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계홍의 역사소설 깃발

충무공 정충신 장군<109>-제7장 비겁한 군주

“적이 사정권 안으로 들어오자 조선군이 집중적으로 화살을 날리면서 전투가 시작되었습니다. 조선군은 주로 광주와 화순, 함평, 나주, 장성에서 온 의병들입니다. 젊은 농군들로 구성된 의병들 중에는 불랑기자포, 영자총통을 다룰 줄 아는 병사도 있었습니다.”

“불랑기자포, 영자총통을 다룰 줄 안다고?”

이항복이 대신 물었다.

“네. 도성안에 있는 군기시에서 무기를 제조하다 온 장정들이었습니다. 이들이 가지고 온 불랑기자포를 가지고 조립을 하는데, 자포에 심지를 꽂고 화약을 채운 후 격목을 넣어 심지에 불을 붙여 폭약을 폭발시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 무기도 동원했단 말이냐?”

이번엔 선조 임금이었다.

“그렇사옵니다, 전하. 휴대용 화기인 승자총통도 있었사옵니다. 승자총통에서 발사하는 철우와 장군전촉, 화살촉을 날리면 적들이 골짜기로 낙엽처럼 떨어졌습니다.”

“아, 그렇군.”

선조가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이때 적이 진지를 구축한 우리 진영에 들이닥쳤사옵니다. 권율 장군이 선봉에 서서 독전했습니다. 그때 나무 위에서 활을 쏘던 황진 장군이 적탄을 맞고 쓰러지자 도리없이 군을 재정비해 후퇴했습니다. 장수가 총상을 입으니 일시에 조선군의 사기가 떨어지고, 이를 본 고바야카와 군대가 기회다 하고 방어선을 돌파했습니다.”

“저런! 그래서 모두 붙잡혔단 말이냐?”

“아니옵니다, 전하. 이것을 알고 성 구축병들이 벌서 방어선 안쪽에 함정을 파놓았습니다. 그리로 그들을 유인한 것이지요.”

“아, 숨막히는군! 그래, 몇 놈이나 잡았더냐.”

“한 함정에 적의 분대병력이 빠져서 허우적거렸습니다.”

“그래서?”

“그래서 우리 전라도 말로 허벌나게 조자부렀지요. 아작을 내버린 것이옵니다.”

“목을 베었더냐?”

“목을 벨 가치도 없는 것들이었습니다. 숫자가 워낙에 많으니까요. 대신 적장 목을 따야 하옵니다요.”

“그 말은 맞다. 그래서?”

“적들을 교란시키기 위해서 이 골짜기 저 골짜기에서 산으로 들어온 인근 마을 사람들이 징과 꽹과리를 치며 함성을 질렀습니다. 적들이 갈팡질팡 혼비백산하였사온데 볼만한 광경이었사옵니다.”

“징과 꽹과리 북은 왜 치는 것이냐.”

“우리 군의 사기를 올리고, 우리의 병력이 그만큼 많다는 위장술이옵니다. 적들의 혼을 싹 빼버려야 항개요.”

“항개요?”

“그건 전라도 사투리로서 하니까요, 라는 말이옵니다.”

“별 희한한 말도 있군.”

이항복이 나서서 말했다.

“전하, 꽹과리 전법은 정충신 소년이 고안해낸 심리전술이라고 하옵니다. 이 골짝 저 골짝에서 농악소리를 요란하게 울리면 우리 병력이 수천, 수만이 되니까요.”

“그리고 각 마을에서 들어온 부녀자들이 날라온 돌멩이를 적들에게 날리니 고꾸라진 자가 눈발처럼 많았고, 머리통이 깨진 자가 기백 명이었사옵니다.”

결국 고바야카와 군대는 조선군이 산속에 엄청나게 많은 병력이 매복해 있다고 보고 후퇴하기 시작했다.

“상감마마, 이렇게 불랑기자포, 영자총통을 쏘고, 함정에 빠뜨려 몰살시키다 보니 우리의 피해는 극히 적고, 적군의 피해는 피가 흘러 내를 이루었으며, 초목에 적셔진 피비린내가 십리 밖까지 날 정도였습니다.”

일본군의 임진란 전사(戰史)에는 조선의 3대 전투 중 이치전을 첫째로 꼽고 있다. 가장 병력 손실이 많고, 결정적으로 전술 실패를 인정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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