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계홍의 역사소설 깃발

충무공 정충신 장군<140> 9장 다시 광주

정충신이 자세를 고쳐 앉으며 말했다.

“꼭 만나야 할 여자이옵니다.”

“어떤 처자인가.”

“두 사람 모두 정혼한 여자이옵니다.”

“처자도 아니고 정혼한 여자? 그것도 두 여자씩이나?”

이항복이 놀라서 물었다. 당시는 조혼 풍조이니 우리나이로 열일곱, 만으로는 열여섯이니 정충신이 한창 피어나는 이팔청춘이고, 결혼적령기도 된다. 그러니 당연히 혼인 맺을 여자가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 그런데 생뚱맞게 모두 이미 정혼한 여자라니? 무슨 곡절이 있긴 분명히 있는 것 같다.

“남녀간의 애정사를 꼬치꼬치 묻는다는 건 도리가 아니다만, 그래도 새파란 총각이 하필이면 혼인한 여자를 만난다고 하니 괴이하다. 무슨 곡절이 있는 것같아 궁금하기도 하다. 혹 삿된 생각을 하는 것 아닌가.”

“삿된 생각이 아니옵니다. 한 여자는 용인 아래, 천안 인근의 성환이라는 산골마을에서 왜놈 병사들에게 당한 여자이옵니다. 시아버지와 남편이 맞아죽고, 홀로 집에 남아 탄식하고 있는데, 인근에 주둔한 왜병들이 들이닥쳐서 윤간을 하였나이다.”

“저런? 그래서?”

이항복이 분노에 찬 목소리로 물었다.

“제가 의주 오는 길에 여자의 마을에 당도했을 때, 왜병들이 마을에 불을 지르고 젊은 여자들은 끌고 가고, 남정네들은 발에 쇠사슬로 묶고 우마꾼으로 동원하고, 마을의 곡식과 반찬거리를 모두 훑어갔나이다.”

“그럼 너는 그때 뭘 했더란 말이냐?”

“숨어있다가 야음을 틈타 집으로 들이닥치는 왜놈 병사들을 해치웠나이다.”

“어떻게?”

“제가 변장해서 안방 이불속에 숨어있다가 왜병가가 들어오는 족족 아작을 내버렸습니다. 하지만 네 번째엔 힘이 부친 나머지 들통이 나버렸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되었단 말이냐.”

이항복의 입이 바작바작 타는 듯했다.

“그때 어떤 분의 도움으로 기어이 적병 목을 땄나이다. 그분은 정처없이 떠도는 분이옵니다.”

“정처없이 떠도는 분? 포수인가?”

“그렇사옵니다. 기축옥사 때…”

말을 더 하려다 정충신은 입을 다물었다. 기축옥사는 난리통에도 반역으로 몰았고, 지금도 혐의자가 있으면 가차없이 찾아내 국문하고 목을 베었다. 이항복도 그 일역을 담당한 사람이었다.

“왜 말하려다 말고 주춤하느냐. 기축옥사는 무슨 뜻이냐?”

“사내는 기축생으로서 두 번째 회차를 지냈다 하니 올해 스물일곱 살이 되옵나이다. 그 장정이 저를 도와 왜병 목을 베었습니다. 그리고 여자를 산중 초분골로 데려가 간병하고, 두 사람이 은신하기로 하였사온 바, 저는 의주행이 다급한지라 헤어졌나이다. 그래서 그분을 꼭 만나야 하옵니다.”

“그렇다면 그 사내도 만나야 하지 않겠느냐?”

“정처없이 떠도는 분인지라, 인연이 되면 만나겠습지요.”

길삼봉에 대해서는 숨기고 보아야 할 것 같았다. 나주 금성산에서 검술과 궁술을 익혀서 가슴이 떡벌어진 사내. 그는 수렵으로 한 세상 사는 사람 같았다. 기축옥사 난리를 겪은 뒤 풍진 세상을 멀리하고 산과 계곡을 벗삼아 살아가는 사람이었다. 그의 용맹성은 호랑이보다 당찼다.

산중엔 사람보다 호랑이 곰 늑대 시라소니 등 사나운 것에서부터 멧돼지 여우 노루 토끼 등 짐승들 천지였다. 짐승이 무서워서 사람이 드나들지 못하니 짐승들은 더욱 들끓었고, 길삼봉은 유유자적 그들을 잡아먹고 세상을 살아가고 있었다. 그것들을 때려잡으러 다녔으니 몸이 민첩했을 것은 당연했다. 왜놈 때려잡은 것도 그 힘이었다.

그것은 정충신도 마찬가지였다. 열두세 살때부터 무등산에 올라 멧돼지와 사슴과 노루 사냥을 했다. 사냥에 재미를 붙이니 훈련이 되고, 산을 타는 데 익숙해졌다. 뭇 짐승들은 추적 한식경이면 끝이 났다. 노루피를 먹고, 곰 쓸개를 뽑아먹었다. 그러니 힘이 당찼다. 이 점을 이항복은 결코 놓쳐보지 않았다. 저 소년이 장차 물건이 될 것이로다...

길삼봉은 금강 나루터의 깊은 주막에서 “금성산에 길삼봉, 무등산에 정충신“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그는 길삼봉보다 여인의 안부가 궁금했다.

“다른 여자는?” 이항복이 물었다.

“네. 소연이라는 여자이옵니다.”

이 대목에서 얼굴이 빨개지는 정충신을 보고 이항복은 당장 알아차렸다. 역시 소년은 순수했으므로 표정에 내면이 그대로 표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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