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깃발-충무공 정충신 장군<126>-제8장 의주행재소, 회한의 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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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무공 정충신 장군<126>-제8장 의주행재소, 회한의 땅

고려의 후견인이 된 원은 정치에 개입하며, 과도한 조공과 탐악질을 일삼았다. 견디다 못한 공민왕은 반원(反元)정책을 펴면서 자주적인 국가발전 계획을 설계했다. 그러나 개혁은 지보(遲步)상태로 정체해 있다가 공민왕이 암살된다. 정국은 극도의 혼란 속으로 빠져들었다. 권문세가와 신흥사대부간 대립이 격화되고, 대외적으로는 왜구와 홍건적의 침입이 빈발했다.

이런 과정에서 신흥강국 명나라가 원을 패퇴시키고, 명이 중국 대륙을 대표했다. 명나라는 원나라가 지배했던 철령(오늘의 함경도) 땅을 내놓으라고 위협했다. 공민왕의 대를 이은 그의 아들 우왕은 국사에 서툴렀다. 그래서 최영이 고려 조정의 실권을 장악하고, 명나라의 도발을 선전포고로 간주하고 요동정벌을 준비했다. 우왕과 함께 서경으로 가서 전국에서 징발한 5만 여명의 군사를 모아 요동정벌군을 편성해 위화도로 출정시켰다.

이런 가운데 조정은 급진파와 온건파간에 권력투쟁이 벌어졌다. 왕권을 교체하자는 급진파와 모순을 점진적으로 개선하자는 온건파간의 싸움은 치열했다. 온건파는 기득권의 주류였지만 정신적으로나 연령적으로 노쇠하고 개혁명분이 상대적으로 약했다. 온건파는 정몽주·이색이었고 급진파는 정도전이 대표적이었다.

이성계는 급진파 정도전과 합세해 역성혁명의 발판을 다지기 위해 위화도에서 군사력을 규합했다. 그 일환으로 정지 안주도도원수를 불러내 반은 위협적으로, 반은 애국충정을 담아 가담을 설득하고 있었다. 생각 끝에 정지가 결론을 내렸다.

“이 우군도통사를 따르겠소.”

이렇게 하여 1388년 음력 5월 22일, 이성계 도민수 정지는 최영이 편성한 5만 병력 중 정예부대를 빼내 요동을 정벌하는 대신 뒤로 돌아 개경을 향해 진군했다. 이때 의주·안주·삭주 백성들은 고려군이 패주한다고 땅을 치고 울었다. 이성계 반란군은 아흐레만인 6월1일 개경 부근까지 진군했다. 이틀 후에는 개경을 함락시키고 서경에서 돌아온 우왕과 최영을 생포했다.

정지는 회군에 대한 회의가 컸다. 정치군인의 길은 제 길이 아니라고 보고 부대를 이끌고 안주로 돌아갔다. 그리고 평생 군인의 길을 걸었다. 그는 직업군인으로서 정치적 중립 노선을 주창하고 행동으로 옮긴 장수였다. 적의 침입을 막고 영토주권을 확보하는 것이 군인의 의무로 여기고, 제독이 되어 변함없이 바다를 지켰는데, 그가 바로 정충신의 9대조다.

정충신은 눈앞에 펼쳐지는 위화도를 바라보며 정지 할아버지를 마음 속 깊이 그렸다. 정지 할아버지가 천상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내 사랑하는 손자야, 네가 할아비의 길을 따른다니 자랑스럽도다. 진정으로 무인의 길을 간다면, 조국 산하를 명경지수와 같이 보아라. 어느 누구도 흠집내려는 것을 막아야 하느니라. 나라가 흔들리고, 조정이 무능할수록 외적이 우리 강토를 노리는 것이니, 너는 결단코 흔들림없이 굳건해야 하느니라. 그것이 할아버지의 명예를 지키고, 가문의 영광을 세우는 길이다. 군인이란 오욕의 역사일수록 나라 지킴이의 활화산이 되어야 하느니라.

정충신이 할아버지에게 물었다.

“무인이 나라를 지켜도 문신 따까리밖에 안되잖아요.”

-진정한 무인은 자리에 연연하지 않는 법, 대접받고자 하는 자는 속물이니라. 국토를 지키는 것만으로 국토로부터 훈장을 받은 것이니, 삼천리 금수강산이 너의 것이로다. 그보다 더큰 상이 어디 있느냐.

“그렇다면 할아버지, 우리가 왜노에게 연전연패한 이유가 어디에 있나요?”

-도망쳤기 때문이다.

“누가요?”

-비겁자들이다.

“왜 비겁자들이 생겼나요?”

-현장에 있는 자가 가장 정확한 답을 얻는 일이니, 할아버지에게서 답을 구하지 마라. 네가 구하거라.

“그래도 잘 모르겠어요. 가까이서 보면 더 잘 안보이잖아요.”

-왕은 왕족들을 비롯해 후궁 상궁 환관들을 이끌고 변경에 가서 중국으로 내빼려고 대기하고 있다. 중국이란 나라가 그가 덮고 자는 편안한 솜이불이냐? 그런 그의 세계관이 한심하고 답답하도다. 게다가 사대부는 보물과 금붙이와 식솔들 챙겨서 도망을 가고, 장수들 역시 단거리 선수처럼 미친 듯이 도망을 가고, 군졸들 또한 군량과 마른 해산물을 훔쳐서 도망가고, 군사들은 에먼 백성의 목을 쳐서 왜 진영에 넘겨주며 상을 받는데 망하지 않겠느냐. 확 망해야 하느니라. 어쩡쩡하게 망하면 망하지 않는 것만 못하느니라. 어떤 군사조직, 어떤 결사체도 마찬가지다. 백성을 위한다고 붕당을 이루어서 지들끼리 잘 먹고 잘 살자는 짓하고, 백성 겁박하고 군림하고 호령하며 부패 덩어리로 사는데, 폭삭 망하지 않는 것이 이상하지 않느냐. 한두 사람 내친다고 되겠느냐? 폭망해야 하느니라. 확실하게 망해봐야 망한 맛을 아느니라.

<저작권자 © 남도일보,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김경태 기자의 다른기사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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