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여름의 황금률

<나선희 스피치커뮤니케이션즈 대표>

설거지를 한다. 주방 세제를 자제하는 터라 온수를 쓴다. 카레 먹은 접시가 쉽게 닦이질 않는다. 세제를 풀까 잠시 망설이다 온수를 더 쓰기로 한다. 더위에 온수의 열기가 보태져 등에서 땀이 줄줄 흐른다. 우씨! 더운 김이 확 올라오자 나도 몰래 거친 말이 튀어나온다. “수박 있는가?” 하필 이때, 남편이 나에게 묻다가 된통 당한다. “그걸 왜 나한테 물어봐? 직접 냉장고 열어보면 될 걸!” 남편이 당황해하는 게 느껴진다. ‘설거지를 안 한다고 화가 났나?’, ‘혹여 간밤에 취해서 내가 수박을 싹쓸이 해버렸나?’ 아내가 성을 내는 이유가 설거지인지 수박인지 원인 분석에 들어갔다가 미궁에 빠지고 마는 남편. 여기서 남편이 “왜 성을 내고 그래? 물어봤을 뿐인데” 받아치면 전쟁, “내가 갖다 먹으면 될 걸 그랬네잉!” 한다면 평화로 이어질 것이다.

명심보감에 폭노위계(暴怒爲戒)라는 말이 있다. 갑작스런 분노를 경계해야 한다는 뜻이다. 자신의 감정을 자제하지 못해 분노를 쏟고 나면 그 결과는 의외로 심각하게 벌어질 수 있다. 간밤에 친구의 하소연을 듣고 잠 못 이루고 말았다. 이 친구는 사람은 좋은데, 한 가지 흠이라면 불의를 참지 못하고 버럭하는 것이다. 불의를 참지 못한다는 것은 상당히 정의롭게 들린다. 하지만 이것이 지극히 주관적으로 작용할 때가 문제다. 납득하지 못하면 상대는 심한 모멸감으로 분노를 키우게 된다. 평소 자기 기준으로 성에 차지 않으면 거침없이 “네 이년!” 하던 친구는 결국 그 “네 이년”의 반격으로 곤경에 처하게 되었다.

나만해도 그랬다. 설거지를 하다 짜증을 냈다. 짜증의 원인을 따져본다. 더워서 그랬다. 여름이 잘못한 건가? 온수가 잘 못 한 건가? 더운 게 싫다면 주방세제를 썼어야 했다. 그렇지만 환경보호를 위해 주방세제보다 온수를 선택했다. 내 편의보다 환경을 살리자는 의미를 선택한 거면 그로써 만족했어야 했다. 선택 후에는 반드시 감내가 따른다. 선택한 것은 나기 때문이다. 내가 선택해놓고 성을 내는 것은 나에게 성을 내는 것이다. ‘너는 왜 이 더위에 세제를 쓰지 온수로 이 고생을 하냐?’며 스스로 화를 낸 거다. 그런데 불똥이 누구에게 튀었는가? 엉뚱한 남편을 잡은 거다. 당장 남편에게 사과해야겠다. 그렇지 않으면 언제 ‘수박 반격’이 돌아올지도 모를 일이다.

초등학교 3,4학년들을 대상으로 설문조사한 결과가 있다. 거의 30%의 아이들이 심한 모욕감을 느낄 정도로 부모에게 꾸지람을 들은 적이 있다고 한다. 꾸지람을 들었던 아이들 가운데 ‘가출하고 싶었다’는 아이들이 31%, ‘죽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는 아이들이 27%라고 했다. 말은 한 사람의 삶을 파괴시킬 정도로 무섭다. 어려서는 힘의 논리에 밀려 가만있겠지만 사춘기가 되면 어떻게 돌변할지 알 수 없다. 부모가 무심코 뱉어낸 말들이 가출 또는 자살소동이라는 흉기로 돌아올 수도 있다.

반대로 한 사람이 해준 따뜻한 말이 인생을 뒤바꾸기도 한다. “이 아동은 발음이 정확하고, 조리 있게 자기 생각을 잘 얘기합니다.” 초등학교 때, 내 통신표에 적어준 선생님의 한마디가 나를 아나운서로 이끌었다고 생각한다. 나는 그 칭찬을 계속 들으려고 애를 썼다. 발음에 신경을 쓰고, 국어에 관심을 가졌으며, 떨림을 견디면서도 발표를 자청했다. 그러다보니 말 잘하는 아이로 성장할 수 있지 않았을까?

상대를 기분 좋게 하는 말을 심사숙고 하는 것은 사랑이다. 사랑이 부족한 사람이 표현이 서툴다. 수학을 못하는 아이에게 “넌 왜 이렇게 수학을 못하니?”라고 말하기보다는 “넌 영어를 잘해서 좋겠다.” 이처럼 잘하는 것을 먼저 칭찬해주고 “수학만 더 잘하면 좋겠다.”라는 식으로 말을 하면 효과적이다. “영어를 공부하는 것처럼 수학 공부도 좀 해볼래?” 노력하다보면 이런 표현도 가능하게 된다.

“남에게 대접받고자 하는 대로 남을 대접하라”는 황금률이란 말이 있다. 황금률은 그리스도교 윤리의 근본 원리로 3세기의 로마 황제 세베루스 알렉산데르가 이 문장을 금으로 써서 거실 벽에 붙인 데서 유래했다고 알려져 있다. 지금은 “뜻이 심오하여 인생에 유익한 잠언”을 의미하는 황금률은 네가 싫어하는 일은 아무에게도 하지 말라는 뜻이기도 하다. 초복을 보낸 요즘 35도까지 오르는 폭염으로 불쾌지수가 높다. 가만있어도 견디기 힘든 무더위라 누가 건들기만 하면 너 잘 걸렸다, 한판 붙게 될 위기의 나날이다. 말 한마디도 가려야 한다. 내가 듣기 싫은 말은 남에게도 하지 말자. 이것이 한여름의 황금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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