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계홍의 역사소설 깃발-충무공 정충신 장군<142> 9장 다시 광주

부인 안동권씨 손에는 불룩하게 물건이 싸인 비단 보자기가 들려있었다.

“총각이 내일 떠난다구요?”

“그런다 하오.”

“아버님 전복(戰服)을 마련했습니다. 겨울철도 되니 솜이 박힌 전복이에요. 인편이 있으니 보내고 싶네요.”

권씨부인은 친정 아버지 권율 장군의 외동딸이었다. 권씨부인은 정충신이 고향으로 돌아갈 날짜를 재다가 며칠 전부터 아버지의 전복을 만들었다. 그녀로서는 이치전쟁 이후 전선에서 활약하고 있는 아버지가 심히 걱정되었다. 겨울 들판에서 야전군을 지휘하려면 방한복을 겸한 전복이 반드시 필요했다.

그녀는 아버지가 이치·웅치를 지킴으로써 왜의 진격을 막았다는 얘기를 진작부터 듣고 기뼜지만 늘 가슴을 졸였다. 전선은 죽음이 병가지상사라 하지 않았던가. 그러니 전시에는 내 몸의 방비가 무엇보다 중요하다. 지금은 또 겨울의 초입이다. 의주 땅은 벌써 된서리가 내리고, 압록강 상류 유역은 얼음이 얼었다.

40 먹은 딸이라도 딸은 딸이다. 무남독녀 외동딸인지라 아버지의 사랑을 듬뿍 받으며 자란 만큼 부녀지정(父女之情)은 각별하였다. 지금 아버지는 하루 이틀 다녀올 거리도 아닌 이천오백리나 떨어진 전라도 땅에 계시다. 그러니 아버지를 그리는 마음은 더욱 간절하였다. 조정에서 아버지를 평가하니 그 또한 자랑스러럽고, 아버지의 옥체건안이 반드시 필요하였다.

아버지는 야전에 몸이 달궈진 분이 아니지만 금산의 이치전쟁, 진안의 웅치전쟁에서 크게 전공을 세워 나라의 근본을 세웠다고 했다.

사실 이치·웅치 전투는 일본이 그 어떤 전투보다도 조선반도 점령에 가장 큰 패전이자 실책이라고 일본사에서 지적하고 있다. 이 전투는 조선군의 숫적 열세로 절대 불리했으나 고경명이 이끄는 전라도 의병부대가 일본군 후방을 교란하고, 권율 부대가 정면에서 맹공격을 퍼부어 고바야카와 다카카게 6군단을 격퇴했다. 고바야카와 군은 금산의 본 기지가 털릴 것을 염려한 나머지 창졸간에 오백여 일본군 시체를 버려두고 후퇴했는데, 이들이 이렇게 물러난 바람에 전라도 점령에 실패하고, 사기가 떨어져 전투력이 현저하게 약화됐다. 일본 역사학자들에 따르면, 일본군이 조일전쟁을 완벽하게 마무리하지 못한 가장큰 원인은 이치·웅치전투를 승리로 이끌지 못하고, 붕괴된 데 있다고 평가했다. 해상전의 명량·노량 ‘양량대첩’과 육전의 이치·웅치전 패배로 호남을 병탐하지 못한 것을 치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중대한 전과를 올린 아버지 권율을 바라보는 이항복의 부인 안동 권씨는 광주로 가는 정충신에게 아버지의 전복을 손수 만들어 쥐어 보내고 싶은 것이다.

“어린 사람이 그 머나먼 길을 무거운 전복을 어떻게 가지고 간단 말이오?”

이항복이 내키지 않는다는 듯 말하며 두 손으로 전복을 들어보았다. 실히 열댓근은 되어보였다.

“이렇게 무거운 전복은 처음이오. 이렇게 무거운 것 입고 어떻게 움직이겠소?”

“아니어요. 지휘관은 진지에서 지휘를 할테니 무거워도 상관이 없지 않나요? 누각에 올라서서 군사를 지휘하면 움직이지 않으니 훨씬 춥겠지요. 움직이는 병사들이야 쫓고 쫓기는 사이 이마에 땀이 솟구치겠지만 누상에서 호령하면 얼마나 춥겠어요?”

“그런데 왜 이렇게 무겁소?”

“전복 저고리 앞 뒤쪽에 철판을 깔았답니다.”

이항복은 격식과 체면을 중시하는 풍토에서 해학과 기지가 넘치는 명승지였지만, 아내에게만은 근엄했다. 외동딸의 신분인지라 때로 겁 없이 대들고 남편을 깔아뭉개니 버릇을 잡느라 한때 애를 먹었다. 권씨부인이 저고리 옷고름을 눈에 갖다 대고 훌쩍거리기 시작했다.

“아버지 말이라면 당신 또 우는구려. 내가 잘못했소. 그래도 전복은 어렵겠소. 호남지방의 면화 질이 좋으니 충신더러 그곳에서 전복을 하나 맞춰서 당신 선물이라고 갖다 바치면 어떻겠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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