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계홍의 역사소설 깃발

충무공 정충신 장군<114>-제7장 비겁한 군주

조선왕조실록은 후일 “서인 황윤길을 비롯해 서장관 허성(허균의 형으로서 동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이성적 판단으로 황윤길과 같은 주장을 했다), 황진, 조헌이 기필코 왜적이 침입할 것이라고 주장하였지만, 서인들이 세력을 잃었기 때문에 인심을 요란시키는 것이다”라고 매도되고 배척되었다. 그래서 조정에 합리적인 담론은 형성되지 못했다.

그러나 권불십년이 아니라 권불일년이 난 게 선조 때 일이니, 김성일이 쫓겨나는 일은 정해진 절차였다.

선조실록 60권, 선조28년 2월6일자에는 “지난 임진년에는 김성일 등이 사설(邪說)을 주창(主唱)하여 왜노(倭奴)는 염려할 것이 없다고 하고, 왕이 너무 염려한다고 우려하면서 변방의 방비에 뜻을 둔 자를 서로 배척하여 순변사(巡邊使) 이일(李鎰)을 보내자는 것을 파기하기까지 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선조실록 70권, 선조 28년 12월28일에는 “상(임금)은 ‘성일은 타고난 성품이 편벽되고 강퍅하며 용심이 거칠다. 왜에서 돌아와서 왜노들이 배반하지 않을 것이라고 극력 주장함으로써 변경의 방비를 소홀케 하여 결국 이 난리가 터지게 하였다’말씀하시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임진왜란의 오판을 김성일에게 뒤집어 씌운 선조는 마침내 그를 체포해 국문을 하는데, 이때 경상우병사에 사고가 생기자 특지를 내려 그를 경상우병사로 임명해 경상도로 내려보냈다.

경상도는 벌써 일본이 점령한 곳이었고, 대부분의 지방 수령과 군관들이 도망을 가고, 일부는 왜병에 협력해 조선인의 두상을 잘라 왜군에 갖다 바치면서 상금을 받는 사람들까지 생긴 상황이었다. 따라서 위험한 곳이었고, 그를 경상도에 내려보낸 것은 거기서 죽으라는 뜻이나 마찬가지였다. 병을 일으켜 공을 세우면 사는 것이요, 그렇더라도 십중팔구 용맹하고 훈련이 잘된 왜 병사에게 목이 달아날 것이라고 본 것이었다. 국문하는 대신 사지로 보낸 것인데 비록 오판을 했을망정 강직하고 지휘력이 있는 그는 병을 일으켜 임무를 충실하게 수행해 살아나왔다.

선조는 이런 저런 상념에 젖었다가 휴 한숨을 쉬었다. 신하들에게 그렇게 상을 주고 벌을 주어도 나라는 도탄에 빠지고, 왜군은 벌써 평양성을 점령해버렸다.

“지난날 내가 국세가 위급함을 지나치게 걱정하여 풍진(風塵)의 경보가 뜻밖에 생겨나고 수습할 수 없는 재앙이 조석 사이에 일어날까 두려워하였다. 이에 거듭 경들을 번거롭게 하면서 망령되이 물은 일이 있었는데, 끝내 방비책을 진달하지 않았다. 만약 적변이 발생하면 팔짱을 끼고 앉아서 기다릴 것인가. 김성일 등이 망령되게 사설(邪說)을 주창하여 ‘왜적은 걱정할 것이 없다’고 하면서 내가 지나치게 염려하는 것을 기롱하였고, 변방 방비에 뜻을 둔 사람들까지 배척하였으며, 심지어는 순변사 이일(李鎰)을 파견하는 것까지 그만두게 하였다. 그러다가 왜적이 깊이 쳐들어오자 유성룡(柳成龍)·김응남(金應南)은 체찰사의 명을 받고서도 가지 않았고, 신입(申砬)은 시정의 건달 수백 명을 거느리고 행장(行長)의 10만 대군을 막다가 단번에 여지없이 패하여 나라가 뒤집어졌다. 이제 앞으로 이와 같이 하지 않는다면 매우 다행이겠다.”(선조 수정실록 35권, 선조 34년 2월1일 경오)

이런 때 소년 정충신이 승전보의 장계를 가지고 올라온 것이다. 그러니 들뜨지 않을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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