일제는 대종교를 조선의 독립을 목적으로 하고 있는 독립군 단체로 여기고 교주 윤세복 등 25명의 핵심인물을 잡아들였다. 그리고 치안유지법 위반을 들어 실형을 선고한 뒤 대부분을 만주의 액하감옥에 수감했다.

대종교 간부들은 이곳에서 무자비한 고문과 구타에 시달리다 죽어나갔다. 임오교변은 이극로와도 연관돼 있다. 당시 대종교는 본산인 천진전 건립을 계획 중에 있었는데 이극로가 윤세복에게 보낸 편지 중 ‘일어나라 움직이라! 한배검이 도우신다’이라는 문구가 있었다. 일제는 이 문구를 조선 독립을 위해 무장봉기하라는 뜻으로 보고 탄압을 시작한 것이다.

■ 나철선생과 대종교

대종교교기

나철 선생은 일제에 항거해 세상을 떠났지만 조선독립과 세계평화를 염원하는 그의 사상과 가르침은 많은 이들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나철 선생의 나라사랑 정신은 한글을 지키고, 항일투쟁을 통해 조선독립을 성취하려는 민족운동으로 계승됐다. 나철 선생의 사상은 민족혼인 한글을 지키고 조선독립사상을 키우는 밑거름이 됐다.

나철선생의 가르침을 받은 서일, 김좌진 등은 북로군정서를 조직해 항일무력투쟁을 벌였다. 이들의 활약으로 청산리 전투 등의 승리가 가능했다. 박은식·김규식 등 많은 애국 열사들도 대종교의 영향을 받은 분들이다. 일제 치하에서 한글운동을 이끈 인물들 상당수도 대종교 교인들이었다. 주시경, 이극로, 이병기, 지석영, 안재홍이 나철선생의 가르침을 쫓았다.

독립기념관에 세워져 있는 나철 어록비

조선사연구 등을 집필하며 한글과 국학운동을 이끌었던 위당 정인보 선생도 나철선생으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다. 대표적인 한글학자 최현배선생도 나철 선생의 단군사상에서 조선의 이상적인 국가건설모형을 찾았다. 최현배 선생은 저서 <민족 갱생의 원리>와 <나라사랑의 길>에서 ‘우리나라의 이상적인 길로 단군의 한배나라를 실현하자’는 주장을 펼치기도 했다.

광복 후 대한민국 정부는 나철 선생의 공적을 기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나철 선생은 민족의 암흑기인 일제강점기에 많은 조선독립운동가와 민족지도자들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그의 사상은 국권회복과 민족정신 수호에 크게 기여했다. 그의 사상은 개천절을 통해 우리와 함께 숨결을 나누고 있다. 전남 보성 홍암 나철 기념관에서 선생의 사상과 발자취를 더 깊게 느낄 수 있다.

도움말/이동언, 이성심, 보성군 홍암 나철기념관, 독립기념관

사진/강위원, 위직량

/최혁 기자 kjchoi@hanmail.net

/정유진 기자 jin1@namdo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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