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계홍의 역사소설 깃발

충무공 정충신 장군<138> 제8장 의주행재소, 회한의 땅

명은 애초부터 조선을 의심하고 불신했다. 부산포에서 한양 도성까지 천리 길을 한달음에 왜군이 달려온 것은 조선이 길을 터주었기 때문이라고 보았다. 명을 칠 테니 조선은 길을 내주어야 한다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요구를 받아들인 것임에 틀림없어 보였다.

그 많은 군사가 맨손으로 달려가도 스무날이 걸리는 한양 길을 크고 작은 전쟁을 수 차례 치르면서도 불과 열이레만에 한양에 도달하니, 전쟁은 그저 요식행위고, 그들끼리 맺은 비밀 약조를 이행하는 것으로밖에 볼 수 없었다.

그런 처지에 왕이 의주에 이르러 배를 보내달라고 한다. 쓸개가 있는 왕인지 도대체가 한심해보였다. 자신이 손수 칼을 차고 전장에 나가 진두지휘해도 부족할 판에 도망을 나온다. 거기엔 필시 무슨 곡절이 있던지, 도요토미의 흉계에 넘어간 것이 아닌가? 이렇게 명은 의심했고, 그래서 수차 사신을 보내어 정탐했다.

예판 윤근수는 명의 병부상서(국방장관) 석성의 사신 임세록을 맞아 실정을 설명했으나 의심을 거두지 않았다. 명은 다시 참정 황응양을 보내 염탐했다. 요동총병 양소훈도 조선 정황을 살펴보고 ‘조선이 아비 나라를 배신할 수 있다’는 보고서를 북경 정부에 올렸다. 양소훈은 그러면서 다음과 같이 전략을 세웠다.

-전쟁은 남의 나라에서 그 나라 물자와 그 나라 인력으로 싸우는 것이 최상의 전법이다.

전쟁터를 굳이 자기 나라로 끌어들일 필요가 없다는 논리다. 외국에서 전쟁을 치르면 자기 나라는 물질 손실도 없고, 병력 손실도 있을 수 없다. 내 나라 내 강토가 허물어질 리 없으니 져도 본전이다. 반면에 이기면 다 얻는 것이다.

명은 조승훈 군대를 간보기로 평양에 출격시켰으나 대패했다. 평양성 싸움에서 왜 군단은 명군을 어린애 다루듯했고, 조승훈 군대는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렸다. 왜군은 문자 그대로 무적의 존재였다.

따지고 보면 명은 기울어져가는 나라였다. 건국 200년이 다된 지금 벌써 노쇠해지고, 관리의 부패와 법도의 해이, 군대의 이완으로 나라 꼴이 말이 아니었다. 7천만의 인구 중 군대 정원이 300만명을 두었으나 병사들이 도망가거나 기피하고, 돈먹고 대리복무를 하는 무지랭이 따위 겨우 50만의 오합지졸로 남아 있었다. 거기에 몽골족과 만주족의 침략에 나라는 만신창이기 되어가고, 여기에 강력 왜군이 쳐들어올 태세다. 비참하게 망할 것은 분명해보였다.

명은 서둘러 밀사 심유경을 평양을 점령중인 고니시 유키나가에게 보냈다. 화의(和議)를 서둘지 않으면 요동땅은 물론 북경까지 내놓아야 할 판이었으니 그 길밖에 없었다.

심유경은 1592년 9월 평양성 북쪽 강복산 기슭의 객관에서 평양점령군사령관 고니시 유키나가를 만나 머리를 조아렸다.

“우리는 싸움보다 화평을 원하오. 화의조건을 제시하시오.”

고니시는 심유경에게 강화 7개조를 제시해 도장을 받아냈다. 강화 7개조는 △화친 △할지(일본측 용어로서 조선 분할) △할지는 조선의 4도를 일본 영토에 속하게 하고, 대동강으로 경계를 한다 △조공은 공선(貢船:공물을 수송하는 배)으로 한다는 것 등이다.

심유경은 싸우지 않는 언도지심(安堵至心)으로 왜의 일방적 요구를 그대로 수용했다. 화의로 그들 역시 대동강 이북을 토막내 가져가는 잇속이 있다. 산악지방이 많긴 해도 면적은 대동강 이남과 큰 차이가 없는 땅이 생기고, 국경선이 육백리 아래로 남하하게 된다.

조선반도는 속국일망정 이전까지 명의 땅이 아니었다. 그런데 화의를 통해 두 토막내면 조선왕은 사라지고 북방지역을 차지한다. 공물도 조선의 생산물로 내니 생색낼 수는 있어도 명으로서는 손해볼 것이 없었다. 패하고도 얻는 것이 많은 전쟁이었다.

이런 내용을 의주 행궁의 어떤 누구도 아는 자가 없었다. 다만 전쟁이 일시 중단되니 난리가 멈추었다고 조정과 백성들은 얼싸안고 춤을 추었다. 사정을 모르고 의병들이 국지적으로 왜병과 붙었을 때는 명군이 달려가 저지시켰다.

“너희 새끼들, 싸우지 않도록 해주었더니 겁도 없이 대드냐? 그러다 또 좃팽이치고 도망갈 놈들 아녀? 만용 부리지 말고 당장 창을 내려놓아라. 안디질라면 창을 내려놓으란 말이다!”

정말로 평화가 왔다. 아버지 나라의 배려로 전쟁이 멈춰졌으니 그 은공을 잊을 수 없다. 명군이 지나갈 때마다 지체높은 사람들이 나가 엎드려 절하고, 명나라가 있는 서쪽을 향해 삼배, 또는 구배를 올리며 눈물을 흘렸다. 지체낮은 백성들도 양반들을 따라 무릎꿇고 굽신거렸다.





"광주전남 지역민의 소중한 제보를 기다립니다"  기사제보
저작권자 © 남도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