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보다 효가 먼저? - 최부

충보다 효가 먼저? - 최부

<김세곤 호남역사연구원장>
 

충(忠)보다 효(孝)가 먼저인가? <표해록(漂海錄)>의 저자 최부(1454~1504)는 성종의 어명을 따르다가 부친상을 소홀했다 하여 곤욕을 여러 번 치렀다.

1488년(성종 19) 6월14일에 성종은 북경에서 돌아와 청파역에 묵고 있는 최부에게 일기(日記)를 지어 바치도록 명했다. 최부는 8일 만에 <표해록>을 지어서 성종에게 바쳤다.

1488년 정월 그믐 날, 제주에서 추쇄경차관으로 근무하던 최부는 부친의 별세 소식을 들었다. 그는 고향 나주로 가기 위하여 급히 배를 띄웠다. 그런데 43명이 탄 배는 추자도 근처에서 태풍을 만났다. 13일 동안 표류하다가 중국 절강성 영파부 해안에 도착했다. 살았다고 환호한 순간 또 고난이 닥쳤다. 왜구로 몰린 것이다. 최부는 필담(筆談)으로 혐의를 벗었고, 중국 관리의 호송을 받으며 항주에서 운하를 따라 북경에 이르렀다. 북경에서 최부는 황제를 만났다. 그런데 그는 상복(喪服)을 고집하여 명나라 측과 실랑이가 벌어졌는데, 황제 알현 때만 예복을 입는 것으로 일단락되었다. 이후 최부는 요동반도를 거쳐 압록강을 건너 귀국했다. 제주도를 떠난 지 148일 만이었다.

<표해록>은 중국 항주에서 북경에 이르는 운하와 연안 도시 등의 번화한 모습을 생생히 기록한 15세기 후기 명나라 도시와 문화·풍습 연구에 매우 귀중한 책이다. 북경대학교 갈진가 교수는 <표해록>을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 일본 승려 에닌의 <입당구법순례행기>와 함께 중국 3대 여행기로 꼽고 있다.

한편 6월 22일에 성종은 최부에게 말과 쌀과 면포 50필을 하사하였고 최부는 서둘러 나주로 떠났다. 1489년에 최부는 모친상을 당하여 연거푸 부모상을 치렀다.

최부가 나주로 내려간 지 3년이 지난 1491년 11월 22일에 성종은 최부에게 사헌부 지평 벼슬을 내렸다. 그런데 임명을 받고 한 달이 지나도 최부는 사간원의 서경(署經 : 직책을 맡는데 하자가 없다는 동의서)을 받지 못했다. 1492년 1월 5일에 최부는 피혐(避嫌, 혐의가 풀릴 때까지 벼슬길에 나가지 않음)을 성종에게 청했다. 이러자 성종은 “그대는 죄가 없으니, 피혐하지 말라”하면서 사간원에 물었다. 정언 조형이 와서 아뢰기를 “최부가 바다에 표류하여 본국으로 귀환함에 이르러 비록 일기를 지으라는 어명이 있었다 할지라도 마땅히 슬픈 정(情)을 진달하고 빨리 빈소로 달려가야 했는데도, 여러 날 서울에 머물러 일기를 지으면서 조금도 애통해하는 마음이 없어 서경하지 않았습니다”하였다. 이러자 성종은 “최부는 나의 명을 받고 마지못해 한 것인데, 사간원에서 어찌하여 이런 논의를 내느냐?”며 짜증을 냈다.

그런데 1월 7일에 사헌부 장령 양면이 “사간원에서 지평 최부의 고신(告身)을 서경하지 않았는데, 대간(臺諫)은 일체(一體)입니다. 최부는 그 직위를 맡기 어렵습니다”라고 아뢰었다. 성종은 “사헌부의 말이 옳다. 그런데 내가 최부에게 일기를 지어 바치라고 명한 것인데, 사간원은 ‘비록 임금의 명이 있다 하더라도, 마땅히 추후에 짓겠다고 사양하고 급히 부친의 상사(喪事)에 달려갔어야 했다’고 하였다. 이는 크게 옳지 않으니, 비록 상중(喪中)에 있다 하더라도 군명(君命)을 어찌 감히 어긴단 말인가?”라고 전교하였다.

하지만 1월 9일에 사간원 정언 이계맹이 와서 아뢰기를 “최부가 초상(初喪) 중에 있었으니 마음이 어지러웠을 것인데, 비록 임금의 명이 있었다 하더라도 어떻게 서울에 머무르면서 일기를 찬술(撰述)한단 말입니까? 조신(朝臣)들이 찾아가서 보면 영접하지 않음이 없었고, 그가 겪고 본 것을 두루 이야기하면서 조금도 애통해하는 마음이 없었으니 죄가 큽니다. 어찌 이런 사람에게 지평의 임무를 줄 수 있겠습니까?”하였다.

이에 성종은 전교하기를 “그 일기를 지어 바친 것은 애통함을 잊고 한 것이 아니다. 다만 조신(朝臣)들을 영접한 것은 내가 알 길이 없었으며, 이제 그대들이 옳지 않다고 하니 해임했다”하였다.

한편 성종은 최부에게 미안했다. 1월 14일에 성종은 선정전에서 최부를 만나 표류할 때의 일을 묻고 옷과 가죽신을 내리면서 “네가 사지(死地)를 밟아 헤치고 다니면서도 능히 나라를 빛냈기 때문에 주노라”하였다. 그런데 최부의 곤욕은 이번으로 끝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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