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자뷔

데자뷔

<최유정 동화작가>
 

새벽에 눈이 떠졌다. 벌떡 일어나 신문을 뒤적였다. 신문을 뒤적이다 말고 가방 깊숙이 처박혀있던 공책을 꺼냈다. 그리고 공책을 뒤적이며 그동안 끼적여 둔 메모를 살피기 시작했다. 사실, 나는 요 며칠, 곧 있을 출판사 관계자와 만남 때문에 골머리를 앓았다. 출판사에서 기획하고 있는 제노사이드 관련 그림동화 중 난징학살과 6·25전쟁에 관한 글을 맡았기 때문인데 이번 미팅에는 적어도 이야기의 골간, 뼈대 정도는 가지고 가야 했다. 나는 간간히 적어둔 메모들이 번쩍이는 아이디어를 던져 줄 것이란 근거 없는 자신감을 가지고 공책을 성급하게 뒤적거렸다. 어느새 마지막 장에 이르렀다. 낭패였다. 아, 오늘도 아무것도 건지지 못했구나, 어쩌지? 나락으로 떨어진 기분이 들었다. 그런데 공책을 닫으려던 순간이었다. 나는, 나도 모르게 눈을 동그랗게 떴다.

“교과서를 덮어라. 교과서에는 없는 역사를 지금부터 공부하겠다.”

언제 적어둔 문장인지, 무엇을 통해 문장을 만들어 냈는지는 기록되어 있지 않았지만 ‘장면1’이라고 메모해 둔 걸 보니 이야기의 첫 장면으로 붙잡아 둔 기억인 것 같았다. 역사 수업 중 한 장면일 것이라 짐작되는 문장 밑엔 붉은 글씨로 “자신의 역사와 대면해야 한다. 용기가 필요하다”라는 문구도 적혀져 있었다. 나는 공책의 마지막 장을 펼쳐둔 채로 귀퉁이로 밀려나 있는 신문을 성급하게 끄집어 왔다. 지금 막 찾아 낸 내게는 희망과도 같은 몇 줄과 연결, 연관되는 기사를 바로 몇 분, 몇 초 전 읽은 기억 때문이었는데 참으로 기분이 묘했다. 난데없는 기시감(旣視感)이 믿기지 않았다.

[대한민국 주류 교체해 ‘평화·민주·인권 국가로 재탄생 의지] 지면 한 페이지를 거의 할애한 기사 맨 위 헤드라인에는 지난 3일 출범한 대통령 직속 ‘3·1운동 및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100주년 기념사업추진위원회’ 출범을 알리는 비장한 각오가 적혀져 있었다. 문재인 대통령은 이날 문화역서울284(옛 서울역사)에서 열린 기념사업추진위원회 출범 격려사에서 “3·1운동과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기념하는 일이 정의롭고 공정한 나라의 토대가 되어야 할 것”이라며 친일, 독재 세력 등에 핍박받던 독립운동, 촛불 시민을 주류로 바로 세우고 임시정부 정통성을 명확히 하는 것으로 우리나라의 비전을 새롭게 제시할 것이라는 포부를 밝혔다. 더불어 문재인 대통령은 “70년을 이어온 남북 분단과 적대는 독립운동의 역사도 갈라놓았다”며 “남과 북이 독립운동의 역사를 함께 공유하게 된다면 서로의 마음도 더 가까워질 수 있을 거라 생각한다”는 의견도 피력했다.

나는 밑줄을 긋는 심정으로 기사를 더 꼼꼼히 읽어 내려갔다. 기사 중, 공식 출범한 추진위원회가 과거 독립운동의 역사를 단순히 기념하는 데 그치지 않고 대한민국의 새로운 가치관을 만드는 ‘국가비전위원회’구실을 할 것이라는 내용이 눈에 들어왔다. 나는 무릎을 딱, 쳤다. 대한민국의 새로운 가치관을 만들어 갈 것이라는 기사 중 문구가 가슴에 그대로 꽂히는 기분이 들었다. 지금은 비록 실마리를 찾지 못 해 글 숲에서 헤매는 처지지만 출판사의 끈질긴 제안을 받아들일 때와 매우 흡사한 기분을 느꼈는데 신문기사와 메모 간의 데자뷔는 동지를 만난 느낌, 동반자를 찾아낸 느낌, 그도 아니면 역사바로세우기를 천명한 ‘3·1운동 및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100주년 기념사업추진위원회’가 내 손을 잡아 준 느낌이었다. 나는 언제부터 쓰지 못하고 있던 원고의 첫 줄을 오늘 당장, 시작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왠지 앞으로의 작업이 매우 잘 될 것 같은 가당찮은 생각까지 들었다.

사실이 그렇다.

역사왜곡은 대한민국뿐만 아니라 세계 곳곳에서 정당성을 갖지 못한 특권층, 권력들에 의해 수없이 진행되어 왔으며 지금도 진행되고 있다. 불순한 의도를 가진 특권층의 사리사욕을 채우기 위해 자행된 역사왜곡은 수많은 사람을 가해자와 피해자로 만들어 버렸는데 사람들은 이유를 알지도 못하고 죽여야 했고 이유를 알지 못하고 죽임을 당해야 했다. 이유를 알지 못한 채 그도 아니면 거짓 명분에 속아 손에 피를 묻히고 죽임을 당해야 했던 많은 사람들. 그래서 왜곡된 역사는 그 자체로 역사의 주인인 민중을 배반한 모독과 모욕인 것이다. 정의와 상식이 제대로 작동되는 사회를 만들지 못하면 집단적인 기억 상실은 계속 강요될 것이고 거짓된 신화는 연이어 만들어 질 것이다. 그런 맥락에서 이번 ‘3·1운동 및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100주년 기념사업추진위원회’ 출범은 매우 각별한 의미를 갖는데 능력 없는 내겐 분명 버거운 작업일 수 있겠지만 앞으로 진행될 두 권의 그림동화, 난징학살과 6·25전쟁에 관련된 작업 역시 개인적인 의미를 뛰어넘어 역사의 한 장을 정리하고 왜곡된 역사를 바로 세운다는 지점에서 매우 각별한 의미를 갖는다고 할 수 있다.

난데없는 기시감, 데자뷔로 다시 글 쓸 용기와 실마리까지 챙긴 아침. 나는 오늘 아침 내가 느낀 데자뷔가 많은 장소, 공간, 그리고 많은 시간에서 많은 사람들에게로 이어지길 바란다. 왜곡된 역사를 바로 세우려는 움직임이 사회 곳곳에서 전개되길 바라며 정의와 상식이 사회적 가치로 우뚝 서는 대한민국을 만들어 가려는 몸부림이 몇 해 전 촛불처럼 사회 곳곳으로 번져가길 바란다. 그 과정에서 나처럼 글을 쓰는 사람들도 이렇게 노력하고 있음을 함께 기억하고 함께 용기 얻을 수 있었으면 좋겠고, 아프고 슬픈 역사가 대한민국 나아가 세계 그 어느 곳에서도 더 이상은 되풀이 되지 않기를 바란다. 정말, 자신의 역사와 대면해야 할 시기, 그럴 용기가 반드시 필요한 시기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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