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도 땅에서 위로받은 사도세자의 원혼

최혁 주필의 전라도역사이야기

46. 사도세자(思悼世子)와 무안 운남의 동암묘(東巖廟)
남도 땅에서 위로받은 사도세자의 원혼
영조의 狂氣와 노론·외척들 음해로
사도세자 뒤주에 갇혀 억울한 죽음
세자, 꿈에 나타나 마을 머물기 청하자
무안 주민들 동암 묘 세우고 원혼 달래
신안 임자 수도리에도 세자 관련 ‘장조단’
비슷한 전설, 세자 위패 모시고 섬겨
 

동암묘 정문과 묘. 동암묘는 정면 3칸 측면 1칸의 맞배지붕으로 되었으며 건물 내의 바닥에는 중앙에 오석(烏石)으로 된 장조황제 위패가 놓여 있다.

조선 500년의 역사는 당쟁의 역사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당쟁으로 인해 수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다. 왕들은 권력을 잡고 유지하기 위해 당쟁을 이용하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당쟁을 부추기기도 했다. 신하들은 왕들의 권력욕을 이용해 자신들에게 유리한 권력구조를 만들어내기도 했다. 그 와중에 발생한 것이 사도세자(思悼世子)의 비극이다.

사도세자는 영조의 아들이다. 영조의 둘째 아들로, 왕위에 오를 인물이 뒤주에 갇혀 비참하게 죽고 말았다. 어떤 사람들은 사도세자의 정신세계에 문제가 있었다고 말한다. 왕세자라는 신분에 어긋나는 각종 비행과 잘못을 저지르다 영조의 미움을 받아 결국 죽고 말았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이는 너무도 단선적인 결론이자 해석이다.

세도세자의 죽음은 그리 간단치 않다. 영조의 편집증에 가까운 권력욕, 광기(狂氣)나 다름없는 정치보복, 노론과 소론의 세력다툼, 장인이면서도 사위인 세도세자가 왕이 되는 것을 어떻게든 막으려 했던 홍봉한과 외척세력의 조직적인 음해, 계비로 들어온 정순왕후 외척들의 견제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해 발생한 것이 세도세자의 죽음이다.
 

영조영정. 영조는 권력을 내놓을 의사가 없으면서도 어린 세자를 대리청정토록 해 극심한 스트레스를 주었다. 영조는 세조가 자신이 싫어하는 소론의 입장에 서자 결국 사도세자를 희생시켰다.

■사도세자의 억울한 죽음과 동암묘(東巖廟)

사도세자는 억울하게 죽임을 당했다. 1762년 임오년 윤5월 여름이었다. 영조는 창덕궁 내 휘령전 앞뜰에서 사도세자에게 자결을 요구했다. 이에 사도세자는 땅에 머리를 부딪치며 용서를 구했다. 세자의 이마에서 피가 흘러내렸다. 세자는 허리띠로 목을 맸다. 그러자 신하들이 자결을 만류했다.

이에 영조는 화를 내며 큰 뒤주를 갖다 놓고는 사도세자를 그 안에 가두었다. 영조는 뒤주의 틈새를 막고 뒤주 부근에 풀 더미를 쌓아놓아 푹푹 찌는 열기가 뒤주를 뒤덮도록 했다. 한여름의 열기와 갈증, 굶주림, 그리고 공포 속에서 세자는 8일 동안 버티다 결국은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영조와 정순왕후 및 영의정 김상로·경기감사 홍계희 등 노론 벽파(老論 ?派)가 합작해서 만든 참혹한 죽음이었다.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혀 죽은 임오화변(壬午禍變) 뒤 세자는 입에 올리면 안 되는 유령인물이 돼버렸다. 영조는 세자의 장례를 치르고(7월 23일) 세손(후에 정조)을 동궁으로 책봉했다(8월 1일). 2년 뒤 영조는 세손을 효장세자의 후사로 입적시켰다. 그러면서 사도세자를 추숭하지 말라고 엄중하게 지시했다.
 

장조단에서 내려단 본 수도 전경

영조는 얼마 되지 않아 아들을 죽인 사실을 후회했다. 사도세자가 죽은 지 5년 후인 1767년 음력 4월 초8일에 영조는 사도세자를 죽인 것을 후회하는 내용의 사언시(四言詩)를 썼다. 세손인 홍재 이산(弘齋 李: 정조)을 위로하고 신하들의 간언을 경계한다는 의미였다. 사언시에는 자식을 죽인 아버지의 회한이 담겨 있다.

“嗚呼陟降(오호척강) 오호라, 오르내리는 혼령이시여!

眷顧不肖(권고불초) 못나고 어리석은 저를 돌보아 주셨다.

嗟世臣(차세신) 슬프다. 신하들이여!

弗暮君(불모군) 아둔한 임금을 본받지 말라

영조는 죽기 한달 전인 1776년 2월 4일 어명을 내려 임오화변을 거론하지 말라고 단속했다. 자신의 광기와 폭력 때문에 아들이 죽었다는 사실을 묻어두고 싶었기 때문일 게다. 사도세자를 다그치면서 죽음으로 몰아간 사람이 바로 영조 자신이었음을 뒤늦게 깨달았던 것 같다.

사도세자는 아들 정조가 즉위 후 추존되기 시작했다. 정조는 즉위 열흘 후에 사도세자에게 장헌(莊獻)세자라는 시호를 올리고 묘소와 사당을 영우원(永祐園)과 경모궁(景慕宮)으로 부르도록 했다(정조 즉위년 3월, 1777년). 또 그 해 8월에는 영조의 능을 참배하면서 동시에 사도세자의 능을 참배했다.

정조 즉위 후에야 백성들도 사도세자의 죽음에 대해 공개적으로 애도를 표할 수 있었다. 이런 분위기에서 등장한 것이 사도세자의 혼을 모시고 있는 무안 운남면 소재의 동암묘다. 섬 지역에는 임경업(林慶業, 1594~1646)장군이나, 최영(崔瑩, 1316~1388)장군처럼 억울하게 죽은 장수나 영웅들을 신으로 모시는 사례가 꽤 있다. 사도세자 역시 억울한 죽음을 당했기에 신격화 대상이 됐다.
 

신안군 임자도 수도리(지도)

사도세자의 혼을 모시고 있는 또 다른 곳은 인접해 있는 신안군 임자면 수도리 수도마을이다. 수도마을의 제당에는 방형의 돌담만이 남아 있는데 규모는 길이 740㎝, 너비 500㎝, 높이 180㎝ 정도이다. 이 돌담은 ‘장조단’으로 불리기도 한다. ‘장조단’은 사도세자의 빈 위패를 모시던 장소다. 이곳에서 사도세자 이야기와 관련된 철마가 출토되기도 했다.
 

임자 수도리 장조단. 사도세자의 위패를 모시던 곳이다.

■동암묘가 생기게 된 배경

무안 운남이나 신안 임자는 사도세자의 출생이나 죽음과는 아무런 관련성이 없는 곳이다. 그런데 어떤 연고로 이곳에 사도세자의 원혼을 위로하는 묘가 세워졌을까? 무안문화원에서 발간한 각종 책자(무안의 옛이야기)에는 동암묘가 생기게 된 배경이 다음과 같이 적혀 있다.

‘1777년(정조 1년) 사도세자의 어린 아들 정조 임금이 왕위에 오른 바로 그 해에 이 마을의 촌로(村老)인 성(成), 이(李), 박(朴)씨의 꿈에 한 귀인(貴人)이 나타났다. 마을 앞에 배 한척이 나타나더니 한 귀공자가 내려 마을 뒷산으로 올라가는 것이었다.

그는 주위를 둘러보더니 그를 보러 모여든 마을 사람들에게 “나는 선왕(先王)의 세자이니라. 원한이 뼈에 사무친 채 나라 이곳저곳을 둘러보다 이곳에 이르렀느니라. 이곳 풍경이 너무 아름다워 내 영혼이 이곳에 머무르고자 하니 그리 알라” 하고는 사라지는 것이었다.
 

원동암 마을 전경. 사도세자가 마을주민들의 꿈에 나타나 이곳에 머물고 싶다는 뜻을 전해오자 마을주민들은 동암묘를 세우고 사도세자를 기렸다. 240여년 전의 일이다.

이튿날 주민들이 모여서 서로 지난밤 이야기를 하던 중 세 사람의 꿈이 같은 내용인 것을 알고는 어떤 의미가 있는 줄 몰라 궁금해하면서 헤어졌다. 밤을 맞은 세 사람에게 또 다시 세자의 혼령이 나타나 같은 말을 반복하고는 사라져버리는 것이었다. 다음 날에 다시 모인 세 사람은 똑 같은 현상에 놀라워하면서 어떤 일이 일어날지 걱정을 하고 있었다.

다음날 ‘바다에 뭐가 떠내려 온다’는 주민의 외침에 가서 살펴보니 까만 궤(櫃) 하나가 바다에 떠 있었다. 그제야 이틀간의 현몽이 이것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라 여기고 정성스럽게 모셔와 제단을 쌓고 모시니 이것이 동암묘의 첫 번째인 단이었다.

그러다 폐서인이 되었던 세자가 그의 아들 정조에 의해서 복위되고 고종 대에 장조(莊祖)로 추존되면서 일시 제단을 폐하기로 했다. 그러나 이후 사도세자가 다시 촌로들의 꿈속에 나타나고 마을에 재액이 생기자 인근 유림들과 함께 다시 사우를 세워 제사를 모시니 고종11년 1874년이다. 이것이 두 번째 변화인 제단이다.

그리고 1899년에 사도세자가 장조황제로 추존되면서 단을 훼철했다. 이후 다시 1918년 사당을 세워 면민들이 모시니 이것이 세 번째 변화인 사당이다. 1971년 현재의 모습으로 동암묘를 중건하여 군수가 제주(祭主)가 돼 모셔오다 현재는 마을 주민만의 제사가 되니 이것이 네 번째의 변화이다’
 

동암묘 정문

동암묘는 정면 3칸 측면 1칸의 맞배지붕으로 되었으며 건물 내의 바닥에는 중앙에 오석(烏石)으로 된 장조황제 위패가 놓여 있다. 또한 묘실 좌우로 동암묘 중수기 등 4기의 편액이 걸려 있다. 사우 입구에는 수령 100년이 훨씬 넘어 보이는 소나무가 두 그루 있고 좌측에 ‘장조황제동암묘비’가 세워져 있다. 향토문화유산 5호로 지정되어 있다.

이 마을에서는 ‘사도세자당제’, 또는 ‘당제’라 해서 제를 모셔왔는데 먼저 동암묘에서 제를 지내고 마을의 중앙에 있는 당산나무에 가서 다시 제를 지냈었다. 현재는 당산나무가 말라 죽어버린 관계로 동암묘에서 사도세자 당제만 지낸다.
 

동암묘

제사를 지낼 때에는 비린 음식을 먹었거나 상가에 조문을 갔던 사람은 ‘동티난다’ 하여 참석할 수 없으며 또 그 달이 出産 달인 임신부는 다른 마을에서 아기를 낳고 오도록 했다. 특히 제관으로 선정된 사람은 일주일간 몸조심 말조심 마음조심을 하였다. 또한 제사 사흘 전부터 샘을 가뒀다. 샘에 금줄을 쳐서 잡인의 출입을 금하고 황토를 뿌려서 사악한 기운을 몰아냈다.

동암묘는 두 개의 삼문과 두 그루의 소나무 그리고 묘정비와 재각으로 이뤄져 있다. 외삼문을 들어서면 두 그루의 소나무를 볼 수 있는데 수령이 150여년 정도다. 1874년 사우를 세울 때 심은 것으로 추정된다. 소나무 옆에는 1971년 세운 묘정비가 있다. 묘정비를 지나 내삼문을 들어서면 전면 3칸 측면 1칸의 맞배지붕의 묘당이 있다. 이 묘당이 사도세자의 영혼을 모시고 있는 재각이다. 이곳에는 사도세자 신위와 세 개의 현판이 걸려 있다.

10여 년 전에 사도세자당 옆에 한 무당이 집을 짓고 기도를 하며 산 적이 있었다. 기도를 열심히 올리며 치성을 드리던 그녀는 얼마 후에 마을을 떠났다. 떠나면서 사도세자당의 기운이 너무 세 감당할 수가 없다는 말을 남겼다’
 

동암묘비

■사도세자가 안식처로 삼은 무안 운남면 동암1리 원동암 마을

동암리(東巖里)는 운남면 소재지에서 동남 방향으로 3.5㎞ 떨어진 지점에 위치해 있다. 동암·신기·죽산·영해·용동 등 5개 마을로 이뤄져 있다. 호구총수에는 전좌리, 하전좌리로 기록돼 있다. 1912년의 자료에는 무안군 현화면 동암리로 나온다. 동암리는 큰 바위가 동쪽에 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 전해진다.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죽산리 신기동 영해촌 석교촌 서촌을 합하여 망운면 동암리로 묶여졌다. 이후 1983년 망운면과 운남면으로 분리되면서 운남면 동암리가 되었다. 원래 마을 뒤로는 병풍처럼 산이 감싸고 있었다. 왼쪽으로는 모래산이, 오른쪽으로는 상투머리라는 부리가 있어 전후좌우가 잘 짜여 진 마을이었다. 더구나 마을 앞으로는 2㎞가 넘는 넓은 백사장이 펼쳐 있고 해당화가 피어 있어 풍경이 아름다웠다.

그러나 1980년대 창포만이 막히면서 마을환경 많이 변했버렸다. 왼쪽의 모래산과 마을 앞의 백사장이 사라지면서 아늑했던 마을 풍경은 삭막하게 바뀌었다. 더욱 안타까운 것은 봄철과 가을철에 주민들이 잡아왔던 낙지가 잡히지 않는다는 것이다.

예전에는 하루 저녁 3시간 정도 낙지잡이를 하면 보통 30-40마리를 잡아서 농촌살림에 큰 도움이 됐다. 요즈음엔 5-6시간 잡이를 해도 5마리 잡기가 힘들다고 한다. 어진 것이다. 이 마을의 입향조는 김해김씨 김준희다. 김준희는 선조 때 사람으로 원래 영암 출신이다. 임진왜란으로 왜군이 자주 출몰하고 이를 토벌하기 위해 관군출입이 많아지자 이를 피해 이곳으로 이주해온 것으로 전해진다.
 

동암묘 제사때 사용되는 축문과 제물 목록. 사당안에 자리하고 있다.

■사도세자

사도세자는 조선 제21대 국왕인 영조의 두 번째 왕자로 이름은 이선, 자는 윤관(允寬), 호는 의재(毅齋)다. 영조는 조선의 국왕 중에서 가장 오래 살았고(82세) 재위기간도 가장 길다(52년). 정성(貞聖)왕후(1692∼1757)ㆍ정순(貞純)왕후(1745~1805) 등 왕비 2명과 정빈(靖嬪) 이씨(1694~1721)ㆍ영빈(暎嬪) 이씨(1696~1764)ㆍ귀인 조씨ㆍ후궁 문씨 등 후궁 4명을 두었다. 왕비에게서는 후사를 보지 못했고, 후궁에게서만 2남 12녀를 두었다.

첫 아들인 효장(孝章)세자는 즉위하기 전 정빈 이씨와의 사이에서 태어났지만(숙종 45년, 1719년 2월 15일) 9세로 요절했다. 둘째이자 마지막 아들인 사도세자는 그 7년 뒤에 태어났다(영조 11년, 1735년 1월 21일). 당시 영조는 41세로 당시로서는 적지 않은 나이였다. 국왕의 기쁨은 당연히 매우 컸다. 영조는 즉시 왕자를 중전의 양자로 들이고 다음해에는 왕세자로 책봉했다.

■대리청정이라는 덫에 걸린 사도세자

대리청정은 왕이 왕세자에게 군주로서의 훈련을 시키는 것이다. 사도세자는 14세 때인 영조 25년(1749)에 대리청정을 시작했다. 결과적으로 대리청정은 덫이 되고 말았다. 당시 조정을 장악하고 있던 노론세력은 정치적으로 소론을 지지하는 사도세자가 즉위하면 자신들의 목숨이 위험해질 것임을 알아차렸다. 그래서 정적이었지만 홍봉한 등과 힘을 합쳐 사도세자 제거에 나서게 된다.

영조 역시 이에 동조했다. 영조는 경종독살설에 시달리면서 경종의 충신들이었던 소론들을 죽음으로 내몰았다. 영조 재위 31년(1755년)에 벌어진 나주벽서사건(영조 31년,1755년에 윤지가 나주 객사에 붙인 벽서와 관련하여 일어난 역모 사건)과 토역경과 사건(과거시험에서 영조의 통치를 비난하는 답안지가 제출된 사건)으로 500여명의 소론 인물이 사형에 처해졌다. 이때 사도세자는 영조와 노론에 맞서 소론 신하들을 보호하려고 애썼다. 어린 나이의 세자는 노론의 전횡에 맞서 외로운 싸움을 벌이고 있었다.

수세에 몰린 사도세자가 더욱 궁지에 몰리게 된 것이 영조의 재혼이었다. 영조는 재위 35년(1759년) 66살의 나이로 15살의 정순왕후와 재혼했다. 정순왕후의 부친 김한구는 사도세자가 있는 한 권력을 잡을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사도세자의 처 혜경궁 홍씨의 아버지 홍봉한 역시 자신이 속한 노론을 대적시하는 사도세자를 어떻게든 제거하려 애를 썼다.

아들을 믿지 못하는 영조의 괴팍함, 두 외척세력의 견제와 음해로 사도세자는 실의의 나날을 보낼 수밖에 없었다. 혜경궁 홍씨 가문과 정순왕후 가문은 권력다툼을 벌였지만 공동의 적인 사도세자 제거를 위해서는 힘을 합쳤다. 결국 이들의 비수는 사도세자를 찔렀다. 외형적으로는 ‘영조가 사도세자의 계속되는 비행해 격노해 뒤주에 가두고 죽인 것’처럼 보이지만 사도세자의 죽음은 권력을 지키려는 영조와 외척들의 합작품이었다.

역사학자 이덕일은 사도세자를 ‘정쟁의 희생양이었다’고 평가하고 있다. 이덕일은 그의 책<조선왕을 말하다>에서 사도세자 죽음의 원인을 다음과 같이 적었다.

‘세자는 지금으로 치면 대통령 당선자이다. 다만 현 임금이 사망해야 즉위하기 때문에 즉위 날짜를 모른다는 점이 대통령 당선자와 다를 뿐이다. 정상적인 국가라면 세자는 시강원에서 왕도교육을 받으며 미래를 준비해야 하는 존재였다. 그러나 신하가 임금을 선택하는 택군의 시대가 도래하면서 세자 역시정쟁의 대상으로 전락했다. 그 결정판이 사도세자였다’

영조는 자신에 반대하는 소론 강경파를 무려 500명이나 처형했다. 영조는 경종 때 자신이 살아남을 수 있도록 도왔던 소론 이광좌의 관작까지 삭탈했다. 수렴청정을 하면서 사도세자는 소론 사람들을 국문해 죽여야 한다는 노론의 주문에 응하지 않았다. 당대의 명필 이광사(李匡師)를 죽음의 기로에서 건져낸 사람도 다름 아닌 사도세자였다.

사도세자는 심각한 압박감을 받고 있었다. 영조는 대리청정이 시작된 3년 뒤인 재위 28년(1752) 12월 14일 양위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사도세자는 극력 만류했다. 그러자 국왕은 “네 효성이 밝혀지면 너를 위해 전교(傳敎: 임금의 명령)를 거두겠다”면서 <육아시>(蓼莪詩)를 읽게 했다. ‘육아’는 <시경>소아(小雅)의 한 편으로 ‘무성하게 자란 아름다운 채소’라는 의미다.

이 글은 부모의 기대에 미치지 못한 불효자가 자신을 책망하는 내용이다. ‘어떤 효자가 무성하게 자란 풀을 보고 아름다운 채소로 알았지만 살펴보니 쓸모없는 잡초였다’는 것을 빗대 ‘부모가 자신을 낳고 기르는 데 수고하면서 큰 인물이 될 것을 기대했지만 그렇게 되지 못해 부모에게 죄스럽다’는 의미를 비유한 글이다. 사도세자는 눈물을 철철 흘리며 <육아시>를 읽었고 전교는 철회됐다. 이 때 사도세자의 나이는 17세였다.

2년 뒤에도 비슷한 사건이 재발했다. 영조 30년(1754) 12월 대사간 신위(申暐)가 올린 상소를 트집 잡아 그를 종성(鍾城)으로 귀양 보냈다. 신위의 상소에는 ‘(영조가)지극히 공평하고 크게 중정(中正)해야 한다’는 대목이 있었는데 사도세자가 그 상소를 자세히 살피지 않고 영조에게 올렸다는 이유로 세자를 힐책했다.

영조의 분노가 심해 사도세자는 관(冠)을 벗고 뜰에 내려가 두 차례나 석고대죄(席藁待罪)했다. 땅에 머리를 짓찧기도 했다. 영조의 노기를 풀어주기 위해 사도세자는 새벽까지 눈물을 흘리며 용서를 구했다. 사도세자를 못마땅해 하는 영조의 질책과 내침은 이후 계속됐다. 3년 뒤에도 비슷한 일이 반복됐다.

이 때 사도세자는 영조의 꾸지람에 제대로 대답을 하지 못했다. 영조는 그런 세자가 더 못마땅해 화를 냈다. 악순환이었다. 사도세자는 걸핏하면 양위하겠다며 충성과 효성맹세를 강요하는 영조의 압박에 진저리를 내고 있었다. 또 매사를 마땅치 않게 여기며 꾸지람만 하는 아버지 앞에서 주눅이 들어 제대로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오죽했으면 사도세자를 제거하려고 했던 홍봉한 등 신하들까지도 사도세자가 제대로 대답을 하지 못한 것과 관련 “전하께서 평소에 너무 엄격하기 때문에 동궁이 늘 두려워하고 위축되어 제대로 말씀드리지 못한 것”이라고 해명할 정도였다. 홍봉한은 “동궁은 보통 때도 입시하라는 명령만 들으면 두려워 벌벌 떨며 쉽게 알고 있는 일도 즉시 대답하지 못했다”고 말하기도 했다.

이날 밤 사도세자는 영조 앞에서 물러나오다 기절해 버렸다. 청심환을 먹고 깨났지만 한참동안 말을 하지 못했다. 세자의 아버지(영조)에 대한 강박관념과 두려움은 그의 나이 22살 때 깊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영조 31년(1755) 약방 도제조 이천보(李天輔)는 “동궁이 요즘 가슴이 막히고 뛰는 증세가 있어 발자국 소리만 들어도 그렇게 된다”고 아뢰었다.

혜경궁 홍씨는 <한중록>에 사도세자가 앓은 병을 의대증(衣帶症)이라고 표현했다. 사도세자는 옷 입기를 극도로 싫어했는데, 이는 영조를 만나기 싫어서 생긴 병이었다는 것이다.

혜경궁 홍씨는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혀 살해된 사건인 임오화변(壬午禍變: 영조 38년 윤5월 )당일의 기록에서도 ‘정축년(1757. 영조 33)ㆍ무인년(1758) 뒤부터 병의 증세가 더욱 심해졌다. 발작할 때는 궁비(宮婢: 궁중의 계집종)와 환시(宦侍: 내시)를 죽였고, 죽인 뒤에는 후회하곤 했다. 임금이 그때마다 엄한 하교를 내려 책망했다. 세자는 두려워 질병이 더하게 됐다’고 적었다.

사도세자 나이 14세 때부터 시작된 대리청정은 시간이 흐를수록 세자에게 고통이 됐다. 노론 편에 서서 소론 사람들을 죽이려는 영조와, 소론을 보호하려는 사도세자 사이의 틈은 더욱 벌어졌다. 영조를 두려워하는 세자의 울렁증은 정신질환으로 진행됐다. 세자는 아버지의 계속되는 나무람에 기를 펴지 못했고 나중에는 대답하기가 어려울 정도로 위축된 모습을 보였다.
 

사도세자가 그린 것으로 알려져 있는 개그림(국립고궁박물관 소장)

세자의 불안한 심리상태는 정상적인 판단을 하지 못하게끔 했다. 이런 심리적 불안감에서 비롯된 여러 가지 실수와 기행은 후일 노론 사람들에 악의적으로 왜곡되고 부풀려졌다. 노론은 후에 자신들의 음해에 의해 사도세자가 죽임을 당했다는 평가를 받지 않기 위해 사도세자를 ‘죽어 마땅한 인간’으로 폄훼하고 망가뜨렸다.

이덕일은 ‘사도세자가 대리청정이라는 덫에 걸렸다’며 임오화변의 발생 원인에 대해 다음과 같이 진단했다.

‘세자 대리청정은 제왕수업이라는 점에서 바람직한 일이지만 2인자로서는 위험한 일이기도 했다. 하도세자는 즉위 때까지 철저하게 자신의 속내를 드러내지 않았어야 했다. 그러나 무인 기질의 세자는 속내를 감추고 있기에는 너무 가슴이 뜨거웠다. 세자는 섣불리 노론에 손을 댔고 노론은 세자제거를 당론으로 정했다. 영조가 여기에 동조한 것이 비극의 본질이었다’

■수원 화성의 현륭원
 

화성융릉. 사도세자와 부인 혜경궁 홍씨가 함께 묻혀 있다.

사도세자의 아들 정조는 왕에 올랐지만 노론세력의 견제와 암살위험으로 자신의 뜻을 쉽게 펼치지 못했다. 그러나 왕권이 어느 정도 자리 잡자 즉위 13년만인 1789년에 사도세자의 묘소를 화산으로 이장했다. 사도세자의 묘는 현재의 서울 동대문구 배봉산 아래에 있었다. 묘 이름은 수은묘(垂恩墓)였다.

1776년에 정조가 왕위에 오르자 장헌세자라는 존호를 올리고 묘를 원으로 격상하여 이름을 영우원(永祐園)이라 했다. 1789년(정조 13)에 영우원을 현재의 화산으로 옮기면서 현륭원(顯隆園)이라 칭했다. 1815년(순조 15)에 헌경의황후(혜경궁) 홍씨가 세상을 떠나자 이듬해인 1816년에 현륭원에 합장으로 원을 조성했다.
 

장조(사도세자)융릉

그 후 대한제국 선포 후 1899년(광무 3)년에 사도세자가 추존되자 능으로 격상되어 융릉이라 했다. 수원 화산은 경기도 여주에 있는 세종대왕의 묘소 ‘영릉’과 더불어 국내 최고의 명당으로 꼽히는 곳이다.

정조는 현륭원 조성에 정성을 다했다. 묘를 둘러싼 병풍석을 설치하고 당대 최고의 석공들을 동원해 아름다운 조각으로 꾸미도록 했다. 정조는 틈만 나면 현륭원을 찾아 아버지의 원혼을 위로했다. 정조는 다음해 2월부터 사망한 1800년까지 무려 12번이나 현륭원을 찾았다. 아버지 사도세자에 대한 애정과 회한이 얼마나 깊었는지를 헤아릴 수 있다.
 

융릉의 석물
정조어진

도움말/이덕일, 이한우, 이해준, 백창석, 이범석, 서대승

사진제공/무안군, 무안문화원, 신안군, 문화재청, 국립고궁박물관

/최혁 기자 kjchoi@hanmail.net

/정유진 기자 jin1@namdo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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