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계홍의 역사소설 깃발

충무공 정충신 장군<130>-제8장 의주행재소, 회한의 땅

대신들은 대부분 분조에 합류했으니 주변에 사람이 없고, 명나라에서는 오라가라 기별이 없다. 뒤에서는 왜군이 쫓아오고, 앞길은 거친 물이 가로막는 압록강이니 숨이 컥 막힌다. 권위나 체모는 땅에 떨어져서 이래저래 절망적인데, 그렇다고 그의 능력으로는 어떻게 헤쳐나갈 방도가 난망해보이니 하는 일이라곤 눈물짓는 것밖에 없었다.

근래는 신임하는 이항복마저 압록강을 건너려는 것을 반대하고 나섰다. 소년병도 당차게 장계를 들고 올라와서 물을 건너서는 안된다고 읍소한다.

“도승지, 아니 지금은 병판이지. 그래 병판은 애초에 명으로 가자고 하지 않았더냐. 이제 와서 그래서는 안된다니 어느 것이 진실이냐.”

“마마, 그때는 맞고 지금은 틀릴 때가 있사옵니다.”

이항복은 도승지로 있을 때는 무조건 왕의 안위부터 걱정했으나 지금은 아니었다. 그때는 선택지라고는 그 길밖에 없었다. 그러나 지금 병조판서 입장에서는 나랏님이 내 나라에 있는 것만큼 국토방위가 잘되는 것은 없다고 확신했다. 나랏님이 없는 나라는 나라가 아니다. 백성들의 허무주의를 무엇으로 메워줄 것인가. 그림자라도 왕이 이 땅에 남아있어야 한다. 그것만으로도 일어설 용기를 불러일으키고, 나라를 다시 세울 근간이 마련되는 것이다. 왜의 침입은 없을 것이라고 단언했던 김성일의 의사를 뒷받침해준 유성룡도 지금은 자기 주장이 오류라고 여기고, 새로운 방비책을 세우자고 나서지 않는가. 모름지기 학자는 그른 것도 옳다고 주장하는 꼴통들이 있지만, 이렇게 자기 오류를 인정하고 새로운 대안을 내놓는 대인도 있는 것이다.

“마마, 귀선(龜船)이 떴다고 하옵니다.”

이항복이 새로 얻은 정보를 왕에게 고해 올렸다. 이것도 그의 마음을 진정시키는 데 힘이 될 것으로 판단하고 있었다.

“뭐 귀신이 떴다고?”

말귀를 못알아듣고 왕이 물었다. 여전히 그는 우리 물세(物勢)를 잘 알지 못했다.

“전라좌수사 이순신이 귀선을 만들었다고 하옵니다. 거북선이옵니다.”

“전라좌수사 이순신? 거북선?”

“그렇사옵니다. 그의 휘하에 있는 나주 출신 나대용 군관이 만들어서 실전에 투입했다고 하옵니다. 귀선의 아가리에서 한번씩 불을 뿜으면 왜의 함대들이 한꺼번에 수십 대씩 박살이 난다고 하옵니다. 무적 군선이옵니다.”

“나대용 군관? 무적 군선?”

왕이 나대용의 이름을 입안에 굴리고 있었다. 그런 장수가 있었더란 말인가.

“그렇사옵니다. 전라좌수영의 군관으로서 머리는 제갈량이요, 용맹이 남옥(명나라의 명장)이며, 기술이 귀신과 같다고 하옵니다. 귀선이 바다에 나서면 왜 선단이 꼼짝을 못하고 도망가기 바쁘다고 하옵니다. 이렇게 해서 왜의 병참선이 끊기므로 육지의 왜병은 식량보급을 받지 못해 아편에 취한 듯 한결같이 늘어져버릴 것이옵니다.”

믿기지 않는다는 듯 왕이 말했다.

“왜는 애초에 섬나라 해적들로, 배타고 온 장수란 놈들이 모두 거제, 사천, 남해, 돌산, 흥양(고흥) 보성을 침범한 놈들이 아닌가. 그자들이 남해안을 쥐새끼 곡간 드나들 듯이 했는데, 그렇다면 우리 남해안 지리에 빠삭할 것 아닌가. 그러니 우리가 수전(水戰)에서 이길 방도가 없는 것은 당연한 추리다. 그놈들은 바다에서만 살아왔으니 대신 육전에는 약할 것이다. 그러니 육군에 주력할지어다. 해전보다 육전에 능한 것이 우리 군사 아닌가.”

왕은 이렇게 오판하고 있었다. 바닷길을 내주면 왜 군사들이 용기백배하여 육상으로 기어오를 것이고, 전투식량 보급이 차단되면 각 마을을 약탈해 해결할 것이다. 그러면 국가는 이중삼중의 피해를 입는다.

마루바닥에 머리를 박고 엎드려 있던 정충신이 고개를 들어 임금에게 아뢰었다.

“전하, 귀선은 귀신잡는 해신이옵니다. 이제 걱정을 놓으십소서.”

“니가 어떻게 귀선을 아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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