깊은 계곡과 산그늘이 세상을 잊게 해 주네…

최혁 주필의 전라도역사이야기
48. 강진 백운동 별서정원(白雲洞 別墅庭園)
깊은 계곡과 산그늘이 세상을 잊게 해 주네…
마음에 평안함을 안겨주는 백운동 별서정원
350여 년 전 조성 최근에 복원돼 힐링 명소
茶山이 사랑했던 곳, 12명소 화첩으로 남겨
 

백운동정원 전경

옛사람들은 서늘한 계곡을 피서지로 삼았다. 울울창창한 나무들은 한낮의 햇볕을 막아내 기분 좋은 서늘함을 만들어주었다. 계곡을 굽이돌아 흐르는 시원한 물은 몸과 마음을 모두 다 씻겨주었다.

나무들이 빼곡히 들어차 있는 계곡은, 지금으로 치자면 ‘냉방 잘 돼 있는 커피숍’이었다. 선비들은 그곳에서 시를 짓고 읊었다. 때로는 목청 좋은 남정네 소리꾼을 불러다가 우렁우렁 계곡을 흔들었다. 그렇지만 남정네들의 시연(詩宴)에 주로 부름을 당해 그 계곡에서 미성(美聲)을 뽑아냈던 이들은 목선과 목소리가 좋았던 여인네들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여름철 계곡은 사랑채 혹은 정원(庭園) 역할을 했다. 조선시대 이야기다.

남정네들은 세상을 차지했다는 기쁨에, 또는 세상이 자신을 버렸다는 울분에 술잔을 기울이며 시 몇 수에 자신의 마음을 담았을 것이다. 그러나 많이 가지고, 많이 채운 자가 계곡을 찾아오는 법은 드물다. 대개는 풍진 세상에 회의를 느낀 자, 탐욕과 다툼에 지친 이들, 절치부심하며 재기를 노리는 이들이 인적 드문 곳에 찾아와 자신을 추스르고 때를 기다렸다. 산과 계곡은 지친 자와 기다리는 자의 공간이라 해도 무방하다.
 

정선대에서 본 백운동정원 전경과 옥판봉 (월출산 구정봉). 옥판봉(玉版峰)은 월출산 구정봉의 서남쪽 봉우리다. 다산 선생은 <백운첩>에서 ‘옥판상기’(玉版爽氣):월출산 옥판봉의 상쾌한 기운)가 12경 중 으뜸이라 했다.

어떤 이들은 다시 세상에 나가기를 포기하고 자연을 벗 삼아 살기를 작정하곤 했다. 그들은 번잡함을 싫어했다. 형식과 의례를 갖추지 않아도 언제든지 자신을 만나주고 품어주는 자연을 사랑했다. 자연에 대한 사랑은 번뇌도 안겨주지 않았다. 마음을 얻으려면 그만큼의 마음을, 아니 그 이상의 마음을 주어야 하는 법이다. 혹은 태산 같은 마음을 주더라도 얻지 못하는 것이 남녀 간의 세계다. 자연은 그럴 필요가 없다.

계곡은 그냥 바라만 보고 있어도 되는 곳이다. 마음을 세상 사람과 세상일에 빼앗길 염려가 없는 곳이다. 달이 기울고 차면 꽃이 피고, 성하(盛夏)의 녹음(綠陰)이 짙어지고, 홍엽(紅葉)이 볼을 물들게 하고, 백설(白雪)이 온 천하를 뒤덮어주는, 세월만 흐르는 곳이다. 평정과 안온. 사람들은 그래서 계곡에 정원을 짓고 마음을 달랬다. 사람들은 그런 정원을 별서정원(別墅庭園)이라 불렀다.

별서정원은 세속의 번잡함과 권력다툼에 지친 이들이 전원이나 산속 깊은 곳에 집을 짓고 자연과 더불어 유유자적한 생활을 즐기는 곳을 의미한다.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별서정원은 담양 소쇄원, 완도 보길도 부용동정원, 강진의 다산초당정원과 백운동정원 등이다. 모두 전남에 있다. 이중 호남의 3대 정원은 소쇄원과 부용동정원 그리고 백운동정원이다. 백운동 정원은 그 아름다움에 비해 그리 널리 알려져 있지 않았지만 최근 들어 찾아오는 이들이 크게 늘고 있다.

■월출산(月出山)과 백운동(白雲洞) 별서정원

백운동 별서정원은 월출산 옥판봉 남쪽 자락에 위치하고 있다. 행정구역상 전남 강진군 성전면 월하리 안운 마을에 해당되는 곳이다. 월출산의 정면은 광주방향에서 영암읍을 지나면서 보는 곳이 아니다. 강진에서 영암 쪽으로 가다가 보는 쪽이 정면(남쪽)이다. 월출산은 가수 하춘화의 ‘영암아리랑’과 ‘낭주골 처녀’ 등을 통해 널리 알려지면서 ‘영암 월출산’ 이라 고유명사화 돼 있다.

영암사람들은 월출산이라는 이름이 영암 구림마을을 기준으로 해서 생긴 것이기에 영암의 산이라는 주장을 내세우고 있다. 월출산 자락에 사람들이 모여들어 살기 시작한 것은 청동기시대였다. 구림마을에서는 청동기 시대의 옹관묘가 발견되기도 했다. 영산강이 만나는 오가기 좋고, 농사짓기 좋은 곳 산기슭에 사람들이 맨 처음 둥지를 틀었으니 산의 주인은 마땅히 영암사람들이라는 것이다.
 

백운동별서정원 안내판

월출산은 산 이름이 그러하듯, ‘달을 뿜어내는 산’이다. 둥실 달이 떠오르는 풍경이 기가 막히게 아름다운 곳이다. 그래서 영암 구림마을이 있는 북쪽이든, 월남사와 무위사가 자리하고 있는 남쪽이든, 달(月)이름이 들어간 마을이 지천이다. 월출산이 바다를 대하고 있는 강진 성전에는 월하, 월남, 상월, 월송, 대월, 송월, 월평, 월산, 달뫼 등 달 ‘月’字가 들어간 마을이 지천이다.

그러나 영암에는 월곡, 월산, 월암, 월악 등 강진에 비해 ‘月’자가 들어간 마을 이름이 그리 많지 않다. 그런데 영암사람들은 달뜨는 곳의 기준이 구림이라 말한다. 구림에서 봐야 산에 달이 뜨는 것이 보이기에 월출이라 이름 지어졌다고 한다. 월출산을 배경으로 해 달이 떠오르는 장면을 볼 수 있는 곳이 영암이니 월출산에 관한 한, 영암사람들의 우월감은 일견 타당성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북쪽에서 보는 월출산은 기암괴석이 하늘을 찌르듯 솟구쳐 있어 다소 날카로운 느낌을 준다. 남도에서 흔히 접할 수 있는 ‘무던한 산’이 아니다. 외형으로만 치면 악산(嶽山)에 가깝다. 뼈만 남은 골산(骨山)이라 말하는 이도 많다. 그렇지만 정면 쪽의 월출산은 분위기가 다르다. 정상에서 바다 쪽으로 내려뻗는 줄기가 북쪽보다 훨씬 너그럽다. 산 아래로 제법 널찍한 평지들을 보듬고 있어 전체적으로 매우 평안한 느낌을 주고 있다.
 

백운동정원 전경

영암사람들의 주장과는 달리 강진 사람들은 월출산을 부를 때면 강진 월출산이라는 말을 고집한다. 전라도 말로 ‘턱도 없는’소리라 일축한다. 유행가 때문에 영암 월출이 돼버렸지만 월출의 정령과 안온함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곳은 강진 땅이라는 것이다. 실제 강진 월남마을에서 월출산 정경을 바라보면 어쩌면 이렇게 아름다운 곳이 있을까?라는 탄성이 절로 나온다.

그렇지만 그것이야 강진·영암사람들의 가벼운 언쟁에 불과하다. 애초부터 누구의 산이라는 것, 자체가 무리한 주장이다. 산은 바라보는 자들의 산이요, 오르는 자들의 산이다. 강진사람도 영암 쪽의 형형함을 사랑하고, 영암사람도 강진 쪽의 밝고 따스함을 사랑한다. 비록 풀치(草峙)와 누릿재(黃峙)가 두 지역을 가로막고 있으나 예전부터 두 지역은 남도의 삶과 한을 같이 겪고 품어 온 삶의 공동체였다.
 

월남마을에서 바라본 월출산

강진 쪽의 월출산 자락은 평안하다. 그래서 속세를 떠나온 이들의 마음 수양에 적합했던 모양이다. 예전에 월출산 남쪽 자락에는 수많은 절들이 자리하고 있었다. 강진문화원이 발간한 <월출산사지>(月出山寺址)에 따르면 월출산 남쪽 자락에는 무위사와 월남사, 백운사, 숭람사 등의 큰 사찰이 있었다. 이 사찰 등을 중심으로 해 백운암과 안정암등 크고 작은 암자 35동이 18개의 월출산 골짜기마다 둥지를 틀었다.

백운동 정원은 그런 아름다운 월출산 남쪽 자락의 한복판에 숨겨져 있는 별세계(別世界)다.

백운동 정원은 성전 쪽 국립공원 월출산 주차장 왼편의 도로를 2~3분 정도 자동차를 타고 가면 위치해 있다. 백운동 정원은 월출산에서 흘러내리는 맑은 물과 그 물을 쉼 없이 아래로 흘려보내는 계곡, 수백그루의 자생동백나무, 그리고 벽오동과 단풍나무, 귀목나무, 팽나무 등이 어우러져 비경을 연출하고 있다.

■백운동 정원

백운동은 ‘월출산에서 흘러내린 물이 다시 안개가 되어 구름으로 올라가는 마을’이라는 뜻으로 붙여진 이름이다. 월출산 다원 주차장에서 계곡 쪽으로 경사진 길을 내려가다 보면 곧 백운동 정원이 나온다. 흙길은 소담하다. 몇 걸음 되지 않아 숲속에 들어와 있음을 절로 느낀다. 키 재기를 하듯 나무 들이 드리운 잎들은 하늘을 가려 전체적으로 어둑하다. 그 틈을 비집고 들어온 햇살이 가끔씩 눈을 부시게 한다. 계곡을 흐르는 물은 맑고 물소리는 청아하다.

느린 걸음으로 동백나무와 대나무 숲을 지난다. 혹 헛딛을까봐 아래를 내려다 본 뒤 문득 고개를 들어보니 몇 채의 집이 문득 눈앞에 펼쳐져 있다. 집과 원림 사이에는 얕은 담장이 있다. 작가가 처음 백운동 정원을 찾아올 때 이 담장이 눈에 거슬렸다. 속세를 떠나 산속으로 들어온 사람이 무슨 자연과 담을 할까? 그런 생각이었다. 그런데 집을 함부로 드나드는 짐승들 때문에 담장을 칠 수밖에 없었다는 이야기를 듣고 고개가 끄덕여졌다.

집주인인들 담을 치고 싶었으랴? 날이면 집안에까지 들어와 물어가고 헤집어놓는 날짐승들의 해코지가 견딜 수 없었기에 그리했을 것이다. 백운동 정원의 담은 그래서 경계(境界)가 아니다. 생활의 편의를 위한 장치일 뿐이다. 집주인들은 이런 부조화를 고려해 담장의 높이를 대폭 낮춘 것으로 보인다. 담장은 나지막하다. 그래도 짐승들에게는 넘기에 부담스러운 높이다. 담장을 자연의 일부인 것처럼 놓으려한 주인장들의 마음이 헤아려진다.

담장 안의 풍경은 고즈넉하다. 지난해(2017년)에 이곳을 들렸을 때는 어수선하기 짝이 없었다. 보수공사를 하느라 뜰 여기저기를 파헤쳐놓고 장비들을 쌓아두는 바람에 시선은 헝클어졌고 심사는 불편했다. 적요함 가운데 원림의 그늘과 처마 밑에 고여 있는 백운동의 서기(瑞氣)를 느껴보고자 했건만, 일하는 인부들의 어지러운 발걸음만 보고 왔었다. 먼발치에서만 백운동 정원의 원경을 바라보고 올걸~하는 후회가 막심했다.

그런데 올해 다시 찾은 백운동 정원은 단장을 마친 새색시의 모습으로 작가를 반겨주었다. 흰머리 성성한 분을 만나러 갔다가 정체 모를 젊은 사람을 만난 것 같은 뜨악한 기분이 든 것은 사실이다. 어디든, 어떤 건물이든 오래 세월을 견뎌낸 곳에는 세월의 이끼가 끼어있어야 제맛이다. 백운동 정원 집들에는 금방 손질한 나무기둥과 어제 칠한 듯 색이 뚜렷한 문들이 너무 많아 고색창연(古色蒼然)이라는 말과는 거리가 있다.
 

계곡으로 향하는 별서정원의 쪽문과 담

계곡을 따라 내려오다 보면 쪽문을 만나게 된다. 집에서 계곡으로 나올 수 있는 가장 가까운 곳에 쪽문이 나있다. 그런데 이 쪽문 계단의 배치가 고개를 절로 끄덕거리게 한다. 쪽문에서 계곡으로 가는 계단은 ‘ㄱ’형이다. 계단에서 내려오면서 오랫동안 계곡을 응시할 수 있게끔 계단을 꺾어서 배치시켰다. 시선유도 형 계단이다. 사소한 듯싶지만 집 주인의 심미안적 배려가 없으면 불가능한 배치다.

백운동 별서정원 내부와 계곡 주변에는 집주인장의 꼼꼼한 배려와 의도가 깃들어 있는 이런 장치들이 몇 개 있다. 이런 멋스러움은 계곡의 정취와 어우러져 더욱 빛을 발한다. 백운동 별서정원은 원림의 자연과 인공이 조화롭게 배치돼 있는 공간이다. 자연미와 인공미가 월출산 자락의 계곡을 배경으로 해 빛을 발하고 있다. 여기다 비개인 날, 정선대에서 바라보는 운무(雲霧)의 옥판봉 풍경은 평생을 잊지 못할 만큼 큰 감동을 안겨준다.

■백운동 정원과 다산 정약용선생

백운동 별서 정원은 본디 고려시대 백운암이 있던 자리다. 이긍익이 지은 <연려실기술>에는 ‘강진의 백운동은 월출산의 남쪽에 있다’는 내용이 있다. 백운동 별서정원은 조선중기 처사 이담로(李聃老:1627~1701) 선생이 조성했다. 이담로는 중년부터 백운동 별서정원을 조성하기 시작했다. 이후 둘째 손자 이언길(李彦吉)을 데리고 들어와 살았다. 제2대 백운동 별서정원의 주인이 된 이언길은 평생에 걸쳐 백운동 별서정원을 가꿨다.

이담로 시대에는 백운동 정원이 별서였지만 이언길이 1756년 온 가족을 데리고 이사해오면서 백운동 정원은 생활 주거 공간으로 탈바꿈됐다. 백운동정원은 이담로 이후 대대손손 자손들에게 이어져온 유서 깊은 생활공간이다. 현재 백운동 별서정원의 주인은 11대 동주인 이승현씨이다.

이담로는 주자가 학문을 널리 알려 남을 이롭게 하고자 세운 ‘백록동 서원’을 염두에 두고 자신이 조성한 정원 이름을 백운동(白雲洞)이라 지었다고 전해진다. 한편으로는 은거하는 곳이라는 뜻이 담긴 이름이다. 백운(白雲)은 백운재공곡(白雲在空谷)을 의미하는 것으로 흰 구름(白雲)은 은자(隱者)를, 빈 골짜기(空谷)는 은거하는 곳으로 풀이된다.
 

백운동12경

이담로가 만든 정원은 곧 널리 알려지게 됐다. 많은 이들이 이곳을 찾아보기를 희망했다. 그중 한 사람이 강진에 유배와 있던 다산 정약용 선생이었다. 1812년 음력 9월12일 50세의 다산은 초의선사, 제자들과 함께 월출산을 오른 뒤 백운동 주인인 이덕휘의 집에 들러 하룻밤을 자게 됐다. 이는 백운동주(白雲洞主) 이덕휘의 아들 이시헌이 다산의 제자였기 때문이었다. 다산이 백운동에 들린 것은 초의선사(艸衣禪師 1786-1866)의 권유 때문이었다. 당시 다산은 다우(茶友)였던 아암(兒菴) 혜장(惠藏)스님을 잃고 깊은 슬픔에 빠져있었다. 다산은 1801년 겨울, 강진으로 귀양을 온 뒤 외롭게 지냈다. 5년이 지난 봄 즈음 혜장스님을 만나 친하게 지냈다. 혜장스님은 대둔사(현 대흥사)로 출가해 나이 30세에 두륜회(학승들의 학술대회)의 주맹(主盟)이 될 만큼 불교와 유교에 밝았다. 학문이 깊었던 두 사람이 만난 때는 다산이 44세, 혜장이 34세였다. 혜장은 다산에게 차의 깊은 맛을 소개했고 이후 두 사람은 다우(茶友)가 되어 자주 만나게 됐다.

그러나 혜장은 병을 얻어 40세의 나이에 일찍 세상을 떴다. 이후 다산은 초의선사와 차를 나누며 혜장을 잃은 시름을 달랬다. 1809년 다산은 초의선사를 처음 만났는데 나이 차이가 24살이었다. 초의선사는 다산을 스승으로 대했는데 다산의 마음을 기쁘게 해줄 생각에 백운동 방문을 권유했던 것이다. 다산과 초의선사 그리고 제자들은 이덕휘의 집에서 하룻밤을 자고 백운동을 둘러보았다.

때는 1812년 가을. 이담로가 정원을 만든 지 100년이 지난 뒤였다. 다산은 백운동 계곡의 정경에 매료됐다. 다산은 이곳에서 백운동을 찾은 이유와 백운동 풍경의 아름다움을 적은 서시(序詩)를 썼다. 그리고 다산초당에 돌아온 뒤 8수의 시를 마무리했다. 또 초의선사에게 3수(홍옥폭,풍단,정선대)를, 제자 윤동에게 1수(운당원)를 쓰도록 했다. 그리하여 모두 14수(서시, 백운동12경, 발문)의 시가 완성됐다.
 

백운첩에 그려진 다산초당도

동시에 정원 주변의 빼어난 풍경 12곳을 정해 ‘백운동 12경(景)’을 정하고 초의선사에게 백운동 전경(白雲洞圖)을 그리게 했다. 그리고 다산초당 주변도 그렸다. 그런 다음 백운동 12경에 시를 더한 것과 다산초당도(茶山草堂圖)를 합쳐 시화첩(詩畵帖)을 만들었다. 이것이 바로 시화첩 형식의 <백운첩>(白雲帖)이다. 다산은 <백운첩>을 백운동정원의 주인인 이덕휘에게 선물했다고 한다.

백운첩은 하마터면 사람들의 기억에서 사라질 뻔했던 백운동 계곡이 명소(名所)로 자리 잡게 된 계기가 됐다. 백운동 정원은 구한말과 일제 강점기 그리고 6·25전쟁 등의 격동기를 거치며 사람들의 뇌리에서 잊혔다. 그러다가 <백운첩>이 2001년 발견돼 공개되면서 300년 만에 예전의 백운동 정원모습이 세상에 알려지게 됐다. 백운동 정원은 강진군 향토문화유산 제22호로 지정돼 있다.

강진군은 <백운첩>에 나와 있는 모습과 백운동 5대 주인 이시헌의 <백운세수첩>(白雲世守帖), 유구들을 근거로 해 2007년 백운동 정원 복원공사를 시작했다. 6·25전쟁 이후에 지어 살림집으로 쓰던 낡은 본채를 헐고 다시 지었다. 또 집안에 화계(花階)를 만들고 주변공간을 정리했다. 화계는 궁궐· 절 등의 뜰에 층계 모양의 석축을 쌓은 것이다. 그곳에 꽃이나 나무를 심어 마치 꽃이 층지어진 땅에 들어서 있는 것처럼 보이도록 했다.

■백운동 12경(景)

백운동은 담장 안쪽의 ‘내원(內園)’과 담장 바깥의 ‘외원(外園)’으로 나눠진다. 내원은 본채와 사랑채가 있는 상단, 3단의 화계로 이루어진 중단, 두 개의 연못이 있는 하단으로 구성돼 있다. 월출산 자락의 경사와 계곡 지형을 따라 만들어진 외원에는 동백 숲(산다경)과 대숲(운당원)등 숲 공간이 있다. 또 물이 흐르는 계류 공간, 정자가 있는 정선대 공간, 담장 뒤편의 후원 공간 등이 자리하고 있다.
 

백운동 정원 12경

백운동 정원 옆에는 자그마한 계곡이 있는데 그곳에는 백운동(白雲洞)이라 새겨진 바위가 있다. ‘白雲洞’ 글자는 이담로 선생이 새긴 것이라 전한다. 백운동 12경(景)은 아래와 같다.
 

백운동정원 정선대에서 본 옥판봉 (월출산 구정봉)

◇1경 옥판봉(玉版峰)-옥판봉은 월출산 구정봉의 서남쪽 봉우리다. 다산 선생은 <백운첩>에서 ‘옥판상기’(玉版爽氣):월출산 옥판봉의 상쾌한 기운)가 12경 중 으뜸이라 했다.

◇2경 산다경(山茶徑)-산다경은 백운동 별서정원에 들어가는 동백나무 숲 사이로 난 작은 길을 뜻한다.

◇3경 백매오(百梅塢)-백매오는 바위언덕 위에 심어둔 백그루의 홍매다. 다산선생은 ‘산 빛 어린 속에서 오가노라면 온통 모두 암향 속에 있는 것 같다’고 표현했다. 지금은 두어 그루만 남아있다.

◇4경 홍옥폭(紅玉瀑)-백운동 별서정원 외부에 위치해 있는 폭포다. 단풍나무 빛이 비친 폭포의 홍옥 같은 물방울이라는 뜻이다. 다산 선생은 홍옥폭에 대해 ‘천봉에 빗방울 쏟아지더니 냇물이 백 갈래로 갈리어 난다. 온통 단풍나무 속을 따라서 죽정 앞을 부딪치며 지나가누나’라고 표현했다. 예전에 물이 풍부할 때에는 물레방아도 있었다고 전해진다. 현재는 물이 흐르지 않고 있다.
 

정선대와 정선대에 오르는 계단. 백운동은 담장 안쪽의 ‘내원(內園)’과 담장 바깥의 ‘외원(外園)’으로 나눠진다. 내원은 본채와 사랑채가 있는 상단, 3단의 화계로 이루어진 중단, 두 개의 연못이 있는 하단으로 구성돼 있다. 월출산 자락의 경사와 계곡 지형을 따라 만들어진 외원에는 동백 숲(산다경)과 대숲(운당원)등 숲 공간이 있다. 또 물이 흐르는 계류 공간, 정자가 있는 정선대 공간, 담장 뒤편의 후원 공간 등이 자리하고 있다.
백운동정원 연못
백운동정원 유상곡수

◇5경 유상곡수(流觴曲水)-백운동 별서정원 내부에 자리하고 있다. 유상곡수는 잔을 띄워 보낼 수 있는 아홉 굽이의 작은 물길이라는 뜻이다. 유상곡수연은 진나라 때 왕희지가 삼월 삼짇날 열었던 연회에서 비롯됐다. 상류에서 흘러내리는 물길이 돌아나가는 곳에 술잔이 떠 내려 오면 이를 받아 마시며 시를 읊었다고 한다.

백운동 유상곡수는 별서정원 외부 계곡물이 담장 아래 뚫린 구멍으로 들어와 다시 담장 밖을 나가는 구조로 되어있다. 복원공사를 통해 물을 담아두기는 했으나 흐르지 않고 있다.
 

백운동 정원 창하벽

◇6경 창하벽(蒼霞壁)-백운동 별서정원 외부에 위치해 있는 절벽이다. 계곡 다리를 건너자마자 앞을 가로막는 거대한 암벽이다. 푸른빛을 띠고 있다. 다산선생은 창하벽에 새겨져 있는 글씨가 없자 이를 아쉬워 해 붉은 먹으로 글씨를 썼다. 현재 붉은 글씨는 찾아볼 수 없다.
 

백운동 정원 정유강

◇7경 정유강-용 비늘 같은 붉은 소나무(정유)가 위치해 있는 언덕이다. 백운동 11경인 정선대도 정유강에 위치해 있다.
 

백운동정원 모란체

◇8경 모란체-백운동 별서정원 내부에 있는 돌계단 식 화단으로 모란이 심어져 있디. 백운동 9경 취미선방 앞에 위치해 있다.

◇9경 취미선방(翠微禪房)-사랑채로 쓰였던 세 칸 초가집을 말한다. 산허리에 있는 수수하면서 꾸밈이 없는 작은 방이라는 뜻이다.
 

백운동 정원 풍단

◇10경 풍단(楓壇)-창하벽 위에 붉게 물든 단풍나무가 심어진 단을 의미한다.
 

정선대와 정선대에 오르는 계단

◇11경 정선대(停仙臺)-청하벽 위에 자리하고 있는 정자다. 이곳에서 신선이 머물렀다는 백운동 1경 옥판봉이 보인다. 정선대는 백운동 별서만의 독특한 공간 연출이 이뤄진 곳이다. 정선대는 차경(借景)개념의 존재다. 차경은 본 건물에서 보이지 않는 주위 풍경을 바깥 건물을 통해 끌어오는 것이다.

백운동 정원은 담장과 숲으로 가려져 있어 바깥 풍경을 볼 수 없다. 정선대에 올라야 월출산 서남쪽의 옥판봉과 정원 전체를 한눈에 볼 수 있다. 정선대는 내원에서 볼 수 없는 월출산의 풍경을 외원에서 확보하는 용도로 세워졌다.
 

백운동정원 운당원

◇12경 운당원-백운동 별서정원 외부에 위치한 왕대나무 숲이다. 이 대밭에 자생하는 차나무에서 생산된 것이 그 유명한 백운옥판차이다. 백운옥판차는 백운동 옥판봉에서 생산된 차라는 뜻이다.

도움말/강영석, 이상근, 김선태, 강진문화원
사진제공/위직량, 강진군, 더숲조경연구소

/최혁 기자 kjchoi@hanmail.net
/정유진 기자 jin1@namdo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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