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계홍의 역사소설 깃발

충무공 정충신 장군<110>-제7장 비겁한 군주

유격장 출신 조경남 장군이 쓴 ‘난중잡록’(임진년 7월10일-7월20일)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금산의 적 수천여 명이 진산(珍山)에 들어와 불을 지르고 약탈하니 이현(梨峴:배재 또는 이치재)의 복병장(伏兵將)인 광주목사(光州牧使) 권율(權慄), 동복현감 황진 등이 군사를 독려하여 막아 싸웠다. 황진이 탄환에 맞아 퇴각하는 바람에 적병이 진채(陣寨)로 뛰어드니 우리 군사들이 놀라 무너지는지라, 권율이 칼을 뽑아들고 후퇴하는 군병 목을 베며 죽음을 무릅쓰고 먼저 오르고, 황진도 상처를 움켜쥐고 다시 싸워 우리 군사 한 명이 백 명의 적을 당하지 않는 자가 없으니 적병이 크게 패하여 무기를 버리고 달아났는데 수백 명을 베었다.

이러한 기록들이 장수들의 전진록(戰陣錄)에 수다하게 나오는데 후대 사람들은 이 전투를 잘 모르고 있다. 1차 진주성 싸움보다 규모가 크고, 호남곡창지대를 지킨 전투인데도 크게 알려지지 못하고 있다. 조선왕조실록, 선조실록, 선조수정실록, 백사집(白沙集), 나무위키, 한국민족문화대백과(한민족전투) 등의 사료를 모아 이치전투를 재정리한다.

이항복의 문집 <백사집>에 따르면, 이항복(권율의 사위)과 권율이 대화를 나눌 때, 권율은 웅치·이치전투를 가장 자랑스러운 전공이라고 평가했다. 잡아죽인 적은 행주대첩이 더 많지만, 그때는 왜병들이 전쟁 초기에 비해 기세가 꺾인 상태였고, 아군 병력은 충분히 전쟁을 수행할만큼 숫자가 많았다. 권율은 이때 전라도 순찰사 자격으로 전쟁을 지휘, 독려했는데 주력군은 이치전투에서부터 생사를 하께 한 전라도 관·의병군들이었다.

이치전투에서는 왜란의 초기인지라 모병한 군인들이 사기는 있을지언정 전략이 허술하고, 군사의 훈련도 변변치 못했다. 워낙에 숫자도 적었다. 나가면 파리 목숨일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척후활동과 지형지세를 활용한 유격전이 전세를 역전시켰다. 병사들이 모두 본인의 휘하여서 작전전개의 일사불란함과 용맹함이 천지일체(天地一體)와 같았다. 이는 군신의 관계보다 깊은 혈육지정, 골육지정(骨肉之情)의 관계였다.

고을 주민은 하나같이 눈에 불을 켜고 참여했는데, 더러는 호미를 들고, 또 혹은 낫과 도끼를 들고, 젊고 늙은이는 돌멩이를 치마에 담거나 지게에 지고 와서 병사들에게 부려주며 힘을 보탰다. 그 기록은 다음과 같다.

-세상에서는 내가 행주에서 한 일을 공으로 삼는데, 이는 언제 살펴도 참으로 공이라 이를 만하다. 나는 항오(行伍) 사이로부터 일어나서 공을 쌓은 것이 여기에 이르는 동안 크고 작은 전쟁을 적잖이 치렀다. 그 중에 전라도(全羅道) 웅치·이치에서의 전공(戰功)이 가장 컸고, 행주의 전공은 그 다음이다. 그런데 나는 끝내 행주의 전공으로 드러났으니, 이의 이치를 알 수 없는 노릇이다. 그러나 그 이유를 굳이 적시하면 다음과 같도다.

-대체로 이치·웅치의 싸움은 변란이 처음 일어날 때에 있었으므로 적(賊)의 기세는 한창 정예하였고, 우리 군사는 단약(單弱)하였다. 또 건장한 군졸이 없어서 군력(軍力)과 군정(軍情)이 흉흉하여 믿고 의지하기가 참으로 어려웠다. 그런데도 능히 군과 민이 죽을 힘을 다하여 혈전(血戰)을 벌여서 천 명도 채 안 되는 단약한 군졸로 열 배나 많은 사나운 적군을 막아내어 끝까지 호남(湖南)을 보존시켜 국가의 근본으로 삼았으니, 이것이 바로 어려웠으나 뜻이 있었던 이유이다.

이때에는 서로(西路)가 꽉 막히어 소식이 통하지 않았고, 나라가 패하여 흩어져서 사람들이 대부분 도망쳐 숨어버렸으므로, 내가 비록 공은 있었으나 포장(홍보)해줄 사람이 없어 조정에서 그 소식을 들을 길이 없었다. 그러니 비유하자면 마치 사람이 없는 깜깜한 밤에 자기들끼리 서로 격살(擊殺)한 것과 같았으므로, (나의)공이 드러날 수가 없었다.

-행주의 싸움은 내가 공을 세운 뒤에 있었으므로, 권위(權位)가 이미 중해져서 사심(士心)이 귀부(歸附)하였고, 호남의 정병(精兵)과 맹장(猛將)이 모두 휘하에 소속되어 군사가 수천 명을 넘었고, 지리(地利) 또한 험고하였으며, 적의 숫자는 이치에서보다는 많았으나 그 기세가 이미 쇠하여졌으니, 이것이 공을 세우기가 쉬웠던 이유이다. 게다가 마침 천병(天兵)이 나와서 주둔하고 우리나라 제로(諸路)의 근왕병(勤王兵)들이 바둑알처럼 기전(畿甸)에 포치(布置)되었을 때, 강화(江華) 따위로 피란 가 있던 도성(都城)의 사민(士民)들이 우리의 승전(勝戰)을 학수고대하던 터에 나의 승전이 마침 다른 여러 진영(陣營)보다 먼저 있었으니, 이것이 바로 공이 쉽게 드러날 수 있었던 까닭이다. (이항복 <백사집>의 잡기 중 권율 어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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