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계홍의 역사소설 깃발

충무공 정충신 장군<137> 제8장 의주행재소, 회한의 땅

“의병장들이 잘 한다는데 왜 엉뚱한 짓을 한단 말이냐?”

왕이 거듭 화난 목소리로 따져물었다.

“그것이 아니옵고, 병사는 벌만 가지고는 아니된다, 죄를 짓지 않도록 미리 방비하는 것도 병사지도(兵士之道)인즉, 과오가 나오지 않도록 미리 방비할 것이며, 나오면 엄격하되 동시에 상도 내려야 하느니라, 하고 교지를 내리셨나이다.”

“무슨 상을 말하는 것이냐?”

“병사들의 사기를 고려하여 △적을 쏘아죽인 자를 으뜸으로 치고, 목을 베어온 자를 그 다음으로 치며, 적진에서 부상을 입은 아군을 업고 온 자를 그 다음으로 친다고 하였사옵니다. 그리고 △적의 무기와 재물을 취한 자에게 그 전리품으로 상을 내린다 △한 사람이 두 사람의 의병을 모아오면 그 부모에게 육년근 삼뿌리를 내리며 △용전용사를 골라 새 전복(戰服)을 내린다, 라는 상이옵니다. 벌보다 중요한 것이 상이니, 상에 인색해서는 안된다는 교지를 내리시자 각 고을의 청년들이 구름떼처럼 모여들었다 하옵니다. 고을마다 모병을 위해 방문하는 왕세자 앞에서 백성들이 엎드려 머리를 조아리기를 ‘왕세자 저하, 천세만세 강녕하소서, 빛이 보이나이다’ 하고 눈물지었다 하옵니다.”

고지식한 윤근수는 상황을 파악하지 못하고 보고 들은대로를 곧이곧대로 아뢰었다. 좋자고 한 말이었지만 선조는 이 말을 듣고 화가 더욱 치밀었다. 말한 놈도 그렇지만, 아들놈이 못마땅한 것이다. 지가 다 해먹겠다고? 이상한 질투심이 생겼다. 기분대로라면 잡아들여 요절을 내고 싶었다.

왕세자라고 했지만 서자에 서자의 자식 꼬락서니 아닌가. 그런 자가 나대는 것같아 왕은 아니꼬았다. 구박당한 며느리가 시어미가 되면 더 자기 며느리를 구박하는 것과 같이, 자신도 서자의 서자 출신이면서 똑같은 처지의 왕세자의 꼴을 못봐주고 있었다. 자기가 낳았지만 후궁의 종자여서 웬지 믿음이 가지 않는데, 그런데 하는 짓은 얄미울 정도로 똑똑하다. 적당히 무능하고 게으르고 모자란 듯해야 귀여워할 수 있는데, 이건 숫제 아비의 권위를 누를 위세로 총기 앞세워 일을 처리하면서 백성들의 마음을 사고 있는 것이다.

선조가 할 수 있는 일은 빨리 정비(正妃)를 들여서 제대로 된 왕자를 보는 일이었다. 정비가 일찍 죽고, 세자마저 조사(早死)하니 다시 정비를 들여 법통을 제대로 이어받을 왕세자를 낳고 싶었다. 열등감이 많을수록 그것은 더욱 간절해지고 있었다. 기록에 따르면, 이 과정에서 선조는 광해군의 후계 문제를 가지고 열다섯 번이나 왕세자 자리를 흔들었다고 한다. 광해군이 조금이라도 거슬리는 일을 하면 어김없이 혼내고, 좋은 일을 해도 꼬투리 잡아 추궁하는 것이 예사였다.

“전하, 왕세자 저하의 어진 행적이 전국을 들불처럼 일어나게 하고 있사온즉, 마음 놓으소서. 명나라로 피신한다는 것은 천부당한 일이옵니다.”

결론삼아 윤두수가 말했다. 그는 아우를 통해 왕의 발길을 멈추게 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만 하라.”

왕은 입맛 없다는 듯 조상의 입을 막았다.

“명나라도 상감마마께옵서 들어오시는 것을 탐탁히 여기지 않사옵니다. 이 핑계, 저 핑계 대고 배를 보내오지 않는 것을 보면 아실 수 있는 일이옵니다.”

“그럴 리 없다.”

“그럴 리가 있사옵니다.”

그는 따박따박 대꾸했다. 어전이라고 해야 갈대를 엮어서 벽을 친 임시막사 같은 곳이니 왕실 분위기는 찾아볼 수 없었다. 그런데도 왕은 현실을 인정하지 않고 여전히 절대군주로 여긴다. 윤두수가 보기에 혼주(昏主)는 아니어도 패주(敗主)는 분명한 일, 그래서 왕의 방향을 바로잡아주고 싶었다.

임진강의 패배 소식이 전해졌을 때 이항복은 명나라에 구원을 요청하자고 했으나 윤두수는 반대하고 우리의 힘으로 맞서자고 주장했다가 대판 다툰 적이 있었다. 그러나 이항복은 때를 알고 지금은 윤두수와 뜻을 함께 하고 있었다. 이항복은 그만큼 유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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