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흉년들자 무안사람들 시장 열고 필요한 물건 서로 바꿨다”

최혁 주필의 전라도역사이야기
49. 조선 최초 시장인 무안장(務安場)
“흉년들자 무안사람들 시장 열고 필요한 물건 서로 바꿨다”

<조선실록 성종 4년 시장개설 관련 최초의 기록>
나주평야와 영산강 끼고 있어
식량풍부·교통 편리해 物産집합
무안 큰 시장 차츰 他地 확산
영산강변에도 수산시장 들어서
조선 때 무안시장은 관아 옆 위치
現 무안읍사무소 일대가 시장자리
 

김홍도 풍속화첩 중 행상 부분(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조선 최초로 시장(市場, 場市, 市井)이 들어선 무안

옛날 사람들은 필요한 물건들을 어떻게 구입했을까? 답은 ‘장(場)에서 구입했다’이다. 물물교환이든 돈을 주고 샀든, 장(시장)을 통해 생활에 필요한 것들을 구했을 것이다. 그러면 이 장은 언제 생겼을까? 머나먼 옛날부터 물건을 사고파는 시장 같은 곳이 있었을 법한데 이에 대한 기록은 그리 많지 않다.

국내의 경우 시장과 관련된 첫 기록은 <조선왕조실록>에 등장하고 있다. 조선실록 성종4년(1473) 기록에는 ‘1470년 큰 흉년이 들자 전라도 무안 사람들이 한 달에 한두 번 읍내거리에 시장을 열고 필요한 물건을 서로 바꾸었다’는 내용이 있다. 신숙주는 이 물물교환 장소를 ‘장문(場門)’이라 불렀다. 한편으로는 물건을 사고파는 장소를 장시(場市) 혹은 시장이라 했다.

무안사람들은 교환을 통해 흉년을 이겨내려 한 것 같다. 아무래도 식량을 구하는 것이 주 목적이었을 것이다. 돈 있는 사람들은 금붙이 같은 귀하고 값비싼 물건들을 장문에 가져와 쌀과 보리 등을 가져갔을 것으로 추정된다. 우선 먹어야 사는데 흉년에 몸에 치장하는 것들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여기서 유념해야 할 사항은 조선에 흉년이 든 1470년, 그 이전에도 많은 장문(시장)이 있었을 것인데 마치 그런 일이 처음이었던 것처럼 ‘흉년이 들자 무안에 장이 섰다’는 표현이 등장한다는 것이다. 이는 무안 시장의 규모가 매우 컸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무안은 비옥한 나주평야를 끼고 있는 데다, 서해안과 인접해 있어 각종 농수산물이 풍부했다.

또 영산강 뱃길이 서해안에서 나주까지 이어져 물건들을 운반하기에 매우 편리했다. 그래서 전국적으로 흉년이 들자 식량을 구하려는 사람들이 육로와 바닷길을 통해 무안과 나주 일대로 몰려들었고 영산강 초입인 무안에 큰 장이 들어선 것으로 추정된다. 물자와 교통의 중심지였던 만큼 자연 큰 시장이 들어섰고 이런 소식이 조정에까지 전해진 것으로 보인다.

무안에 생겨난 장은 차츰 영산강 상류 쪽으로 확산돼 갔다. 1480년대 전라관찰사 김종직은 나주객사 앞 망화루에 올라 쓴 시에서 영산강변에서 열리는 수시(水市)를 언급했다. 비슷한 시기에 살았던 이예라는 사람 역시 나주의 풍속을 거론하면서 ‘이곳 사람들이 점포를 열어 장사를 한다’고 적었다.
 

김득신이 그린 귀시도. 장에서 돌아오는 모습을 그린 것이다(개인소장)

■시장은 어떤 곳에 들어섰을까?

조선시대에 시장에 관한 기록이 등장해서 그렇지, 사실 이 땅에는 그 이전부터 물건을 교환하거나 사고파는 시장이 있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송나라 사람 서긍이 쓴 <고려도경>에 보면 ‘한낮에 상하 모든 계층이 관아 주변에 모여 물건을 교역했다’는 대목이 나온다. 고려시대에도 관아 주변에 시장이 들어섰음을 추정해볼 수 있다.

고려·조선시대에 장이 들어선 장소는 사람통행이 많은 곳이었다. 그러면 어디가 사람왕래가 잦았던 곳일까? 그곳은 관아주변이었다. 관아주변에는 군사들이 많았고, 진상품과 특산물들을 모아 한양으로 싣고 가는 일꾼도 많았다. 감옥에 갇힌 사람들을 수발하느라 먹을 것과 입을 것을 구하는 사람들도 제법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어느 시·군이든 조선시대 시장터의 위치를 쉽게 가늠해볼 수 있다. 현재 시군 청사가 들어서 있는 장소(일제강점기 이후 이전을 하지 않았다면)는 대부분 예전 관아가 있던 곳이다. 관아 옆에는 감옥이 있었고 군사들이 훈련을 했던 넓은 공터인 장대 터가 있었다. 일제 강점기 때 일본사람들은 감옥 터와 장대 터에 일황(日皇)에 충성하는 조선신민들을 키우기 위해 국민학교(초등학교)를 세웠다.

이런 이유로 대부분의 시군 청사 곁에는 초등학교가 들어서 있다. 세월을 거슬러 올라가면 지금의 시군청사는 관아 터였고 그 관아 터 곁에는 장대 터와 감옥이, 또 그 곁에는 시장(장시:場市)이 자리하고 있었던 것이다. 시내 혹은 읍내 한복판에 있는 청사가 비좁아 새로 청사를 지어 외곽으로 나가는 바람에 ‘관아+장대터(감옥)+시장’의 시가지 구도를 헤아리기 힘들지만 예전의 시장은 대부분 관아 근처에 자리하고 있었다.
 

조선시대 최초로 시장이 들어섰던 무안읍성 시장터. 무안읍사무소 앞 일대

무안군이 만든 <마을유래지>에 따르면 조선시대 최초로 섰다는 무안시장 자리는 무안읍소재지가 있는 성남리 일대로 추정된다. 성남리 일신동(日新洞)의 옛 이름은 장터거리, 시장통이었다. 성남리는 4개 마을로 구성돼 있었는데 주민들이 많이 거주하게 되면서 1988년 8개 마을로 분리됐다. 이때 마을이름을 정하게 됐는데 주민들은 성남리 일번지라는 뜻을 지닌 성일동(城一洞)을 제시했다.

그렇지만 당시 무안읍사무소는 북한 지도자를 연상케 하는 이름이라며 성일동이라는 이름 대신 일신동을 택했다고 전해진다. 일신동 마을 구역은 무안신협과 파크랜드부터 서울약국, 매일시장을 거쳐 불무제 다리까지이다. 매일시장은 하천이 복개돼 만들어졌는데 낙지골목처럼 하천이 있었던 곳을 경계로 한쪽은 성남1리이고 맞은편은 성남 2리에 해당된다.

이 마을 주변에 무안읍성이 있었다. 무안읍성은 세종12년(1430년)에 축조된 성이다. <세종실록지리지>에는 둘레가 473보로 기록돼 있다. <동국여지승람>에는 둘레가 2천700척, 높이 15척으로 성안에 6개의 우물이 있다고 나타나 있다. 성동제와 만창 등에서 내려오는 물이 개천을 이뤄 성을 싸고돌면서 자연스레 해자(垓字:적의 침입을 막기 위해 성 둘레에 도랑처럼 파놓은 물길) 역할을 했다.
 

불무제아래 시장통 모습. 무안읍성 안에 있던 시장은 광복후 이곳으로 옮겨졌으나 다시 와동으로 이전했다.

읍성에는 남문과 동문, 서문 등 세 개의 문이 있었으며 성안에 시장이 형성돼 있었다. 무안시장은 무안읍성 내인 현재의 무안읍사무소 앞에 형성돼 일제강점기까지 유지됐다. 그러나 광복 이후 1948년 현재의 불무제 아래인 시장 통으로 옮겨졌다. 이후 인구가 증가하면서 시장을 이용하는 사람들이 크게 늘자 1981년 와동장터로 이전됐다.

■시장의 확산

15세기 후반 등장한(문헌상으로) 시장은 이후 급속히 늘어났다. 전라도와 경상도, 충청도 지역으로 빠르게 번졌다. 처음에는 15일이나 10일 간격으로 열리던 개시(開市:장날)일도 5일로 짧아졌다. 군사들이 있던 병영이나 관아 주변에 들어서던 시장은 1700~1800년대 들어서는 산간지역에까지 퍼졌다. 1800년대 중반 조선전역에는 1천여 개의 시장이 있었다.

조선의 왕과 관리들은 농업을 중시하고 상공업을 천시했다. 조선 중반까지 민간인들이 시장을 여는 것도 억제했다. 그렇다고 해서 물건을 사고파는 일을 막을 수는 없었다. 당시 농민들은 자급자족할 수 없는 농기계나 소금·생선·약재들을 상인들을 통해 구입했다. 농민들은 생산한 쌀과 곡식들을 가지고 나와 필요한 물품들로 바꿔갔다.
 

권용정이 그린 부상.(간송미술관소장)

시장에서 물건을 매매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직접 생산자였다. 농민들은 쌀을, 수공업자들은 농기구와 가구들을 갖고 나와 매매했다. 예전에 이들은 무거운 짐을 지거나 이고 마을을 돌아다니며 물건을 팔고 필요한 것들을 샀다. 그러나 시장이 열리자 그럴 필요가 없어졌다. 농민이나 수공업자 모두 생산자인 동시에 소비자였다. 이런 까닭에 시장은 며칠 간격을 두고 열릴 수밖에 없었다. 농민들은 5일이나 10일 단위로 물건을 사도, 생활하는데 아무런 불편이 없었다. 수공업자들 역시 제품을 만드는데 시간이 필요했다. 그래서 5일장 형태의 시장운영은 농업중심의 조선사회에는 매우 적합했다.
 

전라감사겸위무사가 남원 오지리 한학모에게 발급한 통행증

행상들은 농어촌에 필요한 물품을 공급해주는 매우 유용한 사람들이었다. 조선조정은 행상들에게 나라에서 발급하는 통행증인 행장(行狀)을 발급해주었다. 행상은 육로를 이용하는 육상(陸商)과 바닷길이나 강을 이용하는 수상(水商), 즉 선상(船商)이 있었다. 조정은 선상에게 더 많은 세금을 부과했다. 육상보다 훨씬 더 많은 물품을 취급했기 때문이다.

행상들은 농어촌을 돌아다니는 대신 하루 왕복 거리 인근에서 열리는 시장을 다니며 물건을 팔았다. 행상들은 각 시장에 자리를 마련하고 물건을 팔았다. 행상을 할 때보다 발품을 적게 판 대신 이익은 더 많이 올릴 수 있었다. 박리다매의 상업형태가 가능해진 것이다. 자연 거리가 가까운 시장들은 열리는 날짜가 겹치지 않게끔 조정됐다.

시장은 읍 크기와 인구 수에 따라 규모가 달랐다. 큰 읍에서는 대규모 시장이 들어섰는데 큰 장 주변의 작은 장들은 날짜를 달리해 섰다. 자연스럽게 상거래 형태도 큰 장 상인들을 중심으로 해 바뀌게 됐다. 큰 장 상인들은 작은 장들에서 나온 물건들을 모아 팔거나 다른 곳으로 보내는 도매상 역할을 했다.
 

1900년대 지게에 옹기를 지고 팔러다녔던 옹기장수들의 모습

■광주의 시장(市場)

광주의 장과 관련된 기록은 강항이 쓴 <광주향교상량문>이 최초다. 강항은 정유재란 때 일본군에게 끌려가 귀국한 뒤 <간양록>을 쓴 인물이다. 강항은 <광주향교상량문>에서 ‘광주향교가 광주읍성 안에 있는 장과 가까워 상인들의 이익을 다투는 소리와 잡인들이 음주가무를 즐기는 소리가 크게 들린다. 또 기름 바른 여자들이 사람들을 현혹하는 등 공부할 분위기가 아니어서 향교를 성 밖으로 옮기게 됐다’고 적었다.

이 기록에 따르면 권수평이 광주원님으로 봉직하고 있을 때인 1488년 광주읍성 안에 있던 향교가 지금의 광주공원 옆으로 옮겨졌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향교 옆에는 시장이 있었음을 헤아릴 수 있다. 그렇다면 1488년 당시 광주향교는 어디에 위치해 있었으며 시장자리는 과연 어디쯤일까?

조광철 광주시립민속박물관 학예연구사는 광주향교는 광주읍성 동문 안쪽에 있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주장하고 있다. 조광철씨는 그 근거로 1952년에 편찬된 <광주향교지>에 ‘향교가 동문 안에 있었다’는 기록을 들고 있다. 또 1900년대에 작성된 <조선지지자료>에 을 보면 광주군 성내면 ‘사정리’라는 동네에 ‘고향교평(古鄕校坪)’이란 터가 있다는 기록을 근거로 적시하고 있다.

이 기록은 기대승이 ‘광주향교를 성 안에서 서문 밖으로 옮긴 뒤에 그 원래 터를 밭으로 만들어 경작했다’는 내용과 부합된다. 조광철씨는 ‘사정리’라는 동네는 동문 안에 있던 동네였으므로 ‘광주향교지’의 기록대로 광주향교 동문 안쪽에 있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간주하고 있다.

그런데 조씨는 광주읍성 동문 일대에 장이 있었다는 기록이나 구전이 없다는 사실을 들어 북문 밖인 지금의 충장로4가 일대를 시장터로 지목하고 있다. 충장로 4가는 충장파출소 맞은편 일대로 옛 지명은 시리(市里)였다. 시리는 ‘장이 서는 동네’라는 뜻이다. 1872년 그려진 광주지도에도 이곳 지명이 시리로 나오지만 장터는 광주천변으로 나타나 있다.
 

1917 광주큰시장 모습. 지금의 부동교 방면 넓은 백사장에 작은 장이 섰고, 현대극장 앞에 큰 장이 섰다.

즉 광주읍성안에 있던 시장은 북문 밖으로 옮겨졌다가 최종적으로 광주천변에 자리를 잡았다. 광주천변의 광주 장은 큰 장과 작은 장으로 나뉘어 열렸다. 1770년에 편찬된 <동국문헌비고>에는 18세기 후반에 광주장이 큰 장과 작은 장으로 나눠져 있다고 기록돼 있다.

조씨는 여러 가지 자료들을 검토한 끝에 1770년대 광주지역에는 모두 8개의 장이 있다고 결론짓고 있다. 이는 광주 큰장과 작은장을 비롯 서창장, 대치장, 신장, 선암장, 박산장, 접의장 등이다. 서창장은 지금의 서구 서창동, 대치장은 지금의 담양 대전면 소재지(당시에는 대전면이 광주에 속했다), 신장은 광산구 동곡동에 있었다.

또 선암장은 지금의 광산구 선암동에 있었다. 어등산 기슭에 선암역이라는 역참이 있었는데 시장 이름은 여기서 비롯됐다. 박산장은 광산구 덕림동의 고암마을에 있었던 장이다. 조선시대에는 나주에 속했었다. 접의장은 조선시대 나주 북창(北倉)이 있던 광산구 산수동 용강마을에 있었다고 추정된다.

■광주천(光州川)이라는 이름이 생기게 된 배경

지금의 광주천변은 직강공사가 이뤄져 매우 좁으나 그 이전에는 강폭이 매우 넓었다. 갈수기에는 둔치가 넓게 펼쳐져 사람들이 모이기에 좋았다. 광주읍성에서 가깝고 장소도 넓어 시장이 들어서기에는 안성맞춤인 곳이었다. 광주천변의 큰 장은 규모가 매우 컸던 것으로 여겨진다.
 

큰 장이 들어섰던 광주교 일대. 직강공사로 둔치가 없어져 버렸는데 큰 장은 넓은 둔치에서 열렸다.

큰 장이 섰던 곳은 옛 현대극장 앞 백사장이었다. 작은 장은 지금의 부동교 아래 백사장에 자리했다. 1896년 9월11일 광주를 찾은 지도군수 오횡묵은 3일 뒤 광주 큰 장을 구경한 뒤 ‘인파가 마치 바다와 같고 장옥의 수를 헤아릴 수가 없었다’고 기록했다.

광주천이라는 이름은 1916년에 붙여진 이름이다. 지금의 광주천은 조선시대에는 건천으로 불려졌다. 건천이라는 이름은 중종 25년(153)에 편찬된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처음 등장한다. 이 책에 나오는 건천에 대한 묘사는 다음과 같다.

‘건천은 본현의 남쪽 5리에 있다. 무등산 서쪽 산록에서 나와 서북으로 흘러 칠천으로 흘러들어간다’

금동 앞을 흐르는 광주천의 옛 이름은 금계다. 동구 금동의 옛 이름은 금계리인데 동네 앞을 흐르는 계곡물이 비단처럼 곱게 흐른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일제강점기 때 금계리는 금정이 됐고 광복 이후에 금류동, 금계동으로 바뀌었다가 지금은 금동이라는 이름으로 불린다.
 

작은 장이 섰던 부동교 (불로교)일대

불로동 쪽의 광주천은 조탄이라 했다. 대추여울이라는 뜻이다. 16세기 명종 대에 예조참판, 충청도 관찰사를 지낸 양림동 출신 정만종의 호가 조계였다. 정만종의 자신이 살던 집 앞 하천 이름 조탄을 조계로 바꾼 뒤 호로 삼았다. 광주천의 또 다른 이름은 서천이었다. 광주천이 광주읍성 서문(지금의 황금동)을 지나친데서 비롯된 것이다.

일제강점기인 1916년 건천, 조탄, 조계, 서천이라고 불리던 하천은 광주천이라는 밋밋한 이름으로 바뀌게 된다. 조선총독부는 1914년 마땅한 하천이름을 정하지 못할 경우 발원지가 되는 산이나 하천이 흐르는 큰 고을의 이름을 따서 정하라는 지침을 내렸다. 그래서 광주천이라는 이름이 생겨나게 됐다.

■광주장시(光州場市) 변천사

일제강점기였던 1919년 광주천 작은 장터에서 만세시위가 벌어졌다. 일제는 조선인들이 모이는 것을 꺼려해 천변의 장터를 사동으로 옮겼다. 그런데 일제는 사동시장이 광주공원 신사의 경관을 해친다는 이유로 사동시장을 다시 1940년대 공설운동장 부지였던 양동 일대로 옮겼다.

지금의 양동시장 일대는 1920년대 이전까지만 해도 사람이 살기 어려웠던 둔치였다. 물이 차면 늪지였고 물이 빠지면 백사장이었다. 그런데 1920년대 광주천에 제방이 축조되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제방 뒤쪽으로 전남도시제사공장등 여러 공장이 들어서면서 사람들이 몰려들어온 것이다.
 

작은장이 있었던 부동교에서 큰 장이 있었던 광주천과 양동시장을 바라본 모습.

일제는 1927년 광주천 직강공사를 실시했다. 이때 일제는 광주천 큰 장과 작은 장을 합쳐 옛 태평극장 앞 둔치(지금의 사동)에 사정시장을 만들었다. 사동의 사정시장은 앞에서 밝힌 대로 양동 일대로 옮겨가게 된다. 이 과정에서 사정시장의 규모는 대폭 줄어들게 된다. 이유는 물자가 부족했기 때문이다.

1940년 사동시장을 양동으로 옮길 당시 일제는 경제적으로 매우 곤란한 상황이었다. 1941년 태평양전쟁이 시작되면서 상황은 더 악화됐다. 물자가 귀한 탓에 건물을 새로 짓기가 힘들었다. 그래서 기존의 사정시장 건물을 그대로 뜯어서 새로운 양동시장 부지에 세웠다. 그러나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결과적으로 470개에 달하던 시장의 점포수가 100개로 크게 줄었다.

■광주 양동시장

양동시장은 시장이 자리하고 있는 지역인 양동(良洞)이라는 지명에서 유래했다. 지금의 양동 일대는 과거에 샘몰이라 불리던 동네였다. 큰 샘이 있어서 붙여진 이름이다. 그런데 이곳에 큰 시장이 들어서자 ‘돈을 쫓지 말고 사람들에게 이익이 되는 시장이 되도록 하라’는 의미로 양동이라 이름을 지었다.
 

양동 시장 전경

광복은 양동시장 발전에 획기적인 계기가 됐다. 우선 ‘천정공설시장’(遷町公設市場)이라는 일본식 이름 대신 양동시장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됐다. 태평양 전쟁으로 전쟁터로 끌려갔던 많은 징병자들이 돌아와 장사를 하면서 상인들이 크게 늘었다. 이와 함께 일본인들의 물자들이 홍수처럼 쏟아져 나와 다양한 물건들이 거래됐다.

양동상인들의 증가는 무분별한 노점상이 늘어나고 양을 속이는 일이 빈번하게 일어나는 원인이 됐다. 그러나 일제강점기 당시부터 사정시장에서 장사를 해오던 상인들의 노력과 헌신으로 차츰 개선되기 시작했다. 1965년 불이나 점포 70동이 전소되면서 위기를 맞았으나 1969년 12월 공설시장체제에서 민영시장으로 새롭게 출발하면서 재기의 발판이 마련됐다.
 

양동 시장 어물전

양동시장은 1970년대 들어 도매시장으로서 입지가 다져졌다. 1973년 농협공판장이 인근에 개설되면서 농산물이 양동시장을 경유하는 관례가 정착됐다. 그러나 1991년 각화동에 농산물도매시장이 생기면서 농산물 도매 기능을 상실하고 잇따른 백화점 광주입점과 대폭 늘어난 대형할인마트 등으로 인해 양동시장의 위상이 상당히 위축된 상태다.

양동시장은 1980년대까지 광주?전남은 물론이고 전라도의 최대 도매시장으로 자리하고 있었다. 그러나 백화점과 할인마트에 손님을 빼앗기고 고객들의 상품구입 행태가 인터넷을 이용한 홈쇼핑으로 바뀌면서 어려움을 겪고 있다. 그렇지만 2014년 민선6기에 들어서 서구청과 상인들이 힘을 합쳐 시장시설을 개선하고 노점상을 정비하는 등 자구노력을 꾸준히 기울이고 있다.

■조선시대의 거래수단

시장에서 상인과 손님들은 무엇을 돈으로 삼아 물건을 팔고 샀을까? 앞에서 밝힌 대로 무안시장과 관련된 <조선왕조실록> 기록은 ‘1470년 큰 흉년이 들자 전라도 무안 사람들이 한 달에 한두 번 읍내거리에 시장을 열고 필요한 물건을 서로 바꾸었다’는 것이다. 이 내용대로라면 초기에는 물물교환이 대세를 이룬 것으로 보인다.

물건의 값어치에 따라 수량을 정해 서로 필요한 물건을 확보한 것이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소규모 거래에는 ‘거친 면포’나 곡물이 사용됐다. 뒤에는 소액화폐인 동전도 등장했다. 조선후기에는 상거래가 많았던 곳에는 돈을 만드는 주전소(鑄錢所)가 설치돼 상업매매를 수월하게 만들기도 했다. 군사가 많았던 강진 병영성이 그런 경우다.

1678년(숙종4년)에는 금속화폐 사용이 강력하게 추진됐다. 동전인 상평통보는 한 푼(分)이었다. 열 푼이 1전(錢), 열전이 한 냥(兩)이다. 18세기 초에는 동전주조가 늘면서 전국적으로 동전이 사용됐다. 이에 따라 화폐로 사용되던 거친 면포는 자취를 감추게 됐으며 은화사용 역시 줄어들게 됐다.

1678년부터 1679년 사이 관에서 주조한 동전은 약 450만 냥이다. 불법적으로 만들어진 동전까지 포함한 18세기 초 조선의 동전유통량은 500만 냥에 달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한편 조선시대 1냥의 가치는 지금의 기준으로 어느 정도의 가치가 있을까? 이를 확실하게 정량화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쌀값을 기준으로 해 비교할 수 있지만 당시의 쌀값은 매우 비쌌다. 요즘은 쌀값이 너무 낮다. 단순비교가 힘든 것이다. 그렇지만 다른 방법이 없기에 쌀값 비교를 통한 화폐가치 비교가 가장 쉽다. 17세기 말의 문헌인 <행전절목>에는 당시 1냥은 쌀 1섬과 같다고 기록하고 있다. <속대전>(續大典)에 따르면 18세기에는 쌀 한 섬의 평균시세가 닷 냥이었다. 시대마다 한 냥의 가치가 크게 다르다.

2018년 6월 25일 기준 통계청이 발표한 산지쌀값은 80kg 한 가마 기준 17만3천180원이다. 2018년 7월 4일을 기준으로 한 쌀 20kg 소매 평균 가격은 4만7천402원이다. 1섬이 144kg이고 쌀값이 20kg에 5만 원 정도니 한 섬의 가격은 35만원이라 할 수 있다. 지금으로 치자면 1800년대의 1냥은 5만 원 정도의 화폐가치였다.

그렇지만 경복궁 중건을 위해 대원군 시절 마구 만들어내 유통시켰던 당백전과 당오전 때문에 1냥의 가치는 2만 원 정도에 불과했다. 구한말에 이르러서는 1냥이 1만 원 이하의 가치로 떨어졌다. 당백전과 당오전의 무분별한 유통은 백성들의 경제생활을 크게 악화시켰고 시장경제에도 악영향을 끼쳤다.

도움말/김정호, 노성태, 조광철, 이이화, 이수광, 박선홍, 이범식, 한국역사연구회, 무안군, 무안문화원, 무안군 무안읍사무소, 광주광역시 서구문화원

사진제공/위직량, 이범식, 윤상호, 백은영
/최혁 기자 kjchoi@hanmail.net
/정유진 기자 jin1@namdo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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