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계홍의 역사소설 깃발

충무공 정충신 장군<141> 9장 다시 광주

“소연이란 여자는 어떤 여자인고?”

“이치재 전투장에서 만난 여자이옵니다.”

“나이가 몇인고?”

“저보다 한 살 많사옵니다.”

“그런데 혼인한 여자렸다?”

“그렇사옵니다.”

“왜 하필이면 혼인한 여자를 마음 속에 품고 있는고?”그 남편은 죽었사옵니다.“

“그렇다면 열녀로 살게 두어야지, 왜 인연을 맺어서 남의 가문을 수치스럽게 하려는고?”

“열녀로 살게 한다는 건 깊이 생각해봐야 하옵니다. 저와 살든 살지 않든 그것은 잔혹한 일이옵니다. 무슨 좋은 일 있다고 한많은 청춘을 독수공방 시켜야 하겠사옵니까.”

“어허, 묘한 젊은이군. 우리에겐 윤리 법도가 있지 않느냐. 충신불사이군(忠臣不事二君)이라고, 충신은 두 임금을 섬기지 아니하듯, 열녀불경이부(烈女不更二夫)이니라. 즉, 열녀는 두 남편을 섬기지 않느니라. 이것은 제나라 충신 왕촉에게서 나온 말이고, 우리는 대국의 예절과 법도를 그렇게 따르는 소국 아닌가.”

왕촉은 연나라가 제나라를 공격하고, 연나라 장수는 충신 왕촉을 찾아 연나라에 입조하라고 권유하는데, 왕촉은 거부하며 ‘충신은 두 임금을 섬기지 아니하고 열녀는 두 남편을 섬기지 않는다’는 말을 남겼다. 그는 목이 달아났으나 충절이 드높다 하여 후에 대충(大忠)이 되었으며, 조선은 대국의 본을 따르는 예법국가가 되었다.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사옵니다. 열녀비 팔아먹고 사는 가문이라면 수치로 알아얍지요. 그런 여인네를 얼마나 가슴 아프게 하나이까. 여자가 밤을 견디느라 자기 허벅지를 인두로 지지고, 바늘로 눈을 찔렀다 하옵니다. 어떤 여인은 방죽에 빠졌다고 하고요. 저는 그 꼴 못보겠습니다.”

이항복은 정충신의 생각이 상궤에 벗어난다고 생각했지만, 젊은 소년다운 상상력과 세상을 보는 눈이 순결하다고 보았다. 그러나 그건 예의법도는 물론 질서를 파괴하는 파렴치범에 국사범이 될 수 있다. 정해진 바대로 살고, 경서를 닦아서 문과에 급제해 입신출세하면 먹을 것 입을 것, 그리고 취향에 따라 여자도 한껏 취할 수 있다. 그런데 쓸데없는 상상력으로 기존 질서를 어긋나게 한다는 것은 당사자를 위해서나, 가문을 위해서도 바람직하지 않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왕도 때로 정충신을 신선하게 받아들이고 있었다. 영혼이 곧고 맑다는 것 때문인가. 왕의 평소 품성을 아는 이항복으로서는 그러나 불가사의한 일이었다. 하긴 때로 주상다운 생각이라고도 여겼다. 그는 다른 누구보다 자유인이다. 자유롭게 생각하는 지위의 사람이다. 함부로 생각해도 탓하는 사람이 없고, 함부로 말해도 삿대질하고 나설 사람이 없다. 왕의 지위는 절대적이어서 그의 어떤 말도 절대적인 것이었다. 그러니 그는 자유롭게 사유할 자유가 있다.

“너의 생각은 열녀비에 문자 하나 박아서 무슨 좋은 일 있겠냐는 뜻이렸다?”

기죽지 않고 정충신이 대답했다.“그렇사옵니다.”

“네가 성혼하여 만약에 네가 일찍 죽고, 너의 내자가 혹 빨리 재가하면 너는 저승세계에서 분노하지 않겠느냐.”

“저는 죽을 일도 없지만, 죽더라도 무슨 저주를 하겠나이까. 죽은 자는 재가 될 뿐이지요. 거름이 될 뿐이옵니다.”

“그렇게 보면 허무한 생각이다. 온갖 무덤이 섭섭해하지 않겠느냐.”

“그건 살아있는 사람의 생각일 뿐이옵니다. 살아있는 자의 자기 현시욕구이옵니다.”

“기특하고도 무서운 생각이로다.”

이항복은 속으로 가슴을 쳤다. 저런 똑똑하고 용기있고, 상상력 풍부한 청년에게 딸을 주어야 하는 것인데, 그러지 못한 아쉬움이 큰 것이었다. 사위 윤인옥에 비하면 눈이 반짝반짝 빛나는 정충신이 몇 곱절 낫다. 하지만 시운이 맞지 않았다. 그가 늦게 나타났고, 딸은 정충신보다 몇 살 연상이었다. 당시 풍조로 보아서 그 정도의 나이 차이는 통용되었지만, 시운의 때가 맞아떨어지지 못한 것이다. 한참 생각 끝에 이항복이 말했다.

“너는 지금 여자를 살필 때가 아니다. 경서를 많이 읽었으니 이제는 병서를 읽어야 할 때니라. 잡념을 거두어야 한다.”

이항복이 아쉽다는 듯, 그러나 굳은 표정으로 말했으므로 정충신은 무겁게 그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세상에서 가장 나쁜 것은 어리석은 것이니라. 그것이 나라를 망치는 법이다. 용기없고 약하면 키우면 되는 것이고, 무서운 것은 피하면 되지만 어리석은 것은 재앙이다. 개인사는 물론 국사도 마찬가지니라. 그렇다면 어리석음을 막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겠느냐.”

이항복은 왜란을 겪은 것도 나라가 용기가 없고, 무능해서가 아니라 어리석어서 겪는 비극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똑똑해져야지요.”

“어떻게 똑똑해져야 하느냐.”

“당차부러야지요.”

“전라도 말이냐?”

“그렇사옵니다.“

“장인 어르신께서도 서찰에서 말씀하셨은즉, 너는 내가 거두겠다.”

이항복이 총기있게 빛나는 정충신을 똑바로 응시했다. 그때 이항복의 정실부인 안동권씨가 사랑채로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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